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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1/06/21 20:25:59 |
Name | joel |
Subject | WBC와 미국 주도의 야구 세계화에 대한 삐딱한 이야기. |
이야기를 하기 앞서서 한 가지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스포츠에서 특정 종목의 세계화 척도 또는 인기는 종목의 우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종목은 모두 공평하게 쓰잘데기 없는 공놀이거나 혹은 인생을 걸 가치가 있는 유흥이지요. 현재 제일 세계화가 잘 되어있는 스포츠 종목은 축구입니다. 천하의 IOC를 상대로 갑질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종목이자 UN 가맹국보다 많은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죠.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건 축구 이야기가 아니니 자세한 건 나중으로 미루고 간단히 정리하자면 종목의 태동 당시부터 이미 생활과 밀접하게 자리잡은,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종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는 크게는 국가, 작게는 지역, 또는 나와 함께 망치질을 하고 있는 공사판 동료들이었고요. 지금도 유럽의 이름난 클럽들이 자신들의 모체를 특정한 공동체에 두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축구는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의 영향력을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죠. 그리스의 지명인 코린토스가 뜬금없이 '코린토스 사람의 정신'을 제창한 잉글랜드의 먹물 도련님들의 축구팀 이름으로 사용되더니(코린씨언 FC), 이게 다시 브라질로 전해져 '코린치안스' 라는 팀으로 발전한 것이 그 좋은 사례입니다. 이렇게 축구가 가진 개방성과 공동체주의가 이입되기 쉬운 특성을 잘 이용한 것이 FIFA입니다. FIFA는 출범 당시만 해도 몇몇 국가들의 동창회 수준이었지만 국가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월드컵을 이용해 세계에 축구를 보급하면서 인기를 끌어올리고, 몸집을 불려나갔습니다. 한국과 FIFA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죠. FIFA는 유럽과 남미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아시아를 위해 월드컵 티켓을 배부해줬고, 월드컵 배당금을 통해 한국 축구의 외연을 크게 키워줬습니다. 그렇게 한국에서 축구 인기가 높아지자 한국은 FIFA와 유럽 빅리그에게 광고, 중계료로 보답했습니다. 유럽에서 뛰는 축구 선수들의 몸값이 높아진 것도 아시아 시장이 개척되고 기술이 발달해 세계에 중계권을 팔게 된 이후였죠. 선수들이 클럽에서 월급받지 FIFA에서 받는 게 아닌데 FIFA가 무슨 권리로 선수들을 차출하느냐? 라는 의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이 이것입니다. 축구의 역사에서 국제 기구에 의한 세계화와 상업화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었기에, 클럽들 입장에서도 국가대항전이 주는 이익이 분명하기에 가능한 것이죠.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오월동주가 점점 흔들리고 있긴 합니다. 이에 반해서 미국 스포츠는 좀 달랐습니다. 유럽에 비해 압도적인 시장의 크기, 고인물들이 지역에 눌러사는 것이 아니라 매년 타국에서 청정수들이 유입되는 환경,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승전국가의 지위, 본디부터 풍요로웠던 환경 덕분에 굳이 세계로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넓게 펼쳐진 풍요의 땅을 놔두고 양차 대전과 식민지배로 피폐해진 외국으로 간다? 그럴 필요가 없었죠. 그 대신 미국 내에서 빠르게 상업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초창기의 잉글랜드 축구협회 귀족들이 '고귀한 신사들이 어찌 상금이나 급여 따위를 위해 공을 찰 수 있느뇨' 같은 신선놀음에 빠져있을 무렵에 미국은 이미 구단주들이 모여 리그를 결성하고 구단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규칙을 제정하고 있었죠. 이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흑인 선수의 존재입니다. 19세기 영국이나 미국이나 인종차별의식은 오십보백보였겠지만 영국에선 19세기에 이미 최초의 흑인 축구선수 앤드류 왓슨이 등장하여 별 문제 없이 코린씨언 FC 소속으로 경기를 뛰고 트로피를 안았던 반면 미국 MLB에서는 1947년 재키 로빈슨의 등장까지 흑인 선수들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양국의 사회 환경의 차이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넓게 퍼져가는 종목과 배타적으로 높이 솟아가는 종목의 차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FIFA와는 달리 IOC나 WBSC 같은 국제 기구들은 미국의 사무국들에게 지분을 주장할 수가 없으며 구속력을 갖지도 못 합니다. 야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퇴출되고 IOC와 MLB 사무국이 충돌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세계의 깃발 아래 숙이고 들어오라는 IOC와 아쉬울 거 없는 MLB의 다툼이죠. WBSC는 정말 힘없는 약소 기구라서 MLB에게 감히 맞설 수도 없고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MLB 사무국이 WBC를 발족하고 미국 주도의 야구의 세계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야구의 세계화...그 성공여부는 둘째치고 이것이 한국 야구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해봅시다. 간단히 말해 축구의 사례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그 어느 종목보다 세계화가 잘 되어 있다 하면 듣기는 좋은데 온 세계의 재능들이 유럽으로, 돈 많이 주는 리그로 모여드는 것이 그 세계화의 결과물입니다. 한국 프로축구의 팬들이라면 뼈저리게 공감하실 겁니다. 유망주들은 키워준 팀에 입단도 하기 전에 외국으로 팔려가거나 무단으로 나가고, 스타 플레이어들은 일찌감치 중동, 중국, 일본으로 팔려갑니다. 드래프트도 사실상 못 하고 선수들의 이동을 막을 수도 없어요. 막말로 선수들이 외국 나가서 떼돈을 벌거나 말거나 팬 입장에선 좋아하는 선수를 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최고인데 말이죠. 이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02 월드컵과 08 베이징 올림픽입니다. 월드컵의 영웅들은 줄줄이 해외로 나가버렸고, 팬들이 그들을 보려면 축구장이 아닌 tv 앞에 앉아야 했지만 베이징의 영웅들은 고스란히 한국에 남아 인기를 이끌었지요. 흔히 야구를 비하하는 악성 세력들이 야구가 세계화가 안 된 것을 비웃는데 저는 오히려 그 세계화가 되지 않은 것이 한국 프로야구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시의적이고 운에 의존하는 국제대회 성적 따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리그 자체의 힘만으로 선수들을 기르고 팬들을 유지해온 것이 야구계의 저력이었지요. 베이징 키즈니 뭐니 하지만 사실 베이징 이전이나 이후나 야구는 부침이 있을 뿐 늘 인기종목이었고요. 요약하자면 세계화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종목의 강점과 국제대회가 주는 이점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베이징 이후 한국 야구계의 대성공의 발판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 야구계에서는 WBC와 베이징으로 맛 본 성공에 취했는지 지속적으로 국제대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한국 야구계가 국제대회 성과를 거둔 것이 한국 프로야구의 재미를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 성과 덕분에 리그를 지배하던 에이스와 불세출의 타자들이 줄줄이 도전의 문을 두드리며 한국을 떠났죠. 그렇다고 해서 축구처럼 국제기구에서 짭짤한 배당금을 챙겨서 외연이 크게 성장한 것도 아니고요. 예나 지금이나 국내 기업들 투자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이런 현실에서 미국 주도의 야구의 세계화가 무엇을 불러올 것인가? 한국이 미국, 일본을 잇는 3번째 빅리그로 자리잡으며 야구 후발주자들에게 프로야구 중계권을 판매하고 좋은 재능들을 데려오는 희망적인 미래일까요? 아니면 한국 선수들의 미국, 일본 진출이 가속화되고 한국에서 MLB에 대한 인기가 높아져 MLB 사무국이 짭짤한 한국발 중계료를 챙기는 미래일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 밖에 떠올릴 수가 없네요. 그러니까 WBC에 너무 심취하지 말게...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멀리온 것 같네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한국이 WBC 우승하기 vs 내 팀 선수들이 국대 안 가고 비시즌에 편안히 몸관리해서 코시 우승하기. 저는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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