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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11/09 21:18:11수정됨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잡상 : 21세기 자본, 트럼프, 자산 격차
1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14년 가을에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이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이런저런 함의들이 있겠습니다만, 대략 이 정도 메시지로 요약했습니다.  ① 별도의 통제가 없는 이상 자본소득이 근로소득에 비해 유리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흘러간다.  ② 거기서 파생된 불평등은 과거에 주로 전쟁을 통해 초기화되었다.  ③ 2차 대전이 종료된지 반세기가 넘게 흐르면서 불평등 수준이 계속 심화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일전에 홍기빈의 강의를 들었을 때 기억에 남는 비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 부를 물에 비유하며 낙수효과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부는 불과 같아서 위로 고이는 성질이 있다고.  돈은 힘이고, 그 힘은 정책과 정부를 주무를 기반이 됩니다.  부를 축적한 이들이 앞장 서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환경을 굳이 조성하고자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미국의 슈퍼팩, 한국의 재벌구조 같은 것들은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기득권이 이미 손에 넣은 것들을 지키고, 더욱 불려나가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죠.

피케티의 저서가 발간되기 2년 전에는 "Occupy Wall Street", 그러니까 월가 점령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월가 점령시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시위 전후로 월가의 자본가들이나 금융구조 중 무언가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고, 금융체계의 모순점이 낱낱히 까발려진 이후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는 건 아담 맥케이가 <빅쇼트>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습니다.  그 빅쇼트는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건에서 개미들이 분노를 뿜어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올라왔던 "This is for you, dad"라는 글이 그 정서적 근원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우리 가정을 박살낸 걸 기억해.  우리 아버지의 굳건한 회사는 하루아침에 전부 날아가 버렸어.  아버지께선 자신 명의의 주택도 잃으셨지.  삼촌도 마찬가지야.  난 아버지께서 식탁에서 잔돈 세시는 걸 형이 도와주던 것도 기억나.  그게 아버지가 가진 마지막 남은 돈이었어.  우리 집안에선 이렇게 일이 꼬여갈 때, 난 월가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월가 점령 시위를 내려다보면서 축배를 들던 걸 보고 말았어.  난 그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아버지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셨어.  점점 술독에 빠지게 되었고, 이젠 산송장 신세가 되어 죽는 날만 기다리고 계시지.  이건 내가 가진 전 재산이고, 저 놈들이 날 먼저 조지기 전에 차라리 내가 먼저 다 날려버리겠어.  내 돈을 뺏어간대도 나한테 상처가 되진 않아.  왜냐면 난 전혀 아깝지 않거든.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부 불태워 버릴 거야.  아버지, 이건 당신을 위한 것이에요."

모든 것은 전부 이어져 있습니다.

당시 '로빈후드'는 개미들이 게임스탑 주가를 올리는 걸 막기 위해 자신들의 앱에서 아예 '구매' 버튼을 날려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수준의 주가조작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누구도 주식시장 조작을 이유로 형사처벌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공매도 세력이 막대한 손해를 볼 것이 예상될 때, 주식거래 앱을 셧다운해서 주가를 주무르는 것도 검토해볼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로 인정 받은 셈입니다.


2

생물학에서 '소화'라는 개념은 체내에 들어온 음식을 물리적/화학적으로 잘게 쪼개고, 최종적으로는 영양물질 내의 에너지를 ATP 등의 형태로 저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건 그 음식을 한방에 불로 태워서 에너지를 뽑아내는 과정을, 느리고 단계적으로 행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먹는 식품의 열량을 계산할 때에는 그 식품을 태워서 얼마만큼의 열량이 뿜어져 나왔는지를 측정하게 됩니다.

사회적 분노 내지 역동성 역시 마찬가지 개념을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임계를 넘기 전에는 사회제도의 개선, 개혁, 외교적 수단과 자원을 재배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시점을 지나버리는 순간부터는 전쟁 같은 극단적인 방식으로만 끝에 다다를 수 있게 됩니다.  다만 현대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군사력이 워낙 막강해서, 이제 개인이 물리적으로 정부에 저항한다는 개념은 실행되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총기협회가 아무리 시민의 저항권을 운운한다 하더라도, 고작 소총 가지고 미국 정규군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코로나19가 종식되어가던 시점에, 미국 월마트 등이 수시로 약탈 당하고 경비원과 경찰들도 이를 묵인하는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수감시설이 꽉꽉 들어차고 여분 공간이 부족해서 범죄자를 잡아들여봐야 소용 없으니 방치하는, 고담시티가 현실로 옮겨진 셈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부의 격차를 방치한 대가를, 월가점거 시위가 무위로 돌아간지 15년만에 치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라면 내전, 폭동, 분리주의로 표출되었을 사회적 역동이 아주 소극적이고 개인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꼴이었죠.

한국에서도 비슷한 역동이 쌓여가고 있으며, 이 역시도 매우 국지적인 방식으로 흘러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다른 국가들에서 빈자들이 한곳에 모여 빈민가를 구성하고, 상호간의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에 비해, 한국의 빈민들은 서로 분절되어 개인화 됩니다.  빈자들은 고시원과 여인숙 달방에서 시멘트벽으로 구분되고, 서로 소통하지 않습니다.  포탈사이트의 뉴스 댓글이나, 유튜브 쇼츠 댓글로 무의미한 감정을 토해낼 뿐이죠.  그러니 미국이나 한국이나 결국에는 체제가 서서히 형해화되는 식으로, 정부가 몰락하면서 기업이 그 위치를 대신하는 모습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저는 모든 이에게 한장씩 주어지는 투표권의 존재를 잊고 있었더군요.


3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세상에는 <1984>와 <멋진 신세계>가 동시에 도래하고 있습니다.  과거 제1세계로 분류되었던 국가 중 다수는 개개인이 소화하기 어려운 수준의 과도한 정보에 파묻히거나, 분석된 취향에 따라 알고리즘이 골라 제공하는 컨텐츠 버블 속에 잠겨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2세계 국가들은 과거 철/죽의 장막 시절보다는 완화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통제된 환경 속에서 정부가 선택적으로 여과하여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의사결정하고 있죠.  어느 쪽이든 간에 민주주의 작동의 근간이 되는, 각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은 방해 당하고 있습니다.

앞서 저는 내전 가능성을 쉽게 배제하였습니다만, 트럼프는 이미 이전 대선을 전후해서 보인 행태는 내전을 부추긴다는 것 말고는 다르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의사당이 무력집단에 의해 점거 당하는 등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었구요.  만약 이번에 트럼프가 낙선하였다면 비슷한 모습이 더욱 격화된 형태로 발생하였을 겁니다.

반면에 지금 당장 트럼프가 당선되어 저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여, 앞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트럼프의 공약은 "미국이 만들어낸 막대한 부를 다른 나라들이 무임승차하고 있으므로, 고립주의 노선을 타고 국내 산업을 육성하면 그 모든 부를 우리가 독점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아적 발상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부는 오히려 다른 국가들을 하청업체로 부리면서 긁어모은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겁니다.  거기엔 달러가 기축통화로 유통되는 걸 이용하여 자신들의 인플레이션을 타국에 떠넘겨 버리는 방식, 세계 각국에 군사력을 투사하거나 첩보조직을 활용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국제정세를 틀어버리는 힘 등이 활용되어 왔었죠.

미국인들은 이러한 활동에 사용되는 비용이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만, 기실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는 팍스 아메리카나 하에서 성립가능한 것이고, 그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는 대가에 불과합니다.  트럼프가 재선 기간 동안 실제 공약한 것처럼 관세를 높이고, 글로벌 공급 체인을 차단한다면, 조 바이든 행정부가 공격 받았던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강화될 겁니다.

당장은 미국 주식시장이 다시 상향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버핏지수가 역대 최고수준을 넘어선 이 상황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세계경제가 악화되었을 때, 전세계의 사회적 역동은 취약점을 찾아 보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나올 가능성이 상당해보입니다.  터져나온 고리에 따라서는 제2의 사라예보 사건이 될 수도 있겠지요.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모순을 금수저 사업가가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모양새 역시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습니다.


4

트럼프의 당선만이 디스토피아적 상상에 불을 붙이는 건 아닙니다.  트럼프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기후변화는 이제 현실이 되어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조만간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수산물과 농산물의 종류가 바뀌게 생길 지경이죠.

우리야 이미 극한기후에서 살아오느라 에어컨과 온돌을 전부 갖춰두고, 롱패딩과 나시티가 함께 옷장에 걸려있습니다만, 당장 유럽만 해도 임시방편적 대응마저 불가능한 곳들이 수두룩합니다.  각국이, 각 민족이 자신들의 '레반스라움'을 찾아 옆 나라를 공격할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5

일전에 의사 정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과 논의들을 보면서, 결국 고3들이 의과 입시에 목숨거는 이유가 다른 전문직들과도 구분되는 수준의 소득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과거에는 공대 진학이 의대, 약대 진학보다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고, 당장 저희 이모부만 해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할 점수가 되지 않아 약대로 진로를 튼 케이스였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레지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고생하는 건 이해하지만, 공대 랩실에서 박박 구르면서 박사학위까지 나아가는 것도 그에 버금가는 인고의 시간일 겁니다.  그럼에도 보상은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죠.  그러니 전국 모든 의대들을 성적 순으로 싹 훑고난 뒤에야 서울대 이공계 여타 과들의 순서가 돌아오는 걸 테구요.

다르게 생각해보면 의사를 제외한 다른 직업들에 종사해봐야, 근로소득만으로 소위 '신분상승'을 노릴 기회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습니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세전 연 1억 버는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6.4% 수준입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페이닥터 등도 함께 포함되겠죠.  35~39세 구간 근로자의 중위소득이 5천만원을 간신히 넘으니, 일단 연봉이 1억을 넘어서면 그 값의 2배에 달하는 셈인데, 별도의 자산 대물림 없이 확보할 수 있는 부동산이 어느 수준일까요.

어쩌다 보니 그룹사 금수저로 태어나 지금까지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100억대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압니다.  3루도 아니고 타석에 서는 순간 이미 1점 챙기고 시작하는 수준이라고 해야겠죠.  평생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타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하니, 그간 없던 프롤레타리아 총폭탄 정신이 명치에서 올라오는 게 느껴지더군요.  최근 경제지들에서 상속세가 OECD의 6배니 뭐니 하며 난리를 치고, 대통령실과 여당은 상법 개정안이 모순덩어리라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워섬기는 꼴들을 보았습니다.  다시금 돈은 물이 아니라 불에 가깝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일전에 김대호를 비롯한 일군의 무리가, 대기업 생산직들을 겨냥하며 '고소득자'들을 공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장하성도 원청 근로자들이 하청과 수익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위에 군림하는 족벌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때에도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산재로 사망한 현대차 직원의 유가족 중 1명을 특별채용하도록 하는 단체협약 내용이 사회통념에 위배되어 위법하다고 판결 내리기도 했지요.  그러한 논리들은 재벌가의 경영세습을 논할 때는 싸그리 사라지고, 경영의 연속성을 위해서 불가피하므로 다양한 방식으로 후대의 경영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주로 소환되는 게 777 손톱깎이를 만드는 쓰리쎄븐 이야기일 것입니다.  경영의 연속성은 중요하지만, 직원 로열티의 연속성은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들은 참 우습습니다.  한쪽에서는 선의만을 찾아헤매는 이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악의를 단정 짓습니다.

학창시절에 부의 분배에 관해 배울 때 주로 인용되던 지표는 지니계수였습니다.  소득을 기준으로 삼은 지표였죠.  우린 지금 소득차가 곧 분배의 정의와 동치되던 시절을 지나고, '근로소득만으로는 벼락거지 신세다'라는 코로나19 페이즈를 지나,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자산 격차의 시대로 들어서는 길목을 스쳐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 속에서 비롯하는 역동을 적시에, 제대로 된 방식으로, 그리고 선제적으로 해소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거대하게 폭발하는 건 아닐까 하고, 저는 걱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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