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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1/12 02:34:18 |
Name | 선비 |
Subject | 근대문학의 종언 |
“넌 운명을 믿니?”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민석이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민석이와는 고등학교 동창 사이다. 올해 입학한 대학이 둘 다 신촌에 붙어 있기 때문에 학기 중에는 가끔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아이였는데, 대학을 물리학과로 가더니 더욱 심해졌다. 하지만 가을학기 개강 첫주에 두 달 만에 만나서 뜬금없이 하는 이야기가 운명을 믿느냐니? “아니, 이번엔 재밌는 이야기야.” 커피잔을 쥔 민석이의 얼굴에 개구진 미소가 비친다. “아, 그러시겠죠. 교수님.” “에헴, 하영 양. 빛이 굴절한다는 건 알고 있지?” “누굴 바보로 아니?” 빛의 회절과 굴절. 고등학교 때 다 배운 이야기라고. “그럼 빛이 어떤 원리에 따라 굴절하는지도 알아?” “글쎄, 모르겠는데.” “빛은 항상 목적지까지 최단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따라 굴절해. 페르마의 원리라고 부르지.” “그래, 그래. 근데 그게 운명이랑 무슨 상관인데?” “들어봐. 그런데 빛이 최단 시간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해, 그렇지?” 그런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다시 말해, 빛은 자기가 미래에 도착할 목적지를 출발할 때부터 알고 있다는 거야. 신기하지?” 개강 첫주부터 지루한 문학 수업만 들어서 그런가, 조금 흥미가 생겼다.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말이 있어.” 민석이가 이어서 말했다. “라플라스의 악마?”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가 상상한 가상의 존재야. 세상 모든 물질은 물리법칙을 따르잖아? 그렇다면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거야. 일리가 있지?” “라플라스의 악마인지, 도깨비인지 그런 존재가 있다고 쳐, 그래도 인간은 ‘자유의지’라는 게 있잖아. 그러면 미래를 바꿀 수 있잖아. 나는 자유 의지로 이 카페에 와서 저 많고 많은 메뉴 중에서 이 얼그레이 차를 시킨 거 아냐?”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내 머그잔에 가만히 손을 대봤다. 아까 시킨 홍차가 벌써 미지근하다. “그래, 너에겐 분명 ‘의지’가 있지. 그렇지만 그 의지와 생각이라는 것도 뇌의 전기신호가 만들어내는 거야. 그리고 그건 물리법칙을 벗어날 수 없지.” “뭐야, 그럼 미래라는 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거야?” 민석이가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 “아니, 꼭 그런 이야기는 아니야.” 민석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라플라스의 악마도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지. 바로 양자 세계야.” 나는 꼬여져 있던 다리를 풀고 말했다. “너 저번에 하던 그 양자역학인가 하는 복잡한 이야기 하려는 거지?” “아니야, 이번엔 재밌는 이야기라니까. 이중 슬릿 실험이라는 실험이 있어. 토머스 영이란 사람이 처음 한 실험인데, 하여튼. 클린턴 데이비슨이란 과학자가 있었어. 그는 한 실험에서 한 쌍의 슬릿이 있는 판에 전자를 하나씩 쏘아 보냈어. 뒤에는 전자를 감지하는 스크린을 두고. 그런데 관찰 결과 스크린에 비친 전자에 파동의 간섭 모양이 나타난 거야.” 잠깐만, 슬릿이 뭐야? “이 결과를 입자설로 설명하자면, 하나밖에 없는 빛 입자가 자기 스스로 간섭한다는 거야. 그런데 누군가에게 관측당하면 스스로 간섭하던 걸 멈추고 입자와 같은 행동을 한다는 거지. 재미있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 재밌네.” “하이젠베르크란 과학자는 이런 실험들을 가지고 불확정성 원리라는 걸 만들어내는데, 양자 세계에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아낼 수 없고, 오직 확률로만 알아낼 수 있다는 거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관측하는 순간에야 확률로만 존재하던 입자의 위치가 결정된다는 거야.” “그래서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계속 들어봐, 이건 물론 미시세계 이야기야.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지. 몇몇 예외적인 경우만 빼면.” “예외적인 경우?” 민석이가 눈앞에 놓인 커피잔을 홀짝이며 뜸을 들인다. 스틱 설탕을 세 봉이나 넣었는데 달지도 않나. “100여년 전 이야기야. 어느 날 데이비슨은 이중 슬릿 실험을 재연하던 중, 점심 메뉴를 뭘로 정해야 할까를 고민했어. 위대한 과학자에게도 점심 메뉴는 항상 고민이었던 거지.” 민석이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잠깐 라플라스의 악마를 속여 정해진 운명을 바꾸어 보기로 했어. 운명을 상대로 주사위를 던진 거지, 아니 동전을 던졌다고 해야 하나?” “주사위도 어차피 물리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거 아냐?” “실제의 주사위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데이비슨에겐 오직 확률로만 존재하는 전자가 있었으니까. 아무튼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해 데이비슨은 이중 슬릿 뒤에 있는 스크린을 반으로 나눴어. 왼쪽에는 점심 메뉴 A, 오른쪽엔 점심 메뉴 B. 그리고는 전자를 발사했지. 이건 완전히 100% 확률로 결정되는 거야. 악마조차 알 수 없는. 어찌 보면 이 실험은 그때까지 고전적 물리법칙을 따라오던 데이비슨의 운명을 바꾼 중대한 실험이었어.” 민석이가 눈도 안 깜빡거리고 말했다. 눈 안 아프나. “참고로 이 실험 결과는 아직 나도 몰라. 그래서 내기를 걸까 하는데.” 나는 천천히 마시던 홍차를 꼴깍 넘겼다. “무슨 내기?” “오른쪽이면 내가 다음에 저녁을 살게, 왼쪽이면 이따가 나랑 영화 보러 가자.” 어라? 얘가 지금 나한테 관심 보이는 건가. 그래도 100년 전 과학자가 바꿔놓은 운명이 나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거라면 제법 낭만적이다. 까짓것, “그래, 해보자 내기!” 민석이가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찾아보았다. 다시 홍차 한 모금의 시간이 흘렀다. 민석이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는, 씨익 예의 그 미소를 다시 보였다. “안됐군. 왼쪽이야.”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절대 해독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암호를 푼 한 과학자의 이야기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고독한 천재 과학자의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멋진 연기를 보여줘서 좋았다. 실존인물을 토대로 했다는 주인공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치 있고 멋있게 보였다. 저런 삶을 실제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천재 과학자의 삶이란 영화처럼 진짜 저렇게 반짝이는 걸까. 다음 주. 국문과 전공과목인 근대문학의 이해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바로 시작하는 수업이라 그런지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염상섭, 이인직, 박태원, 채만식…. 이름으로만 알던 관심 없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하는 노교수의 음성이 매가리가 없다.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나는 분명 글 쓰는 걸 좋아해 국문과에 왔는데 왜 이런 따분한 수업만 들어야 하는 걸까. 지루해 자꾸만 다른 생각을 했다. “그냥 드랍해버릴까...” “야, 이거 1학년 필수과목이야.” 내가 하는 혼잣말을 들었는지, 옆에 앉아 있던 주희가 속삭였다. “알아, 나도 아는데...” 알아, 아는데...... 수업이 끝나고 호수공원 옆에 있는 중앙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은 내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지만 오늘만은 왠지 우중충한 기분이다. 창문 밖을 보니 비가 올 것 같다. 차라리 비라도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컴퓨터 앞에 앉아 수강 신청 시스템에 들어간다. 수강정정 마감 30분 전이다. 모니터에 뜬 ‘근대 문학의 이해’ 과목명 옆에 있는 ‘포기’ 버튼에 마우스 커서를 올려보았다. 마음도 정하지 못하고. 갑자기 지난주에 본 영화에 나온 주인공 생각이 났다. 주인공의 삶에 비하면 어쩐지 도서관에서 수강 포기를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이틀 전에 있던 시 합평 모임 생각도 났다. 선배가 말했다. "이 글이 왜 시가 아닌지 이야기해보자." 나는 애초에 문학에는 재능이 없는 건가. 어쩌면 경영학과에 들어가라는 아빠 말을 들었어야 했는 지도 몰랐다. "넌 운명을 믿니?" 데이비슨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데이비슨이란 과학자가 던진 주사위가 내 운명에 간섭을 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100년 전 데이비슨이 바꿔버린 운명이 100년 후 나의 수강포기 여부와 정말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얄궂은 운명에 왠지 웃음이 났다. 어쩌면 2학년부터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수강정정 마감을 일 분 앞두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수강 포기 버튼을 눌렀다. '수강 포기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렇게 쉬웠던 걸. 막상 수강 포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후련해졌다. 후련해서 그런가, 갑자기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100년 전 그날, 데이비슨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을까? 나는 민석이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로 했다. 뚜, 뚜, 뚜 수화음이 세 번 울리고 민석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민석아 난데.” “응, 근데?” “저번에 말한 데이비슨 이야기 있잖아...” “응? 데이비슨...? 아, 그래, 응, 그거.” “그래서, 그날 데이비슨은 점심으로 뭘 먹은 거야?” “아… 그거, 그 이야기 말이지….” 이 녀석, 말꼬리를 흐리는 게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든다. “그거 거짓말인데?” 내 근대문학은 그렇게 끝났다. ---- 가라타니 고진의 책과는 상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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