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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13 07:54:32
Name   뤼야
Subject   오디오북과 셀프티칭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미학자인 자크 랑시에르의 책 [무지한 스승]은 그의 다른 저서에 비해 비교적 쉽지만 매우 전복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지적 평등에 관한 이야기는, 교육학이 오랫동안 토대를 삼고 있던 '설명없이 배움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가정을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육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이러한 가정하에 교수법이 연구되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가정에 의해 스승의 지능은 우월한 것, 제자의 지능은 열등한 것이 되어버리면, 아무리 좋은 교수법이 나온다고 한들 제자는 절대 스승과 지적으로 평등해 질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랑시에르는 우선 조제프 자코토(1770 -1840)라는 인물의 지적 모험을 추적합니다. 그는 우연히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네덜란드 학생에게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하는 강제된 상황에 처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합니다. 학생에게 네덜란드-프랑스어 대역본으로 된 [텔레마스코스의 모험]을 던져주고, 책을 무조건 읽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문법 등을 전혀 익힌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프랑스어 문법을 깨치고 거의 작가 수준으로 프랑스어 작문까지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답니다. 사전 하나없이 참고서 하나 없이 일어난 일이죠. 아니 오히려 사전과 참고서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무지한 스승'의 self-teaching을 방해할 뿐이죠.

사실 랑시에르가 자코토의 이야기 속에 숨겨둔 함의는 하나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이러한 방법론도 통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텔레마스코스의 모험]을 쥐어든 학생들은 타인의 계몽없이 스스로 지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음의 일화를 통해,  지적해방이란 [스스로 의지를 강제할 수 있게 하는 자의적 고리안에 있을 때]야만  비로소 가능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죠. 랑시에르는 이러한 지적평등이야말로 사회적 혁명의 시초이며, 지적으로 해방된 개인이 만나야만, '전문가의 미덕'을 이야기하는 오래된 플라톤식의 사회적 명령이 파기되며, 이로 인해 더 큰 사회적 혁명의 고리도 촉발될 수 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적으로 평등해진 자들만이 평등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겠죠.

사실 자코토의 모험은 별로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무지한 스승은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들이죠. 그리고 제게도 이런 반(half)자코토적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한때 영어를 익히기 위해 썼던 방법이 바로 '무지한 스승'식 또는 '자코토의 모험'식의 셀프티칭이었거든요. 영어를 익히기 위해 시중에 유통되는 참고서(?)를 보는 것이 영 싫었던 제가 선택한 방법이 내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책의 오디오북을 무한반복해서 청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외울 지경이 될 때까지요. 재미를 붙이게 되니 한두권씩 오디오북을 사모으고 틈날 때마다 듣는 것이 습관이 되어 오디오북을 듣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 방법으로 한창 영어가 늘었을 때는 영어일기를 한 페이지씩 매일 써내려가기도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을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다만 더 고급스런 표현을 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죠. 영어문법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어색한 표현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죠. 다만 이러한 능력이라는게 계속 유지를 시키거나 발전시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먹고 사는 일에 치이다 보니 영어가 뒷전이 된 지금 아주 간단한 회화를 제외하면 거의 잊었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영미권은 오디오북이 매우 발달되어 있죠. 다른 언어권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적인 오디오북 사이트인 오더블(www.audible.com)이 있는데 가끔 들어가 어떤 책들이 나와있나를 살펴볼라치면 다양함과 방대함에 놀라게 됩니다. 책이 출판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오디오북이 출시됩니다. 오디오북을 듣는 것을 저는 '반강제적 책읽기' 정도로 여기는데, 눈으로 읽기 싫어 덮어두거나 좀 어렵다 싶어 미뤄둔 책도 듣다보면 그 뜻이 전달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책에 쓰인 표현이 내 것이 되는 경우도 눈으로 읽기만 했을 때보다 매우 빈번하고요. 물론 이것은 반복청취를 통해 가능합니다.  

미국은 국토가 매우 넓고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서 오디오북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지요. 고전, 신간, 과학, 철학, 미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서적이라 불릴만한 책들이 이미 오디오북으로 나와있습니다. 제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법률용어나 의학용어가 가득한 책을 읽는게 한국어를 더 잘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듯이, 이미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의 책을 선정하는 것이 셀프티칭에 매우 중요합니다. 저같은 경우는 역시나 소설을 가장 많이 선택하게 됩니다. 제가 사회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가 쓴 [인간본성에 대하여](원제:On Human Nature)도 오디오북으로 나와있더라고요. 별로 두껍지 않은 책이라 이 책의 오디오북을 구입해서 한 번 들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디오북으로 셀프티칭을 하고자한다면 아주 흥미롭게 읽어서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책을 선택하는 편이, 그리고 문장이 길고 복잡한 구조인 것보다는 짧은 편인 것이 좋습니다. 2000년 초반의 일로 기억하는데, 미국의 작가인 마리샤 페슬이 쓴 책 [Special Topics in Calamity Physics]라는 소설이 '아마존에서 선정한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면서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아주 굉장한 소설은 아니지만 읽어볼만 합니다. 일단 재미있어요. 우리 나라에는 [블루의 불행학 특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요. 여기에 맑시즘 혁명을 꿈꾸는 대학교수 아버지를 따라 미전역을 누비며 아버지에게 얽힌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지적 아성은 감히 넘보기 어려운 수준인데, 이러한 아버지가 딸에게 시키는 교육도 아주 특별합니다. 부녀가 차로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차안에서 보내는 많은 시간 동안 고전의 이야기로 채웁니다. 철학, 예술, 문학의 분야를 망라하죠. 아버지가 고전의 한 대목을 읊을라치면 딸은 그 다음 대목을 찾아 읊고 그 의미에 대해 서로 이야기합니다. 또는 오디오북을 통해 여러 고전을 듣고 또 듣는 장면도 있고요. 빈번한 전학으로 수업을 빼먹는 일이 많은 딸은 아버지를 통해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방법을 익혀나가지요.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에겐 허구적이다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셀프티칭의 방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소설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오디오북 시장도 좀 나아지려나요? 예전에 재미삼아 [한국대표단편집]이라는 오디오북CD세트를 한 번 사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한국의 대표단편만 실려있으면 참 좋았을텐데 도대체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왜 들어있는 겁... 거기다 성우들이 지나치게 연기를 해대는 통에 정말 괴로웠습니다. 속도도 매우 느리고 쓸데없는 효과음같은 것도 매우 거슬렸습니다. 그냥 건조하게 빠른 속도로 읽어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건 제가 파파할매가 되어서 더 이상 머리쓰는 일이 불가능 해지면 듣도록 고이 모셔두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이게 재미있어 질지도 모르겠어요.

원본의 텍스트를 그냥 통째로 즐길 수 있는 오디오북이 시장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셀프티칭에 오디오북만큼 좋은 수단은 없거든요. 뭐 시장이 형성이 안되는데 누가 돈을 들여 만들일은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 오더블에 들어가 짧은 영어로도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을 하나 구입할 까 생각중입니다. 뭐가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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