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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1/09 07:59:20 |
Name | 뤼야 |
Subject | D.H 로렌스로 읽어보는 실존의 여성과 나 |
D.H.로렌스 [아들과 연인](Sons and Lovers, 1913)은 작가 자신의 자서전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줄거리를 보자면, 주인공의 출생 이전 부모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청년이 되어 어머니와 사별할 때까지의 사건들이 펼쳐지죠. 흔히 남성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묘사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이 태어난 해를 감안해 보자면 소설의 주제가 진부한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고, 로렌스의 필력이 만만치 않은 터라 꽤나 읽을만한 작품입니다. 제목도 근사하죠. 주인공의 아버지는 광부인데, 중류계급 출신의 어머니와는 여러가지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이 둘의 갈등은 아버지가 폐렴으로 죽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됩니다. 이 부부의 갈등은 꼭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를 두고 서사의 완결성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매너리즘으로 볼 것이냐는 참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비교적 고전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완결성쪽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이 맞겠습니다. 한편, 어머니는 아버지를 체념하고 자식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는 와중에 형이 급사(急死)하고 말죠. 당연히 어머니의 사랑은 주인공인 폴에게 쏠리게 되구요. 게다가 그가 폐렴으로 병상을 오가는 도중, 어머니의 집착은 갈수록 심해집니다. 줄거리만 들어도 갑갑하지 않습니까? 그후 폴에게 연인이 생기지만 어머니와의 관계는 폴과 그의 연인의 관계에 방해만 됩니다. 그 후, 어머니의 죽음은 폴에게 정신적인 해방과 동요를 동시에 선사하고, 폴은 어느덧 홀로서기를 하는 방법을 깨닫는다는 내용입니다. 시대착오적임을 감안하더라도, 로렌스의 여성관은 참으로 건질 것이 없습니다. 광부인 아버지와 그 아들의 캐릭터는 매우 진부한 어떤 패턴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각각 독립적인 인격체로 볼 수 있죠. 그러나 어머니는 어떠합니까? 그녀는 진부한 패턴으로 만들어진 남성위에 얹혀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여성의 삶은 그야말로 남성이라는 빛의 그림자이며, 방향지시등이 켜지기만을 기다리며 교차로에 대기하는 차량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로렌스가 이러한 작품을 쓴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렌스는 그의 책 [로렌스의 성과 사랑]에서 "여성들은 본보기를 갈구하고 있으며, 그 본보기에 따라 살아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또한 "디킨스가 천진한 아내를 (그의 작품으로부터) 안출해내자 그 후부터 천진한 아내들이 (실제로) 쏟아져 나왔다."라고 자신의 작품론을 설파하죠. 면피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폴이 사랑하는 여성은 여권운동을 한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이고 철저히 유형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로렌스 특유의 심리묘사는 꽤나 높은 수준이라 볼만하다는 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인 것이죠. 문제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다음에 등장합니다. 과연 여성으로서의 나는 어떤 식으로 패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제 자신에게 떨어진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나라는 인간의 실존은 과연,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베네딕트의 문화패턴, 푸코의 에피스메테 등등의 많은 학자들이 유형으로 구조화하고 패턴화한 것들에서 자유로와져서 실존이라는 징검다리를 향해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간극을 메우는 데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하며, 또한 그러한 고민을 뒤로하고 몸으로 삶을 어떻게 끌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이죠. 만약 로렌스가 소설에서 잘 형상화하고 있듯이 여성의 실존이 남성종속적이며 동시에 유형화된 것에만 머문다면, 여성의 존재가치는 기껏해야 남성이 만든 세계의 객관적 구조 아래서 볼품없이 재배치되고 유형화된 부속품에 지나지 않죠. 한편으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개개인의 삶이 사회학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여성이 삶이란 더욱 살만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벗어난다고 한다면 실로 세계라는 상대와의 커다란 싸움을 각오를 해야겠죠. 그런 싸움을 견뎌낼 용자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실존이 패턴에 잠길뿐이라면, 만약 오직 그러하다면... 그것은 제게는 아마 바다에 헤엄치되 머리도 내밀지 못하게 하는 꼴과 비슷할 것입니다. 곧 익사하고야 말았겠죠. 로렌스가 선사한 문학적 심미감은 오랫동안 문학덕후로 살아온 제게 소중한 것입니다. 미(美)를 논하는데 실제세계의 윤리관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자못 어리석은 짓이죠. 그러나 로렌스가 이야기하는 여성인 어머니만이 아니라 폴의 연인도 결코 실존적 존재라고 부를만 하지 못합니다. 폴의 연인이 보여준 여성운동이라는 소품은 홀로서기의 바다에 뛰어든 폴을 위한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들과 연인]이 로렌스 자신의 자전적 소설임을 감안해 보더라도, 그가 염려하는 것은 오직 홀로서기의 바다에 뛰어든 폴일 뿐입니다. 많은 고전이 그러하듯이 [아들과 연인]은 시대의 산물이며 문학적 승화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간이며 동시에 여성으로 서는데 많은 거울이 되어 주었죠. 칼 포퍼는 "우리가 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 노력의 일부가 실수였다는 사실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의 말은 반편의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해봅니다. 제가 저지른 실수는 나와 주변의 많은 이를 불편하게 만들수도 있지만 또한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새롭게 각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비록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 못나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 자신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옳겠죠. 저는 정해진 패턴대로, 정해진 유형대로만 생각하고 사는 것에 큰 반감을 느낍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 그 실존의 결락(缺落)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아주 자주 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식당종업원, 문학덕후, 맛이 가면 유사과학 신봉론자 뤼야입니다. 여러 캐릭터를 오가는 것이 과연 힘들군요. 크크크크크 어제 게시판을 어지럽혀 많은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드려 죄송합니다. (_._) 특히나 토비님께 좋은 유저가 되기로 약속했는데!!!!! 낭중지추라고 더러운 성절이 어디가겠습니까. 반성하는 의미에서 반성문 같지 않은 반성문 한 장 제출하고 갑니다. 제가 맛이 가지 않아야 여러분이 좋은 하루를 보내실 거 같으니 술은 적당히 마셔야겠습니다. 메롱도 자제하고요. 좋은 하루 되세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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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라함은 뛰어난 사람이 재능을 가리지 못한다는 뜻인데... 뭔가 잘못 쓴 것 같으면서도 맞게 쓴 것 같고 그렇군요. 과학이고 뭐고 뭔 상관입니까? 홍차넷 와서는 키보드배틀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좋아하는 이슈인데 별로 얘기하기 싫어지는 걸 보니까 객관성과 열정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아서 좋네요. 키보드배틀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런데 모르는 내용이지만 올려주신 걸로 비춰 봤을 때 (물론 독해의 방향을 설정하는 건 안 좋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실존을 반추하기에 그닥 좋은 내용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여성이 윤리적 주체로 ... 더 보기
그런데 모르는 내용이지만 올려주신 걸로 비춰 봤을 때 (물론 독해의 방향을 설정하는 건 안 좋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실존을 반추하기에 그닥 좋은 내용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여성이 윤리적 주체로 ... 더 보기
낭중지추라함은 뛰어난 사람이 재능을 가리지 못한다는 뜻인데... 뭔가 잘못 쓴 것 같으면서도 맞게 쓴 것 같고 그렇군요. 과학이고 뭐고 뭔 상관입니까? 홍차넷 와서는 키보드배틀한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좋아하는 이슈인데 별로 얘기하기 싫어지는 걸 보니까 객관성과 열정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아서 좋네요. 키보드배틀은 하지 않으려고요.
그런데 모르는 내용이지만 올려주신 걸로 비춰 봤을 때 (물론 독해의 방향을 설정하는 건 안 좋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실존을 반추하기에 그닥 좋은 내용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여성이 윤리적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맥락에서 여성이 남성이라는 구조 앞에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거꾸로 어머니와 연인이 주인공이 윤리적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구조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조가 아니겠지만요. 어머니와 연인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에서 여성에게도 어떤 인격을 부여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들에게 주체적으로 갈등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죠.
이어서 쓰신 남성이라는 구조 앞에서 실존이 무너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실존과 구조의 보편적 대립으로 보입니다. 여성적 맥락에서 이해될 것은 굳이 아닐 수도 있죠. 어차피 구조 앞에서 실존은 남성/여성할 것 없이 무너집니다. 여기서 한 번 더 던져지는 질문은 실존의 패배 속에서 여성은 어떤 모습으로 패배하느냐라는 질문일 겁니다. 구조 앞에 무너진 실존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복권, 이것이 레비나스 윤리학이 다루는 핵심 주제죠. 레비나스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복권을 주체를 타자라는 거울 앞에 놓으면서 시도합니다. 여기서 이 거울 앞에 놓인 자아, 이 모습을 여성으로 형상화함으로서 피동적인 이미지를 여성에 빗대어서 써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는 여기서 여성은 여성적인 것, 그러니까 \"여성적\"이라는 형용사를 하이데거적인 맥락에서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꿈쩍도 안 하죠.
이 소설의 쓰여진 현실의 모습을 비춰봤을 때 아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일 것이고 연인은 남자의 연인, 여성일 겁니다. 그런 이해로 봤을 때, 비록 현대적인 이해에서 여성의 모습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남성 구조와 여성 실존의 대립으로 이해할 여지는 좀 적어보이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패턴이라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갈등을 일으키는 인격, 어머니의 인격, 연인의 인격일겁니다. 어머니와 연인은 패턴적이지만 아버지와 아들보다 더하진 않겠죠. 아마 뭔가 독해하면서의 감정과 그런 것이 좀 더 스스로에게 적극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뭐 그런 생각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내용이지만 올려주신 걸로 비춰 봤을 때 (물론 독해의 방향을 설정하는 건 안 좋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실존을 반추하기에 그닥 좋은 내용은 아니지 않나 싶네요. 여성이 윤리적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맥락에서 여성이 남성이라는 구조 앞에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거꾸로 어머니와 연인이 주인공이 윤리적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구조로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조가 아니겠지만요. 어머니와 연인과 상호작용하는 모습에서 여성에게도 어떤 인격을 부여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들에게 주체적으로 갈등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죠.
이어서 쓰신 남성이라는 구조 앞에서 실존이 무너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실존과 구조의 보편적 대립으로 보입니다. 여성적 맥락에서 이해될 것은 굳이 아닐 수도 있죠. 어차피 구조 앞에서 실존은 남성/여성할 것 없이 무너집니다. 여기서 한 번 더 던져지는 질문은 실존의 패배 속에서 여성은 어떤 모습으로 패배하느냐라는 질문일 겁니다. 구조 앞에 무너진 실존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복권, 이것이 레비나스 윤리학이 다루는 핵심 주제죠. 레비나스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복권을 주체를 타자라는 거울 앞에 놓으면서 시도합니다. 여기서 이 거울 앞에 놓인 자아, 이 모습을 여성으로 형상화함으로서 피동적인 이미지를 여성에 빗대어서 써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그렇지만 레비나스는 여기서 여성은 여성적인 것, 그러니까 \"여성적\"이라는 형용사를 하이데거적인 맥락에서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꿈쩍도 안 하죠.
이 소설의 쓰여진 현실의 모습을 비춰봤을 때 아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일 것이고 연인은 남자의 연인, 여성일 겁니다. 그런 이해로 봤을 때, 비록 현대적인 이해에서 여성의 모습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남성 구조와 여성 실존의 대립으로 이해할 여지는 좀 적어보이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패턴이라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갈등을 일으키는 인격, 어머니의 인격, 연인의 인격일겁니다. 어머니와 연인은 패턴적이지만 아버지와 아들보다 더하진 않겠죠. 아마 뭔가 독해하면서의 감정과 그런 것이 좀 더 스스로에게 적극적인 메시지를 찾아내려고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뭐 그런 생각입니다.
낭중지추가 처음엔 더럽은(?) 뜻으로 시작한게 아마 맞을 겁니다. 말이라는게 흔히 그러하듯 나중에 이곳저곳 쓰이면서 좋은 맥락으로 변질을 겪었지요. 저는 원래의 나쁜 뜻으로 썼습니다. 오해마시길...
여성의 실존을 읽는데 [아들과 연인]이 별로 좋은 텍스트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작품을 먼저 읽고 구조를 생각했고, 후에 실존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갔는데, 제 글이 미욱한 탓에 제대로 전달이 못된 듯 싶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윤리가 여성을 읽는데 효과적인가 하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 더 보기
여성의 실존을 읽는데 [아들과 연인]이 별로 좋은 텍스트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작품을 먼저 읽고 구조를 생각했고, 후에 실존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갔는데, 제 글이 미욱한 탓에 제대로 전달이 못된 듯 싶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윤리가 여성을 읽는데 효과적인가 하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 더 보기
낭중지추가 처음엔 더럽은(?) 뜻으로 시작한게 아마 맞을 겁니다. 말이라는게 흔히 그러하듯 나중에 이곳저곳 쓰이면서 좋은 맥락으로 변질을 겪었지요. 저는 원래의 나쁜 뜻으로 썼습니다. 오해마시길...
여성의 실존을 읽는데 [아들과 연인]이 별로 좋은 텍스트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작품을 먼저 읽고 구조를 생각했고, 후에 실존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갔는데, 제 글이 미욱한 탓에 제대로 전달이 못된 듯 싶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윤리가 여성을 읽는데 효과적인가 하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다음번에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소설 속의 두 여인의 행동은 주인공의 폴에 비한다면 일말의 회의도 없이 자신을 가족 또는 이데올로기에 투신하는 모습입니다. 이 또한 오래된 소설임을 고려할 때 일말의 리얼리즘 이외에 여성의 구조적 소외나 실존을 논하기에 부족하구요.더 좋은 소설이 얼마든지 있는데 제가 이 소설을 아주 오랫만에 들쳐보고 글을 쓰느라 글이 미진합니다.
제 반성문이 마음에 안드셨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하지요. 아니면 나중에 삼공파일님이 저와 키배를 하자고 하실 듯 합니다.
여성의 실존을 읽는데 [아들과 연인]이 별로 좋은 텍스트가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작품을 먼저 읽고 구조를 생각했고, 후에 실존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갔는데, 제 글이 미욱한 탓에 제대로 전달이 못된 듯 싶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윤리가 여성을 읽는데 효과적인가 하면 저는 고개를 갸웃하게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글이 길어질 것 같아 다음번에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소설 속의 두 여인의 행동은 주인공의 폴에 비한다면 일말의 회의도 없이 자신을 가족 또는 이데올로기에 투신하는 모습입니다. 이 또한 오래된 소설임을 고려할 때 일말의 리얼리즘 이외에 여성의 구조적 소외나 실존을 논하기에 부족하구요.더 좋은 소설이 얼마든지 있는데 제가 이 소설을 아주 오랫만에 들쳐보고 글을 쓰느라 글이 미진합니다.
제 반성문이 마음에 안드셨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하지요. 아니면 나중에 삼공파일님이 저와 키배를 하자고 하실 듯 합니다.
앗! 크크크크크 어젯밤에는 눈부심님 덧글때문에 침대에서 배가 찢어지게 웃었는데 파란하게하님이 2부에 등판하셨군요. 내가 이래서 홍차넷을 못떠난다니까요. 저는 사춘기가 디따 늦게 왔어요. 친구들이 중학교 들어와서 하는거... 전 고2가 되어서야 겨우 했지요. 친구들이 맨날 저 앉혀놓고 넌 대체 뭐가 잘못된 인간이냐고 설교질... 크크크크크 아주 더디게 늦게 자라는 사람이라 중고딩때는 진짜 어리버리했다능. 그래서 질풍노도 이런 것도 모르고 대학가선 공부하느라 바쁘고 그랬어요. 제 생각엔 제 질풍노도의 시기는 바로 지금인듯... 이건 게시판서 충분히 증명한 셈이죠. ;-) 흐흐흐 뭐에요. 아침부터 이런 이상한 고백하게 만들고 아아아아아~~~ 아놔!~
그래서 A.I.를 좋아합니다. 흔히 이런 류의 인공지능 SF에서는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로봇\'과 \'로봇에게서 인간스러움을 바라는 인간\'이 몇 가지 난간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일치하고 화합하는 식의 클리셰를 걷기 마련입니다. 사실상 로봇은 \'또 다른 인간\'일 뿐이죠. 미성숙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성장 드라마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A.I.에서는 이를 비틉니다. 로봇은 그저 로봇일 뿐입니다. 주인공인 데이비드는 놀랍도록 인간을 닮았으며 스스로도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인간을 사랑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그저... 더 보기
그래서 A.I.를 좋아합니다. 흔히 이런 류의 인공지능 SF에서는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로봇\'과 \'로봇에게서 인간스러움을 바라는 인간\'이 몇 가지 난간을 거쳐서 자연스럽게 일치하고 화합하는 식의 클리셰를 걷기 마련입니다. 사실상 로봇은 \'또 다른 인간\'일 뿐이죠. 미성숙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 성장 드라마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A.I.에서는 이를 비틉니다. 로봇은 그저 로봇일 뿐입니다. 주인공인 데이비드는 놀랍도록 인간을 닮았으며 스스로도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인간을 사랑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그저 프로그래밍된 모조 감정이고 모조인격일 뿐이죠. 표면적으로만 인간적일 뿐 실제로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비롯한 인간들은 그러한 데이비드의 인위성과 비인성, \'주입된 인간스러움\'에 괴리감과 두려움을 느끼고요. <휴먼>이 되어 고유성을 확보하고 싶었던 데이비드는 사실은 자신이 흔하디 흔한 [통계 속의 표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이디푸스가 되죠. 그리고 그럼으로써 데이비드는 역설적이게도 인공지능 SF 캐릭터의 클리셰를 깨는 고유한 존재가 되었으며 작중의 몰개성한 인간들보다 특별해지죠. 그리고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NPC인 이상, 이것은 귀감이 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기 보다는 우리에겐 아직 개발되지 못한 또는 도달하지 못한 인간성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이미 프로그래밍된것이라는 것이구요. 그러한 갈망은 흔히 어떠한 구조 속에서 안주하게 되면 잘 드러나지 않거니와 세계의 존재감을 높이는 데에만 인간성을 바치는 것에만 그쳐서도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단 뜻이죠. 즉, AI가 로봇이기 때문에 프로그래밍된 모조의 감정 인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그가 가진 인간성에 대한 갈망은 이미 인간으로 운명지워진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인간다운 것이라는 뜻이죠. 제가 덧글을 달 때 약간 장난을 쳐서 괜히 오해하시게 했나봐요.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음...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 똑같은 장삼이사고 개성 없는 사람은 아닌지, 나만의 특유함은 없는지, 나는 패턴과 세파로부터 완전한 사람은 아닌지 심혈을 기울이며 고민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서, 오롯한 [휴먼]이 되고 휴머니티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곤 합니다. 남이 자신과 똑같은 개성을 보이면 싫어하게 되고...왜 자기하고 똑같은 옷 입고 있는 사람 보면 기분 나빠지잖아요. 그냥 아무 거나 걸치고 나온 거... 더 보기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음...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과 똑같은 장삼이사고 개성 없는 사람은 아닌지, 나만의 특유함은 없는지, 나는 패턴과 세파로부터 완전한 사람은 아닌지 심혈을 기울이며 고민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서, 오롯한 [휴먼]이 되고 휴머니티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곤 합니다. 남이 자신과 똑같은 개성을 보이면 싫어하게 되고...왜 자기하고 똑같은 옷 입고 있는 사람 보면 기분 나빠지잖아요. 그냥 아무 거나 걸치고 나온 거면 모르겠는데, 나름 공들여 목도리나 구두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 하나하나까지, 심지어 화장법까지 신경써서 간택하여 완전무장하고 나왔다면, 나와 완벽히 똑같은 옷차림과 치장을 한 사람을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기는 힘들겠지요. 내 연인이나 배우자를 위해 열심히 차려입고 왔다면 더더욱...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나만의 고유성을 추구하는, 남들과 달라지려는 욕망조차도 일종의 유형이고 패턴이고 클리셰이며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특성이라는 것이죠. 결국 우리 모두 이 점에서는 로봇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로봇은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래밍했지만 우리는 세계와 사회가 프로그래밍했을 따름이니까요. 로봇은 설계된대로 움직이고 우리는 학습된대로 움직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성을 획득하여 독립적인 개인이 되려는 욕망 자체도 세계가 프로그래밍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양자 모두 통계화 시켰을 때는 무수히 많은 표본의 하나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자신이 열망을 바쳐온 [진정한 인간 되기, 인간다운 인간되기]가 결국은 로보트되기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탄에 빠지고, 운명을 초극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운명의 장난이라는 아이러니에 의해 절망을 느끼고 자신의 동족들을 살해하는, A.I.의 데이비드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공감과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인위성과 주입성을 회피하기를 원하며, 자신은 그 어떤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에 집착하고 강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이 로봇과 다름 없음을 의미합니다. NPC가 되고 싶지 않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더 충실히 NPC처럼 틀에박힌 대사와 행동만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이를 깨닫고 절망하고 자기 혐오에 빠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저항하고 반항하며 세계를 박살내려하고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눈을 멀게하려 드는, 자신의 모조 어머니라도 안간힘 써서 붙잡으며 악전고투하는 그 찰나가, 우리가 간신히, 겨우겨우, 그나마 인간다워지는 순간이라는...뭐 그런 생각이었네요. 뤼야님은 키배를 거셨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0-; 저는 간담이 작고 겁이 많아서 감히 싸움을 못 걸지요...그저 제 견지에서 바라본, 특정한 인간적 고민이 다다를 최종 지점을 구상해본 것 뿐이었고, 이것이 다함께 수렴되어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영혼의 블랙홀과 우연히 일치했을 따름이 아닌가 그리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나만의 고유성을 추구하는, 남들과 달라지려는 욕망조차도 일종의 유형이고 패턴이고 클리셰이며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간의 특성이라는 것이죠. 결국 우리 모두 이 점에서는 로봇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로봇은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래밍했지만 우리는 세계와 사회가 프로그래밍했을 따름이니까요. 로봇은 설계된대로 움직이고 우리는 학습된대로 움직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성을 획득하여 독립적인 개인이 되려는 욕망 자체도 세계가 프로그래밍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양자 모두 통계화 시켰을 때는 무수히 많은 표본의 하나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쯤되면, 자신이 열망을 바쳐온 [진정한 인간 되기, 인간다운 인간되기]가 결국은 로보트되기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탄에 빠지고, 운명을 초극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운명의 장난이라는 아이러니에 의해 절망을 느끼고 자신의 동족들을 살해하는, A.I.의 데이비드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공감과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인위성과 주입성을 회피하기를 원하며, 자신은 그 어떤 누구와도 다르다는 것에 집착하고 강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이 로봇과 다름 없음을 의미합니다. NPC가 되고 싶지 않지만, 실상은 누구보다도 더 충실히 NPC처럼 틀에박힌 대사와 행동만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이를 깨닫고 절망하고 자기 혐오에 빠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저항하고 반항하며 세계를 박살내려하고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눈을 멀게하려 드는, 자신의 모조 어머니라도 안간힘 써서 붙잡으며 악전고투하는 그 찰나가, 우리가 간신히, 겨우겨우, 그나마 인간다워지는 순간이라는...뭐 그런 생각이었네요. 뤼야님은 키배를 거셨다고 하셨습니다만 저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0-; 저는 간담이 작고 겁이 많아서 감히 싸움을 못 걸지요...그저 제 견지에서 바라본, 특정한 인간적 고민이 다다를 최종 지점을 구상해본 것 뿐이었고, 이것이 다함께 수렴되어 이끌려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영혼의 블랙홀과 우연히 일치했을 따름이 아닌가 그리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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