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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1/26 23:25:39 |
Name | 뤼야 |
Subject | 라캉과 들뢰즈를 읽어야 할까?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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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란 이런 것이었죠. \"썩은 음식을 항아리에 넣어두면 거기에서 쥐가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 수준과 비교하면 어이가 없을 수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과학수준의 미비함 들어 부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중용같은 윤리적 개념은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없다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4원소설은 부정당하나 4원인은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과학자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것과도 비슷합니다. 증명... 더 보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란 이런 것이었죠. \"썩은 음식을 항아리에 넣어두면 거기에서 쥐가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사유 수준과 비교하면 어이가 없을 수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과학수준의 미비함 들어 부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중용같은 윤리적 개념은 과학적으로 오류가 있다/없다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4원소설은 부정당하나 4원인은 부정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과학자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는것과도 비슷합니다. 증명한 적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영역이죠. (신은 있는 게 더 찾기 빠를겁니다. 아마....)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의 시조와 같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론을 성립했기 때문이죠. 그 시대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가 \"썩은 음식에서 쥐가 나온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리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가 과학/비과학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가가 과학/비과학을 나누는 더 올바른 기준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를 들고 나오신 것은 별로 탁월한 반론은 아닙니다. 그 후의 다양한 철학적 사변들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보여주셨지만 그 부분들은 문제의 핵심과는 동 떨어지게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이 연구한 영역은 과학적 연구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요. 비교적 일찍 형이하와 형이상의 영역을 구분한 서양과 달리, 특히 우리의 성리학은 이러한 구분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이기론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형이하학적 현상마저 포괄하려 했죠. 덕분에 제대로 된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여러면에서 조정과 수정이 필요합니다.
라캉의 오류도 이와 유사하다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형이하학적 가치를 형이상학적 가치로 잘못 판단했죠. 인간의 심리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지만 이는 형이상학적 접근이 아니라 형이하학적 접근으로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이 어울리는 분야. 바로 심리학이죠. 그럼 다른 모든 철학자들은 뭐냐고 반문하겠죠. 사르트르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 따위를 논한 적이 없어요. 인간 사유의 근본을 물었죠. 좀더 광의적으로 철학집단 모두를 포괄하자면 그들은 사유 자체가 연구였지, 사유의 매커니즘을 연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연구 영역에 걸맞은 올바른 방법론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 라캉의 제일 큰 문제이고, 그 영역을 제멋대로 분간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어지는 문제일겁니다.
과학적 오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라캉 수준으로 볼수는 없습니다. (아 솔직히 흥분하게 되는군요. 나의 아리짱을....부들부들) 저는 라캉까엔 공감합니다만 그로부터 들뢰즈나 지젝까지 같은 사유로 깔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라캉을 정돈해서 올바른 형이상학적 위치로 되돌리는 사람들이니까요. 비평에서 라캉은 과도한 자의적 해석을 많이 불러옵니다. 인물을 설명하기 매우 편리하니까요. 덕분에 인물 행동의 기저를 욕망에만 기인하여 상황과 개연성을 무시하는 명백한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현학적 허세는 덤이죠. 완전 짱시룸;;;) 라캉을 기반으로 쓰는 많은 비평들은 공통된 반론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라고요. 인간의 행동 원인을 어찌 단언하냐고 하겠지만 그들이 행동하게 되는 사유의 매커니즘은 비록 편린적이지만 실험적으로 하나씩 밝혀나가고 있습니다. 명백히 보이는 심리학적 이유를 도외시하고 정신분석학으로 과도한 의미부여를 한다면 좋은 비평이 되지 못할겁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한 자기 사상의 설명\"이 비평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싱이 올바라야 해석이 똑바로 나오겠죠.
라캉까가 아닌 제 입장을 말씀드린다면 \'라캉은 분별없는 전근대적 미완의 사상\'이라고 해야겠네요. 라캉으로 비평하는 건 미완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손잡이 없는 끌로 조각을 하는데 올바르게 나오기는 힘들겠죠. 물론 도구 안 따지고 뭐로 후벼파도 제대로 된 글을 보여주는 장인/굇수들도 있습니다만... 비평 전반에서 추구해야할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들고 나오신 것은 별로 탁월한 반론은 아닙니다. 그 후의 다양한 철학적 사변들에 대한 훌륭한 지식을 보여주셨지만 그 부분들은 문제의 핵심과는 동 떨어지게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이 연구한 영역은 과학적 연구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요. 비교적 일찍 형이하와 형이상의 영역을 구분한 서양과 달리, 특히 우리의 성리학은 이러한 구분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이기론은 형이상학적 가치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형이하학적 현상마저 포괄하려 했죠. 덕분에 제대로 된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여러면에서 조정과 수정이 필요합니다.
라캉의 오류도 이와 유사하다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형이하학적 가치를 형이상학적 가치로 잘못 판단했죠. 인간의 심리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지만 이는 형이상학적 접근이 아니라 형이하학적 접근으로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이 어울리는 분야. 바로 심리학이죠. 그럼 다른 모든 철학자들은 뭐냐고 반문하겠죠. 사르트르를 예로 들어볼까요. 그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 따위를 논한 적이 없어요. 인간 사유의 근본을 물었죠. 좀더 광의적으로 철학집단 모두를 포괄하자면 그들은 사유 자체가 연구였지, 사유의 매커니즘을 연구한 게 아니었습니다. 연구 영역에 걸맞은 올바른 방법론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 라캉의 제일 큰 문제이고, 그 영역을 제멋대로 분간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어지는 문제일겁니다.
과학적 오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를 라캉 수준으로 볼수는 없습니다. (아 솔직히 흥분하게 되는군요. 나의 아리짱을....부들부들) 저는 라캉까엔 공감합니다만 그로부터 들뢰즈나 지젝까지 같은 사유로 깔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들은 라캉을 정돈해서 올바른 형이상학적 위치로 되돌리는 사람들이니까요. 비평에서 라캉은 과도한 자의적 해석을 많이 불러옵니다. 인물을 설명하기 매우 편리하니까요. 덕분에 인물 행동의 기저를 욕망에만 기인하여 상황과 개연성을 무시하는 명백한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현학적 허세는 덤이죠. 완전 짱시룸;;;) 라캉을 기반으로 쓰는 많은 비평들은 공통된 반론을 받게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라고요. 인간의 행동 원인을 어찌 단언하냐고 하겠지만 그들이 행동하게 되는 사유의 매커니즘은 비록 편린적이지만 실험적으로 하나씩 밝혀나가고 있습니다. 명백히 보이는 심리학적 이유를 도외시하고 정신분석학으로 과도한 의미부여를 한다면 좋은 비평이 되지 못할겁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을 통한 자기 사상의 설명\"이 비평이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사싱이 올바라야 해석이 똑바로 나오겠죠.
라캉까가 아닌 제 입장을 말씀드린다면 \'라캉은 분별없는 전근대적 미완의 사상\'이라고 해야겠네요. 라캉으로 비평하는 건 미완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손잡이 없는 끌로 조각을 하는데 올바르게 나오기는 힘들겠죠. 물론 도구 안 따지고 뭐로 후벼파도 제대로 된 글을 보여주는 장인/굇수들도 있습니다만... 비평 전반에서 추구해야할 방향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남의 말을 단어이라고 하시는 건 좀;;; 그저 방향성을 탈 라캉적으로 잡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 뿐이죠. 그런 어투라면 뤼야님 말씀도 단언에 불과해집니다. 말씀을 주의해서 해주세요.
저는 들뢰즈와 지젝이 라캉을 끌고 온 것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는데 과민 반응하시는군요. 그들은 불완전한 라캉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 말씀드렸는데요. 그리고 장인/굇수는 미완의 라캉을 가지고도 충분히 훌륭한 비평을 쓸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말입니다. 더불어 장인/굇수가 아니라고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죠. 제가 엄청난... 더 보기
저는 들뢰즈와 지젝이 라캉을 끌고 온 것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는데 과민 반응하시는군요. 그들은 불완전한 라캉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 말씀드렸는데요. 그리고 장인/굇수는 미완의 라캉을 가지고도 충분히 훌륭한 비평을 쓸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말입니다. 더불어 장인/굇수가 아니라고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죠. 제가 엄청난... 더 보기
남의 말을 단어이라고 하시는 건 좀;;; 그저 방향성을 탈 라캉적으로 잡아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 뿐이죠. 그런 어투라면 뤼야님 말씀도 단언에 불과해집니다. 말씀을 주의해서 해주세요.
저는 들뢰즈와 지젝이 라캉을 끌고 온 것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는데 과민 반응하시는군요. 그들은 불완전한 라캉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 말씀드렸는데요. 그리고 장인/굇수는 미완의 라캉을 가지고도 충분히 훌륭한 비평을 쓸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말입니다. 더불어 장인/굇수가 아니라고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죠. 제가 엄청난 석학이 되어야만 지금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뭔가 뤼야님에게 무시당한다는 기분을 감출수가 없네요. 게다가 무협지 운운은 좀 너무 나가셨습니다. 그런 키치적 가치까지 평가 절하하고 싶으셨습니까? 좀 흥분하신듯 한데 제 글을 오독하지 않으셨음 합니다.
제가 제시하는 것은 라캉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라캉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써 비평이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비평 분야는 모르겠는데) 최근에 영화 비평쪽은 보다 대중 친화적인 비평으로 많이 선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라캉에 대한 비판/성찰과 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지진 않았죠. 뭐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그런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전에 많은 영화 비평 매체가 폐간했습니다만;;;
인물에 대한 라캉 오용은 예시일 뿐입니다. 이를 통해 라캉의 시선만으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었죠. 뤼야님께서 이런식의 오용을 한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요;;;
사르트르와 심리적 구조를 왜 여기서 말씀하시냐고 하시는데 사르트르 등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라캉은 추구했던 연구의 영역이 달랐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였습니다. 대체 제 댓글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뤼야님이 사르트르가 정신분석학을 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헤겔-후설-하이데거 등은 인간 심리의 지향성을 즉 사유의 방향을 연구한 것이지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작용과정으로 일어나는 가를 연구한 게 아닙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라캉은 자동차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보려했다면 다른 철학자들은 자동차란 무엇인지 나아가 더 상위개념으로 탈 것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한 셈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이런 정도의 영역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 그들의 연구가 이 비유와 유사한 관계에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제 댓글을 오독할지 몰라 이렇게 부연설명을 달아야겠네요.
뤼야님. 전 뤼야님하고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뤼야님보다 모자른 사람도 아닙니다. 뤼야님이야 말로 제 글을 오독하시면서 저에게 오독의 굴레를 뒤집어 씌우며 지적 과시를 하시는 모습은 굉장히 유감스럽습니다. 왜 사르트르를 가져왔냐니요. 제가 님의 말씀을 못알아먹어서 사르트르가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전 제 주장을 하기 위해 사르트르좀 끌고 오면 안 됩니까? 그럼 뤼야님은 왜 헤겔, 하이데거, 후설 미네, 브레히트, 맑스, 알튀셰,까뮈 등등 을 끌고 오십니까? 님이 쓰면 지식이고 제가 쓰면 허영인가요? 마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르트르 운운하지 마라\"는 식의 고압적 태도가 느껴집니다.
최근에 글을 한 편 쓰고 있습니다. 그 글과 연관되어 있기에 라캉을 근간으로 하는 비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개인적 신념이 있지만 상반되는 뤼야님의 신념도 있으니 본인의 주장에 까 수준의 편협함이 있음을 인정하며 운을 띄웠죠. (물론 제가 생각하는 라캉과 라캉까는 입장이 좀 다릅니다. 뤼야님의 글들이나 다른 사람과의 논의를 통해 많이 달라지고 있지요) 첫 문장에서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셨듯이 저는 라캉 이론의 엄밀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성찰 없이 무비판적으로 비평에 오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그 지점에서 뤼야님의 말씀 덕에 제 생각이 많은 수정/변환을 거치고 있습니다. 첫 댓글인 까의 의견과 제가 생각하는 라캉을 바라보는 의견의 온도차는 분명히 있지요. 이런 변화를 얻고자 말 좀 섞고 싶었습니다. 님을 공격한다거나 싸우자고 장문의 댓글을 주고 받는 게 아니에요. 좀 부드러워집시다.
저는 들뢰즈와 지젝이 라캉을 끌고 온 것을 나쁘게 말하지 않았는데 과민 반응하시는군요. 그들은 불완전한 라캉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라 말씀드렸는데요. 그리고 장인/굇수는 미완의 라캉을 가지고도 충분히 훌륭한 비평을 쓸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말입니다. 더불어 장인/굇수가 아니라고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죠. 제가 엄청난 석학이 되어야만 지금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뭔가 뤼야님에게 무시당한다는 기분을 감출수가 없네요. 게다가 무협지 운운은 좀 너무 나가셨습니다. 그런 키치적 가치까지 평가 절하하고 싶으셨습니까? 좀 흥분하신듯 한데 제 글을 오독하지 않으셨음 합니다.
제가 제시하는 것은 라캉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라캉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써 비평이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비평 분야는 모르겠는데) 최근에 영화 비평쪽은 보다 대중 친화적인 비평으로 많이 선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라캉에 대한 비판/성찰과 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지진 않았죠. 뭐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그런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전에 많은 영화 비평 매체가 폐간했습니다만;;;
인물에 대한 라캉 오용은 예시일 뿐입니다. 이를 통해 라캉의 시선만으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었죠. 뤼야님께서 이런식의 오용을 한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요;;;
사르트르와 심리적 구조를 왜 여기서 말씀하시냐고 하시는데 사르트르 등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라캉은 추구했던 연구의 영역이 달랐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함이였습니다. 대체 제 댓글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뤼야님이 사르트르가 정신분석학을 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헤겔-후설-하이데거 등은 인간 심리의 지향성을 즉 사유의 방향을 연구한 것이지 생각이라는 것이 어떤 작용과정으로 일어나는 가를 연구한 게 아닙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라캉은 자동차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보려했다면 다른 철학자들은 자동차란 무엇인지 나아가 더 상위개념으로 탈 것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한 셈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이런 정도의 영역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 그들의 연구가 이 비유와 유사한 관계에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제 댓글을 오독할지 몰라 이렇게 부연설명을 달아야겠네요.
뤼야님. 전 뤼야님하고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뤼야님보다 모자른 사람도 아닙니다. 뤼야님이야 말로 제 글을 오독하시면서 저에게 오독의 굴레를 뒤집어 씌우며 지적 과시를 하시는 모습은 굉장히 유감스럽습니다. 왜 사르트르를 가져왔냐니요. 제가 님의 말씀을 못알아먹어서 사르트르가 튀어나온 게 아닙니다. 전 제 주장을 하기 위해 사르트르좀 끌고 오면 안 됩니까? 그럼 뤼야님은 왜 헤겔, 하이데거, 후설 미네, 브레히트, 맑스, 알튀셰,까뮈 등등 을 끌고 오십니까? 님이 쓰면 지식이고 제가 쓰면 허영인가요? 마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사르트르 운운하지 마라\"는 식의 고압적 태도가 느껴집니다.
최근에 글을 한 편 쓰고 있습니다. 그 글과 연관되어 있기에 라캉을 근간으로 하는 비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개인적 신념이 있지만 상반되는 뤼야님의 신념도 있으니 본인의 주장에 까 수준의 편협함이 있음을 인정하며 운을 띄웠죠. (물론 제가 생각하는 라캉과 라캉까는 입장이 좀 다릅니다. 뤼야님의 글들이나 다른 사람과의 논의를 통해 많이 달라지고 있지요) 첫 문장에서 매우 정확하게 지적하셨듯이 저는 라캉 이론의 엄밀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성찰 없이 무비판적으로 비평에 오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거고요. 그 지점에서 뤼야님의 말씀 덕에 제 생각이 많은 수정/변환을 거치고 있습니다. 첫 댓글인 까의 의견과 제가 생각하는 라캉을 바라보는 의견의 온도차는 분명히 있지요. 이런 변화를 얻고자 말 좀 섞고 싶었습니다. 님을 공격한다거나 싸우자고 장문의 댓글을 주고 받는 게 아니에요. 좀 부드러워집시다.
들뢰즈가 라캉을 탐구한 이유와 의의에 대해서는 뤼야님이 생각하시는 것에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 정신분석학적 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라캉이 아니라 들뢰즈를 보라고 권유(할 깜냥은 안 돼서)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캉을 읽는 것 까지 부정할 수는 없죠. 그런데 라캉을 읽는다는 사람들은 라캉이 부족하고 불완전 하다는 의견에 대해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캉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보니 라캉만 이해하는 것도 벅차는 일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라캉과 같은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라캉이 지적받는 부분... 더 보기
라캉을 읽는 것 까지 부정할 수는 없죠. 그런데 라캉을 읽는다는 사람들은 라캉이 부족하고 불완전 하다는 의견에 대해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캉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보니 라캉만 이해하는 것도 벅차는 일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라캉과 같은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라캉이 지적받는 부분... 더 보기
들뢰즈가 라캉을 탐구한 이유와 의의에 대해서는 뤼야님이 생각하시는 것에 공감합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 정신분석학적 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라캉이 아니라 들뢰즈를 보라고 권유(할 깜냥은 안 돼서)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캉을 읽는 것 까지 부정할 수는 없죠. 그런데 라캉을 읽는다는 사람들은 라캉이 부족하고 불완전 하다는 의견에 대해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캉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보니 라캉만 이해하는 것도 벅차는 일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라캉과 같은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라캉이 지적받는 부분을 보완하거나 아니면 더 완성도 높은 이론을 이야기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말은 라캉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라캉을 돌아볼거면 그의 단점을 인정/반성하고 가져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뤼야님께 기대했던건 \'21세기에 라캉을 돌아보는 사람은 세간에 널리 퍼진 라캉 비판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에 대해 너무 전근대적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만 해도 20세기 인물이고 많은 형이상학적 논의를 형이하학적 영역으로 가져온 열역학이나 맥스웰 등만 해도 이미 19세기에 완성되었죠. 양자역학 이후 인물인 사르트르가 형이상과 형이하에 대한 구분이 지금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넌센스 같습니다.
그리고 님은 [님께서는 제 의견을 두고 어울리지 않는 예시라거나 핵심과 동떨어졌다고 말씀]하는 수준이 아니었죠. 오독이라느니, 댓글을 어떻게 읽느냐느니 참으로 불쾌한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셨습니다. 사르트르가 인간 사유의 매커니즘을 연구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연유를 말씀하시고 제 의견이 틀렸다고 하시면 됩니다. 지금 다시 말씀드리지만 님께서 사르트르를 언급하신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 주장을 위해 사르트르를 언급한 것 뿐입니다. 그에 대해 [제 댓글을 어떻게 읽으신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자의식 과잉에 따른 오독이자 제 독해력을 의심하시는 무례함입니다.
게다가 이후 사르트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해주셨는데, 이런 교조적 자세는 저와 님 사이에 상하관계를 느끼게 합니다. 위에 위치하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래로 위치하는 사람은 실제로 모자란 사람이 아닐지라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겠죠. 님께서 이 댓글에서 설명해주신 사르트르에 대한 강좌를 보아도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무슨 몰랐던 새로운 내용이 아니니까요. 사르트르는 현상과 이에 대한 사유의 흐름을 말한 것이고 심리의학적 연구는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 가를 연구합니다. 이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고, 그렇기에 저는 심리학적 관점으로도 사르트를 긍정할 수 있는 것이죠. 라캉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라캉에게서 심리학적 연구 목표와 다른 어떤 의미를 얻을 것인지, 또한 그것이 심리학으로부터 어떻게 거리를 둘수 있는지, 제가 궁금한 지점입니다. 라캉이 의사과학이 아닌 철학적 문학적 지위를 얻으려면 이 질문에 대답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분은 별로 없죠)
제가 뤼야님을 미러링 한 것도 그리 교양있는 행동은 아니긴 합니다. (뭐 그게 당당한 분들이 있긴 하죠 요즘;;;) 그래도 이런식의 발언이 얼마나 불쾌할 수 있을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한다고 하시지만 제 의견에 반박하는데 더 집중하시고, 지적받은 표현의 정당함을 변호 하시는데 더 집중하시는 게 진심어린 사과로 비춰지진 않네요. 최소한 오독이라던가, 댓글 제대로 읽었냐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반성하셨음 합니다. (이런 말 듣고 흥분 안하면 성인군자거나 호구가 아닐까요? 막말듣고 발끈해서 죄송합니다만 전 발끈 하고 싶네요.)
이만 말 줄이겠습니다. 더 이상 댓글 달지 않을게요. 편안한 밤 되시길.
라캉을 읽는 것 까지 부정할 수는 없죠. 그런데 라캉을 읽는다는 사람들은 라캉이 부족하고 불완전 하다는 의견에 대해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캉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보니 라캉만 이해하는 것도 벅차는 일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라캉과 같은 근대인이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라캉이 지적받는 부분을 보완하거나 아니면 더 완성도 높은 이론을 이야기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말은 라캉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니라 라캉을 돌아볼거면 그의 단점을 인정/반성하고 가져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뤼야님께 기대했던건 \'21세기에 라캉을 돌아보는 사람은 세간에 널리 퍼진 라캉 비판에 어떻게 답변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에 대해 너무 전근대적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사르트르만 해도 20세기 인물이고 많은 형이상학적 논의를 형이하학적 영역으로 가져온 열역학이나 맥스웰 등만 해도 이미 19세기에 완성되었죠. 양자역학 이후 인물인 사르트르가 형이상과 형이하에 대한 구분이 지금과 다르다고 보는 것은 넌센스 같습니다.
그리고 님은 [님께서는 제 의견을 두고 어울리지 않는 예시라거나 핵심과 동떨어졌다고 말씀]하는 수준이 아니었죠. 오독이라느니, 댓글을 어떻게 읽느냐느니 참으로 불쾌한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셨습니다. 사르트르가 인간 사유의 매커니즘을 연구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연유를 말씀하시고 제 의견이 틀렸다고 하시면 됩니다. 지금 다시 말씀드리지만 님께서 사르트르를 언급하신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 주장을 위해 사르트르를 언급한 것 뿐입니다. 그에 대해 [제 댓글을 어떻게 읽으신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건 자의식 과잉에 따른 오독이자 제 독해력을 의심하시는 무례함입니다.
게다가 이후 사르트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해주셨는데, 이런 교조적 자세는 저와 님 사이에 상하관계를 느끼게 합니다. 위에 위치하는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래로 위치하는 사람은 실제로 모자란 사람이 아닐지라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겠죠. 님께서 이 댓글에서 설명해주신 사르트르에 대한 강좌를 보아도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무슨 몰랐던 새로운 내용이 아니니까요. 사르트르는 현상과 이에 대한 사유의 흐름을 말한 것이고 심리의학적 연구는 생각이 어떻게 작동하는 가를 연구합니다. 이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고, 그렇기에 저는 심리학적 관점으로도 사르트를 긍정할 수 있는 것이죠. 라캉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라캉에게서 심리학적 연구 목표와 다른 어떤 의미를 얻을 것인지, 또한 그것이 심리학으로부터 어떻게 거리를 둘수 있는지, 제가 궁금한 지점입니다. 라캉이 의사과학이 아닌 철학적 문학적 지위를 얻으려면 이 질문에 대답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는 분은 별로 없죠)
제가 뤼야님을 미러링 한 것도 그리 교양있는 행동은 아니긴 합니다. (뭐 그게 당당한 분들이 있긴 하죠 요즘;;;) 그래도 이런식의 발언이 얼마나 불쾌할 수 있을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한다고 하시지만 제 의견에 반박하는데 더 집중하시고, 지적받은 표현의 정당함을 변호 하시는데 더 집중하시는 게 진심어린 사과로 비춰지진 않네요. 최소한 오독이라던가, 댓글 제대로 읽었냐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반성하셨음 합니다. (이런 말 듣고 흥분 안하면 성인군자거나 호구가 아닐까요? 막말듣고 발끈해서 죄송합니다만 전 발끈 하고 싶네요.)
이만 말 줄이겠습니다. 더 이상 댓글 달지 않을게요. 편안한 밤 되시길.
뤼야 님// http://redtea.kr/?b=3&n=1638&c=23764
이 댓글에 나오는 불쾌한 표현들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제가 이리 발끈했을리가 없었을 것 같네요. 뤼야님의 여러 말씀은 경청할 가치가 있지만 좀 더 표현에서 상대를 배려해주셨음 합니다. 듣는 사람을 꼭 빡치게 하면서 말씀하실 필욘 없었어요. 저 댓글 이전까지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댓글에서 부터 대화가 아니라 가르치고 계셨다는 느낌과 제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가 보이네요. 저로서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런 소리를 듣고 \'네네~\'하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갈 정도로 저자세가 되선 안 될 것 같네요.
이 댓글에 나오는 불쾌한 표현들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제가 이리 발끈했을리가 없었을 것 같네요. 뤼야님의 여러 말씀은 경청할 가치가 있지만 좀 더 표현에서 상대를 배려해주셨음 합니다. 듣는 사람을 꼭 빡치게 하면서 말씀하실 필욘 없었어요. 저 댓글 이전까지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댓글에서 부터 대화가 아니라 가르치고 계셨다는 느낌과 제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가 보이네요. 저로서는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런 소리를 듣고 \'네네~\'하고 웃으며 대화를 이어갈 정도로 저자세가 되선 안 될 것 같네요.
크게 공감하고 갑니다. 인문학이 속류화 되어 상품이 되거나 무력한 아카데미 클리셰가 되거나 하는 요 근자의 시대에, 어떤 식으로 인문학이 존재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 기존에 학적으로 수용된 거인들의 문제의식을 후발주자들이 어떤 식으로 대면하고 대결하고 극복하고 지양하고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그들 역시도 또다른 거인으로 자리 잡아 자신들의 후대인들에게 또 하나의 문제의식을 남겨주고 점진의 씨앗을 배태하는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인문학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문제의식의 대립의 연쇄고리이며 이런 자장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명증히 밝힌, 보기 드문 명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철학은 없다, 그저 철학사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이 댓글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겠지요.
고인이니까 기분나쁜 거예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자나요. 이럴땐 라캉을 살려서 타인의 그럴싸한 논리에 편승해서 라캉보다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사람과 키배 붙여보고 싶어요. 똑같이 교육받게 하고요. 죽은 라캉 까면서 잘난척하는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리고 깔려면 읽고나 까야죠. 전 라캉 빠도 까도 아니에요. 사사키 아타루가 그렇듯이요. 그래서 제가 저이의 글을 사랑하고요. 중요한 건 라캉이 한 말 자체가 아니에요. 그 말을 하기까지 라캉이 걸었던 사고의 길이고 그게 인문학이죠. 그리고 저는 처음부터 라캉을 과학이 아닌 인문학으로 읽었구요. 글에서 충분히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논의는 그냥 제겐 시간낭비였을 뿐이에요. 죄송해요. 눈부심님. 피곤하시죠. 쓸모없는 말들이니 스킵하세요.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작업은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결국 다른 거장들의 언어를 그 재료로 빌려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나는 추상의 세계에 뛰어드는 일을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다, 라고 독해한다면 맞을까요. 새로운 세계로의 탐험, 독자적 세계의 구축 이 모든 것은 한 개인의 전적인 언어적 독립이 불가능하며 여기에 대해 기분 좋은 체념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도 느꼈습니다. 혹은 그 어떤 언어로도 결국 파해가 불가능한 추상의 세계 그 자체와, 각자의 언어로 추상성을 탈피하고 결정을 맺... 더 보기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작업은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결국 다른 거장들의 언어를 그 재료로 빌려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나는 추상의 세계에 뛰어드는 일을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다, 라고 독해한다면 맞을까요. 새로운 세계로의 탐험, 독자적 세계의 구축 이 모든 것은 한 개인의 전적인 언어적 독립이 불가능하며 여기에 대해 기분 좋은 체념을 하고 계시는 것처럼도 느꼈습니다. 혹은 그 어떤 언어로도 결국 파해가 불가능한 추상의 세계 그 자체와, 각자의 언어로 추상성을 탈피하고 결정을 맺었지만 이를 자신의 세계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거칠 수 밖에 없는 추상화의 작업에 대한 예찬으로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개념을 서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꾸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수정 조각들이 따다닥 맺혔다가 부숴지고 가루가 되고 이 과정이 계속 순환을 이루는?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개념을 서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꾸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네요. 수정 조각들이 따다닥 맺혔다가 부숴지고 가루가 되고 이 과정이 계속 순환을 이루는?
사시키 아타루는 책을 읽는다는 것의 광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니체를 읽고 니체가 되지못하면 그건 읽은 것이 아니고 단지 정보를 얻은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그는 들뢰즈의 말을 빌어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고 말해요. 그리고 제게 추상은 읽음의 광기를 무뎌지게 하는 중화제 같은 것입니다. 왕천군님의 덧글은 정말 감동입니다. 잘 읽어주셔서 마음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글을 쓸때 되도록이면 제 안의 언어로만 쓰고 싶은데 이미 여러 사람의 언어가 제게 침투해 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들끓을 때 추상을 초대하지요. 기분 좋은 밤입니다. 내일은 정말 책을 놓고 신나게 놀 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는 글을 쓸때 되도록이면 제 안의 언어로만 쓰고 싶은데 이미 여러 사람의 언어가 제게 침투해 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들끓을 때 추상을 초대하지요. 기분 좋은 밤입니다. 내일은 정말 책을 놓고 신나게 놀 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 긴 댓글을 새벽 4시에 읽었지만, 뤼야님의 댓글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대화의 형식과 지적에도, 지식의 내용전개 과정도요. 게다가 전 철학도가 아니다보니 인문학적으로 많이 언급되는 라캉이나 그 외의 인물들을 잘 몰랐는데 상당히 재밌게 잘 배웠습니다. 시간적 여력이 되신다면 철학과 학자에 대한 로드맵같은 소개글을 감히 요청드리고 싶을정도였어요. 사실 문과의 범주에속하는 문학,철학,사회학을 비전공자가 접근하기 힘든 것중 하나가 \'누구부터, 어디부터, 무엇을\' 읽을지를 몰라서 어려운 것이잖아요. 개인적으론 라캉의 상징계 물질계(이게 라캉의 것인지 잘 모르겠는게 전 알튀셰르 공부하면서 이데올로기 관련해서 라캉을 빌리자면 이렇더라 라는 설명을 들었던터라)이외에 응시와 왜상 관련 부분을 조금 더 상세하게 알고싶어졌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단순히 글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마치 자식과도 같은 책임을 글에 느끼게 되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글로 낮은 글솜씨와 미숙한 사고가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글을 쓰지 못 합니다만 뤼야 님이야 그렇지는 않으시겠죠. 이 책임감은 저처럼 글의 부끄러운 수준에서만 느끼는 게 아니라 글에 담긴 자신의 얘기에도 미치기에 필연적으로 논의를 불러옵니다. 특히나 뤼야 님처럼 강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분에겐 더욱 그러하겠죠. 이 때 자신의 주장의 옳고 그름 또는 옳음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게 이런 격한 논쟁 그 자체가 피로를 만들더... 더 보기
단순히 글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마치 자식과도 같은 책임을 글에 느끼게 되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글로 낮은 글솜씨와 미숙한 사고가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글을 쓰지 못 합니다만 뤼야 님이야 그렇지는 않으시겠죠. 이 책임감은 저처럼 글의 부끄러운 수준에서만 느끼는 게 아니라 글에 담긴 자신의 얘기에도 미치기에 필연적으로 논의를 불러옵니다. 특히나 뤼야 님처럼 강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분에겐 더욱 그러하겠죠. 이 때 자신의 주장의 옳고 그름 또는 옳음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게 이런 격한 논쟁 그 자체가 피로를 만들더군요.
그래서 전 피지알에서도 그랬고 홍차넷에서도 마찬가지로 글을 써주시는 분들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댓글로만 말하는 저 대신 그런 피로감을 감당해주시는 분들이란 생각이 들어 죄스럽고 또 고마워하죠. 개인적으로는 뤼야 님이 조만간 다시 글을 쓰실 거라 생각합니다. 소심한 저도 가끔은 글을 써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칠 때가 있고 실제로 쓰기도 하는데 아마 저보다 그런 생각을 훨씬 강하게 느끼실 것 같아요. 전에 탈퇴하셨을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번 라캉의 이야기는 어려워서 끼기 힘들었지만 여전히 뤼야 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전 피지알에서도 그랬고 홍차넷에서도 마찬가지로 글을 써주시는 분들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댓글로만 말하는 저 대신 그런 피로감을 감당해주시는 분들이란 생각이 들어 죄스럽고 또 고마워하죠. 개인적으로는 뤼야 님이 조만간 다시 글을 쓰실 거라 생각합니다. 소심한 저도 가끔은 글을 써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미칠 때가 있고 실제로 쓰기도 하는데 아마 저보다 그런 생각을 훨씬 강하게 느끼실 것 같아요. 전에 탈퇴하셨을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번 라캉의 이야기는 어려워서 끼기 힘들었지만 여전히 뤼야 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제 글이 과격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칸트가, 맑스가, 니체가, 프로이트가, 라캉이, 들뢰즈가 죽어서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의 생각이 남다르기 때문이고, 이 남다름은 과격함과 그리 다른 뜻이 아니지요. 제가 그런 석학들과 동급이다 이런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좋아하고 가까이 하다보니 어느새 저도 물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홍차넷에서 활동하며 제 글의 스타일이 변하게 되는 일은 없을겁니다. 좀 상심했지만 재건하겠습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좀 밥맛없는 스타일일 지언정 좋게봐주시는 여러분덕에 계속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ㅠㅠ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제게 최고의 찬사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제 글은 여기 모이신 분들이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티비의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시사에 관심을 가지듯 저의 독서도 재미로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느끼는 재미는 그것이니까요.
팟저님 링크 맞습니다. 지금은 질문이 삭제되고 없는데 자질이 의심스러운 교수가 \'라캉이 한물갔다\'고 하는데 진짜냐 뭐 그런 글이었지요. 라캉은 한물 간거 맞지요. 플라톤은 세물은 갔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두물은 갔지요. 세익스피어는 대체 왜 읽고 있을까요? 글을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그토록 강조하면서 글이 지시하는 대상에.대한 배려는 왜 하지 않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심려끼쳐드려 죄송하고 일부러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격이 미숙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팟저님 링크 맞습니다. 지금은 질문이 삭제되고 없는데 자질이 의심스러운 교수가 \'라캉이 한물갔다\'고 하는데 진짜냐 뭐 그런 글이었지요. 라캉은 한물 간거 맞지요. 플라톤은 세물은 갔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두물은 갔지요. 세익스피어는 대체 왜 읽고 있을까요? 글을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그토록 강조하면서 글이 지시하는 대상에.대한 배려는 왜 하지 않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심려끼쳐드려 죄송하고 일부러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인격이 미숙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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