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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12/13 22:59:40 |
Name | 뤼야 |
Subject | 과학의 역사로 읽어보는 형이상학의 구성과 해체 |
장하석 [온도계의 철학](2013) 철학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흄이나 헤겔의 형이상학이 어떤 모양새인가를 물어보면 그 대답을 듣기는 쉽겠지만, 정작 [철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고 물어보면 머뭇거릴 공산이 높지요. 철학의 영역과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는데 이를테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의 철학은 물리적 세계를 통해 유추되는 '세계의 총체성'에 관한 탐구였다고 말할 수 있겠고, 중세에 이르러선 '이러한 세계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탐구가 철학의 영역이 되었죠. 오컴이 면도날을 들이댄 이후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에 대해 회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흄과 비트겐슈타인을 거치며 '세계를 언급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까지 이르게 되니, 철학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야망을 접고 점점 겸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게 철학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철학이란 지적인 모험이며, 그 모험의 결과로 심적 태도의 변화를 기대하는 만드는 도구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만약 나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즉, 지금과 비슷한 지적능력과 인성을 유지한 채로 라는 가정하에, 저는 다시 과학을 공부할 것 같습니다. 학부로 끝내지 않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끝까지 공부해 볼 겁니다. 뭐... 그 끝이 좌절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학부로 학업을 중단한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만, 여건만 되었다면 더 공부를 했을테지요. 그러나 지금의 삶에 불만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닙니다. 저는 나름 제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저는 세속적인 욕심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저 자신에 대한 욕심은 매우 많은 편입니다. 인간이라면 그래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성공적인 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제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만약 다시 과학을 공부한다면 어떤 분야가 좋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요즘 hot한 생명과학이나 인지과학도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반쯤은 박물학자와 같은 생물학자가 되어 필드에 나가거나 다시 화학을 공부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뼛속 깊이 유물론자이고 그에 대한 허무와 반동으로 추동된 인식을 토대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내부적 선언을 마친 존재론자입니다. 인식욕이란 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과학도로 여기는 것과 만큼이나 실존에 대한 추동과 맞물려 있긴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으니 젊음을 바쳐 공부할 마음은 안생길 것 같습니다. 존경하는 학자도 모두 과학자에요.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라이너스 폴링을 가장 좋아합니다. [온도계의 철학]은 2006년에 과학철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러커토시상을 수상했습니다. 우리에게 초판본 1쇄가 2013년에 소개되었으니 좀 늦은 감이 없지않죠.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이해한 사람이라면 장하석의 이 책이 인식론적 측면에서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인식론도 쿤을 벗어나긴 힘들긴하지만요.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마치 제가 이 글의 처음에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던 것처럼 [온도계가 온도를 진짜 틀리지 않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단순하지만 결코 그 답은 단순하지 않은 이러한 의문이야말로 과학도다운 것이며, 인식론으로서의 철학적 태도는 여기에서 출발할 수 있음을 알게 해주죠. 동시에 명색이 과학을 전공했다는 저라는 사람이 이런 의문을 한번쯤 품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온도계가 틀리는지 틀리지 않는지를 알려면 정확한 온도를 알아야하는데 그 온도를 측정하는 온도계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마치 단단한 땅에 발을 딪고 서있다 생각했는데 그 땅이 갑자기 사라지고 허공으로 던져진 느낌이죠. 과학자들은 이렇게 고약한 순환논리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런 문제를 물리적으로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미지에 대한 도전은 앎(知)을 향한 것인데, 도전하면 도전할 수록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장하석의 이 책은 이러한 아이러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학자들이 선택한 조작적 방법론과 인식론의 빈틈을 메우려는 노력이 바로 과학발전의 일등공신임을 차근차근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과학의 기본 개념이 완전히 흐릿해지는 순간, 그 조작의 순간에 [정당화에 관한 토대론과 정합론의 상대적 이점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를 통해 과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조금 더 상세히 기술하자면 정당화가 순환논리에 빠지는 것을 넘어서기 위해 즉, 여러 표준의 수렴에 의존하다 보면 토대론의 실패를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정합론을 채택하는 데에 이르는데, 이러한 정당화에 관한 토대론과 정합론의 상대적 이점은 엄격한 정당화 자체가 아니라 개념 형성과 지식 구축이 역동적 과정으로 나아가는 길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장하석은 이 과정을 빈 학파(Wiener Kreis)의 지도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말을 인용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박 건조대에서 배를 해체하고 최상의 부품으로 다시 건조할 수 없는 항해자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배를 건조해야하는 처지와 같다."라고 말이죠. 참 근사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퍼시 브리지먼의 책 [지적 진실을 위한 투쟁]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수학은 물리적 범위가 증가하면 기본 개념이 흐릿해져서 결국에는 물리적 의미를 완전히 잃고, 그렇게 되면 조작 측면에서 매우 다른 개념들로 대체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컨데 외부 공간에서 우리 은하 안으로 들어오는 항성의 운동이건 원자핵 주변 전자의 운동이건 운동 방정식에는 차이가 없다. 방정식에 쓰는 양의 조작 측면에서, 그 물리적인 의미는 이런 두 가지 경우에 완전히 다른데도 말이다. 우리 수학의 구조는 우리가 원하건 아니건 간에 물리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해도 전자의 내부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도록 만드는 그런 것이다.] 더 풀어 기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전자의 지름이 10의 -13승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유일한 답은 10의 -13승이라는 숫자를 얻는 조작을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전기동역학의 장 방정식에서 유도한 특정 방정식에다 실험에서 얻은 수치 데이터를 대입하는 방식으로 얻어진 것이지요. 그러므로 길이의 개념은 이제 변형되어, 장 방정식에 구현된 전기이론(theory of electricity)까지 포함하게 되며, 더욱 중요하게는 이런 방정식의 확장이 올바르다는 전제를 갖게 됩니다. 이런 장 방정식이 미시 척도에서 올바른지 확인하려면 무엇이 길이 측정에 개입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전자기력(electric and magnetic force)과 공간좌표(space coordinate) 사이에서 그 방정식이 요구하는 관계식을 증명해야 하나 공간좌표가 그 방정식과 동떨어진 독립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그 방정식은 증명 시도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런 물음 자체도 무의미해지고 말지요. 과학을 지탱하는 기초개념이 모두 이런 식의 순환논리에 빠질 수 밖에 없음을 알고 나면 [온도계가 온도를 진짜 틀리지 않고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게 된 것을 오히려 후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공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애써 기분탓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허공에 던져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습니까? 그러나 加一手! 시지프스처럼 달려들어 돌을 굴려봅시다. 인문학이 그러하듯 과학이라는 지식의 구조 역시 이러한 역설적인 순환의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1장에서 4장까지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만, 열역학에 대한 지식은 좀 필요합니다. 마냥 쉽지만은 않아요. 천재 뉴튼이 체온으로 온도계의 0점을 정하려고 했다는 대목을 읽으면 웃음이 나지만, 이런 '맨땅에 헤딩하는' 당대 과학자의 노력을 그저 지나간 오류로 치부하고 후대에 태어난 우리가 개이득이라는 말을 하려고 저자가 아까운 지면을 통해 여러 일화를 소개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장하석은 이러한 오류의 역사가 바로 존중돼야 할 [지식의 구조]임을 곧이어 확인할 수 있게 하니까요. 전문가적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대의 우리가, 바로 그런 이유로 전혀 품어보지 못했을 지식의 구조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만들죠. 그리고 이러한 지식의 구조야 말로 인식의 구조이며, 여기에 의문을 품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온도계의 0점을 얻기위해 고분분투한 과학자들만큼이나 이제는 아무도 들추어보는 일이 없는 옛문헌을 샅샅이 훓으며 고정점을 얻기 위해 노력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고 있는 장하석도 존경스럽긴 마친가지입니다. 5장과 6장은 본격적인 과학철학의 논의로 넘어갑니다. 전문가적 과학이 아닌, 과학의 기초 진리를 배우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왜 받아들여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풀 수 있을 것입니다. 5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입니다. 장하석이라는 학자의 근기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 사람 진짜 학자에요. 책을 쓰려면 이 정도 근기는 있어야죠. 존경과 찬사를 함께 보냅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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