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12/18 15:01:37
Name   쉬군
Subject   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더 반짝일 한아이의 1학년 생존기
학교 입학식 날, 줄도 제대로 안 서고 교장 선생님 말씀하시는데 엄마 아빠 찾아 두리번거리며 뛰어오던 아이가 벌써 1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2학년 형님이 된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저희 아이는 자폐 스펙트럼, 그중에서도 아스퍼거 증후군 성향이 강한 아이입니다. 저와 와이프를 제외한 타인에 대한 관심도가 전혀 없고 소통도 0에 가깝습니다. 물론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저희 질문에 대답은 하지만, 이건 '필요'에 의한 소통이지 마음을 나누는 '교감'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학교에서도 같은 반 친구들이 살뜰히 챙겨주고 계속 말을 걸어주지만, 제 아들은 '마이웨이'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이나 친구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거든요. 심지어 엄마 아빠한테도 관심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꾸준히 말을 걸어주고 챙겨주는 친구들이 참 고맙습니다.

​1년 동안의 학교생활은... 담임 선생님과 특교 선생님의 피드백을 자세히는 못 듣지만, 특별히 사고를 치거나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은 없다고 합니다. 대신 선생님 교탁 옆에 책상을 두고 수업 대신 혼자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있다 하더라고요. 한 번은 와이프가 찍어온 빈 교실 사진을 봤는데, 교탁 옆에 덩그러니 놓인 아들 책상을 보니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뭐, 지금은 그래도 다른 친구들 방해하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학교에 잘 적응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회성은 결여되었다고는 하나, 잔머리랑 눈치는 빨라서 자기가 하는 짓이 혼날 만한 행동이면 눈치 보며 하는 게 참 웃깁니다. 몰래 태블릿 하다 걸리면 후다닥 숨기고 안 한 척한다거나, 간식을 숨겨뒀다 몰래 먹는 그런 행동들 말이죠. 수업 시간에도 돌아다니고 싶겠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눈치는 있는 모양입니다.

​8살이지만 하는 짓은 3~4살 아이 같은데,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눈치 빠른 아기 같은 모습을 하니 더 귀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1학년이 끝나고 이제 곧 2학년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고민은 커져만 갑니다.

​'우리 부부가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게 맞을까? 다른 집은 이것저것 다 하는데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래서 나중에 아이가 독립하고 혼자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이죠. 다른 부모님들도 비슷하시겠지만, 아이의 특성이 있다 보니 걱정이 조금 더 큰 건 어쩔 수 없네요. 어떤 일을 해도 좋으니 그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입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 특히 와이프에게는 큰 꿈이 하나 있습니다. 아들이 아이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입니다. 누군가에겐 '개풀 뜯어먹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내의 일관된 꿈이었습니다. 꾸준히 아이돌과 배우 덕질을 해온 아내는, 아들이 인기 연예인이 되면 조용한 곳에 카페를 열고 팬들과 소통하며 장사하고 싶다고 하네요.

​사실 아내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일반인도 바늘구멍 통과하기 어렵다는 연예인 길을 자폐아가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겠죠. 게다가 저희 아이는 외모도 평범하고 노래나 춤, 랩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부부는 이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만에 하나'라는 법도 있잖아요? 저도 와이프의 그 꿈을 응원합니다. 아이의 상황에 체념하고 모든 걸 내려놓기보다는, 저런 반짝이는 꿈이라도 꾸며 아이의 미래를 응원하는 아내가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자라든 항상 반짝일 아이를 저도 늘 응원합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저희 아이가 데뷔를 한다면, 이곳에 꼭 자랑글을 쓸 수 있도록 잘 키워보겠습니다.

2025년 힘든 한 해도 저물어 갑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께 평안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 빌겠습니다.



2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907 일상/생각페미니즘은 강한 이론이 될 수 있는가 2 알료사 25/12/18 229 6
    15905 일상/생각무좀연고에 관한 신기한 사실 4 홍마덕선생 25/12/18 347 3
    15904 일상/생각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더 반짝일 한아이의 1학년 생존기 5 쉬군 25/12/18 286 25
    15901 일상/생각두번째 확장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3 큐리스 25/12/16 374 5
    15899 일상/생각PDF TalkTalk 기능 업글 했어요.^^ 제 몸무게 정도?? 4 큐리스 25/12/16 349 2
    15896 일상/생각불행에도 기쁨이, 먹구름에도 은색 빛이 골든햄스 25/12/16 335 13
    15893 일상/생각 크롬 확장 프로그램이 승인이 났습니다. ㅎㅎ 16 큐리스 25/12/12 1011 32
    15889 일상/생각[뻘글] 철학자 존 설의 중국어방 문제와 LLM 은 얼마나 다를까? 13 레이미드 25/12/11 732 1
    15886 일상/생각뭔가 도전하는 삶은 즐겁습니다. 4 큐리스 25/12/09 786 11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1292 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848 5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865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793 0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248 18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854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789 7
    15844 일상/생각추위 속의 수요일 골든햄스 25/11/12 630 5
    15843 일상/생각내가 크던 때와, 내 아이가 크기 시작한 때의 이야기 9 Klopp 25/11/12 907 12
    15835 일상/생각집을 샀습니다. 8 절름발이이리 25/11/08 1142 13
    15829 일상/생각마음이 짠합니다. 4 큐리스 25/11/07 898 5
    15827 일상/생각짧은 이직 기간들에 대한 소회 27 kaestro 25/11/06 1199 5
    15816 일상/생각요즘 단상과 경주 APEC 4 김비버 25/10/30 1155 13
    15815 일상/생각3번째의 휴직 기간을 시작하며 2 kaestro 25/10/30 1051 6
    15810 일상/생각저는 바보 입니다... 4 이십일세기생명체 25/10/29 935 8
    15808 일상/생각회사 업무로 이혼할뻔 했습니다. ㅎㅎ 3 큐리스 25/10/28 1468 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