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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28 18:13:06
Name   Raute
Subject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서 떠올리는 잡상


존 키건의 2차대전사는 정말 무난한 입문서입니다. 요새는 통 덕질을 안해서 모르겠는데, 과거에는 커뮤니티에서 저자를 두고 키건좌라고 부르기도 했었죠. 번역에 대해서 말이 많긴 한데 읽을 때는 그냥 쭉쭉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책은 저에게 첫 연애를 물어다준 책이기도 한데... 이 책을 처음 샀을 때는 가방에 넣어놓고 어디에서든 짬만 나면 읽어댔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900페이지짜리 책을 그렇게 들고 다녔던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때는 그랬습니다. 학원에서 덩치 큰 남자애가 쉬는 시간마다 고개를 파묻고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게 퍽 신기했던지 같은 반 여자애가 뭔 책을 읽느냐고 묻더군요. 그냥 이런 책이라고 제목 보여주고 계속 읽었죠. 그리고 얼마 안 가 학원을 관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학교에 같은 학원을 다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딱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우연히 학교 안에서 마주쳤을 때 그 친구가 이러더군요. 'XXX 기억 나냐, 걔가 네가 보던 무슨 두꺼운 책 다 읽었는데 재밌었다고 다른 책 또 추천해달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여자애 번호 있냐고 물어본 다음 연락했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만나고 연애하고 뭐 그랬던 거죠. 돌이켜보면 이 책을 재밌게 읽었으니 책 추천해달라는 건 그냥 핑계였을 겁니다. 딱히 역사를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싫어하는 애였고, 당시에는 저도 태평양 전쟁 챕터가 하도 지겨워서 때려쳤었거든요.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것도 그 친구였으니, 아마 연락하고 싶어서 뭐라도 껀수를 만들었던 게 아니었나 싶네요. 뭐 연애는 수 년간 지지고 볶다가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만 아무튼 아련한 기억이네요.




남들은 맨큐의 경제학으로 입문한다는데 저는 크루그먼의 책으로 경제학을 처음 접했습니다. 수능 보기 반 년쯤 전에 사탐 공부하는 게 너무 싫어서 흥미있는 과목 없나 싶어서 이것저것 기웃거렸고, 경제로 갈아탔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봤기 때문에 학교에서 경제란 걸 배워본 적이 없다는 거였죠. 그리하여 이런저런 책을 보다가 고른 게 이 크루그먼이었습니다. 까놓고 고등학교 수능 준비하는데 있어서 대학 교수가 쓴 교재가 필요할리가 없죠. 하물며 국민교재처럼 쓰이던 맨큐를 냅두고 당시만 해도 뉴스에서나 가끔 언급되는 크루그먼의 책을 누가 사보겠어요. 아마 제 짧은 인생 동안 있었던 수많은 허세 중 가장 강렬한 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요, 저 스노브입니다 ㅠㅠ 그렇다고 딱히 이 책을 열심히 본 것도 아닌 게 연습 문제 같은 거 머리 아프다고 거의 풀지도 않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페이지를 읽기만 했습니다. 한마디로 공부 안하고 책만 읽은 거죠. 다행히도 고등학교 경제는 대학교 경제학처럼 복잡한 계산이나 수식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인 수준에서 판단하고 풀기만 해도 되는 문제가 많았고, 찍었던 문제들이 죄다 정답이었던지라 1등급에 1문제 모자란 2등급을 받았습니다. 만점을 받건 빵점을 받건 이 과목 하나로 제 인생이 바뀌진 않았겠지만 아무튼 허세 부리고도 용케 망신은 면한 거죠.




제가 접한 최초의 RTS는 워크래프트1이었고, 가장 재밌게 즐겼던 건 워크래프트2로 기억합니다만 저에게 유독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게임이 있었으니, 하나는 듄2고 다른 하나는 KKND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듄2는 참 많이도 했었는데, 나이도 어렸고 영 게임에 소질이 없어서 엔딩은 커녕 중간 단계도 못 넘고 맨날 눈물만 흘렸었죠. 나중에 엠페러 배틀 포 듄은 엔딩 봤습니다만 듄2는 끝내 엔딩을 못 봤어요. 지금 다시 하자니 귀찮고... 어쨌든 그 기억 때문에 남들에게는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이 최고의 SF겠지만 저에게는 듄이 최고의 SF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교보문고를 갔는데 듄 시리즈가 쫙~ 펼쳐져 있는 겁니다. 뒤도 안 돌아보고 1부 4권을 다 샀습니다. 그리고 1권 보고 봉인했고, 지금도 제 책장에 꽂힌 채 먼지를 흡수하고 있습니다. 재미가 없던 건 아닌데 뭐랄까, 제가 상상하던 그런 호쾌한 활극이 아니었어요.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네요...




전 김용 소설을 '김용군협전'이란 게임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의천도룡기 외전'으로 알려진 게임이죠. 알고 보니 원작 소설들이 있다길래 꼬꼬마 주제에 나름 열심히 구했는데, 절판된지 오래였고 근처에 헌책방 같은 것도 없어서 결국 온라인에 돌아다니던 해적판 텍본으로 김용월드를 접했죠(굳이 따지면 그중 사조삼부곡이지만). 3부작 중 가장 좋아했던 게 신조협려인데, 양과와 소용녀의 애절한, 금단의 사랑으로 유명합니다. 근데 전 양과는 좋은데 소용녀는 싫었어요(...) 어쩌면 의천도룡기 외전의 그 못생긴 일러스트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양과한테 바람맞은 꾸냥들이 더 매력적인 걸 어떡해요. 곽부는 논외로 합시다 2000년대 중반에 김영사에서 판권 따다가 새로 번역을 했고, 이게 개정판본이기 때문에 내용이 좀 다르거든요. 근데 이걸로 봐도 소용녀는 별로였어요. 유역비가 나온 걸로 유명한 드라마판 소용녀도 별로였고요. 그러고 보니 저에게 최고의 히로인은 의천도룡기의 조민인데, 성격 드럽고 사고 많이 치고 악녀 기질 있는 여왕님 타입은 완전 싫어하는데 황용 부들부들 이상하게 조민은 좋아요 항가항가 영화에서도 구숙정보다는 장민이 최고라능! 개정판에서는 조민이 메인히로인이란 말이 있던데 이거 언제 사지...




아마 제가 갖고 있는 책 중 단권으로는 가장 비싸지 않을까 싶네요. 7만원이 넘으니까... 군인들의 복장과 장비들을 삽화로 그려놓은 책인데 Osprey가 이런 책들로 참 유명하죠. 예전에는 원서 구입하는 방법도 잘 몰랐고, 이따금 인터넷에 올라오는 삽화들을 보면서 우와앙... 머시썽... 같은 반응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나온다는 소식에 망설이지 않고 질렀는데... 막상 사고 나니까 잘 안 보게 되더군요. 이미 인터넷으로 본 것도 제법 있었거든요 하하하 디자인도 좀 구리구리하고 하드커버라서 누가 보면 한 3-40년 전에 나온 브리태니커인 줄 알겁니다. 지금도 열심히 제 책장에서 먼지를 흡입하고 있는데 문득 옛날에 역덕질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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