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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1/18 04:06:26
Name   양주오
Subject   축구야 안녕
1997년의 6학년 2학기.

운동장은 딱 2면 있었다. 그냥 운동장 그리고 약간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정문 곁에 주차장을 겸하는 작은 운동장이 있었다.
5학년쯤은 돼야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볼을 찰 수 있었다. 뭐 저학년 학생들이 공 가지고 노는 게 축구나 되나 동네축구조차 못 되는 공놀이지.

아주 오래 전 축구를 주제로 한 사진 콜라주를 본 적이 있었다. 중남미로 보이는 바닷가에서 비가 내리시고 있음에도 우산을 듣고 축구하는 소년들. 아마도 중동 어디쯤이려나 탱크의 기다란 포신을 사이에 두고 축구와 족구 그 사이에 공을 차던 소년들. 운동장 하나에 공 너댓개가 오곡선을 그리고 그걸 쫓아 우르르 몰려가는 소년 중에 한명은 바로 그 시절의 초등학생-나였다.

내 생애 그렇게 시크한 적은 그때가 유일했다. 2반이랑 다투는 뽈에만 쫓아가면 됐다. 다른 공이 오면 블랑코 동양축구 우롱하듯 호나우딩요가 일부러 공 흘리듯 거들떠도 안 봤다. 그때 나는 그렇게 멋있었다. 정말 공부도 몰랐고, 축구밖에 몰랐다.

솔직히 까놓자면, 나는 점심시간의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소년은 아니었다. 진로방해와 압박수비를 아직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운동신경이 젬병이었고, 그때는 내성적인 건 죄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더더욱 숫기도 없었다. 그 영광의 시간에 끼는 행운은 거의 없었다.

그 아름다운 공간을 동경했던 탓일까 아니면 학교가 집에서 너무 가까웠던 덕일까 나는 학교고 파하고도 한두시간이 지나서야 그 흙빛 그라운드를 누볐다. 동네친구도 못되는 진짜 햇병아리 땅꼬마에서부터 교복 입은 동네형들까지 그냥 축구공 하나만 보고 우리는 어울렸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지?

하 시발 축구면 되잖아 가르쳐주는 형은 없어도, 용돈이 부족한 형님들이 아예 없었던 것도, 눈치는 없어도 줏대는 있게 야구방망이 들고 오던 또래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무렴 무슨 상관이람. 하 그냥 축구면 되잖아요.

시절이 달랐던 거지 내가 변한 건지 그건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한은 생명에서 오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여한은 삶의 찌꺼기이기 때문에 치유될 것이매 회한이란 감정은 결국 그 순간까지의 모든 과거를 공으로 돌리는 자기부정이며, 잘못 살아왔다는 후회로만 남기 마련이다. 받아들이기에 영 껄쩍지근하지만 여기 지금 낙서를 하는 나도 그렇겠다.

다시, '97년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팀은 이듬해 프랑스에서 열릴 월드컵을 참가하기 위해서 아시아 최종 예선을 치렀다. 도쿄대첩에 해트트릭에 참 우쭐우쭐 통쾌했다. 거 간판 올라가다 한두번 미끄덩하는 거 뭐 어떠한가. 한국 축구가 짱이라고. 거 한번 일본한테 안방에서 지는 거 뭐 어때. 아 그놈아 귀화 외국인이잖아. 우리가 제일 쎄.

지금도 그렇지만 언제나 미디어는 죽일 놈이다. 나는 참으로 순수하게도 깨끗하게 맑게 세뇌당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는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올 법한 초딩 스포츠광이었다. 코비가 신인으로 에디존스였나 포지션 경쟁하는 걸 지켜보며 베켓을 중3 때까지 정기구독도 아닌데 매달 사서 봤으며, 아버님이 스포츠일간지를 매일 받아보시지도 않았는데, 스크랩북 한가득 박찬호의 모든 기사를 수집했었으며.. 더 나열할 필요는 없겠고, 한국에 베르캄프에 버금가는 스트라이커가 있다고 확신한 게 신문 탓이었다는 점만 언급한 뒤 넘어가고 싶다.

어쩌면 참으로 절묘하다. 졸업과 입학을 하는 그해 겨우내 우리집은 이사를 했는데, 어머님은 나의 게으름이 재천이라 간파하셨던 걸까 또 학교 코앞의 빌라에서 등교를 하게 됐다. 뭐 그래도 난 지각을 매일 했다.

이거 뭐 삼국유사도 아니고, 기이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98년 대아이돌시대가 열렸고 무슨 지구 자전하는 소리 들을 수 없는 저 멀리서 ADSL PC방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가 그 크고 아름다운 그림자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소녀? 첫사랑? 얼어죽을 내 첫사랑은 감연된 테란 사라 캐리건이다!

처음 적었던 초등학교 5, 6학년(4학년 때까지 국민학생이었습니다.) 때 축구를 실컷 한 것도 그런 분위기에 전염됐던 것 같다. 그래 그때 내가 유진에 대한 관심마저도 급속도로 식었던 것은 다가오는 월드컵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수학여행과 소풍만 있으면 아쉽잖아. 너희 신입생들을 위해 준비했다! 옛다! 야영! 그건 뭐 안 봐도 딱 봐도 5월말이었을 거다.

미디어란 펜도 권력인 것처럼 회초리로 상징되는 이른바 국민형성교육이란 공교육-아니 모든 교육도 가축화를 위한 훈육의 과정이라 나는 지금도 혐오감 없이 상기하지 못한다. 차마 거역할 수 없거나, 반골의 기질을 뽐내다간 부모님부터 날 사랑으로 다스리실 거다. 뭐 내가 예나 지금이나 그때도 용기가 없었던 걸 지도, 아뭏든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곰곰히 생각해봤는데도 자신이 없는데, 출발하는 당일이었는지 그 이튿날이었던지 하여간 그때 프랑스 월드컵이 개막했다. 게다가 첫경기는 전대회 우승국 브라질과 스코틀랜드였다. 진짜 이 순간 생각해도 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나라가 혹 축구세계에 있다면 그건 브라질밖에 없는 것 같다. 쌈바~ 쌈바!

요새는 수도 이름 맞추기 같은 것에 영 자신 없지만 어릴 적에 나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사회과부도만 맨날 봤다. 아니면 만화 스무권짜리 세계의 역사 이런 걸 보며 히틀러 수준에서 아득하게 넘어간 채 이름만 남기고 죽어간 수많은 이들-영웅 내지 개새끼들을 알게 됐다. 각설하고, 스코틀랜드란 나라는 이런 해박한 잡학만물박사 초딩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우와! 월드컵 때만 스코틀랜드란 나라가 생기는 거구나. 나는 초딩답게 그렇게 간단하게 영국을 이해하고, 그 간지-멋에 술도 마시지 않고 얼큰하게 취해버렸다. 키야. 직인다 이거죠. 근데 학교에서 야영을 보내주네?

나는 야영을 가지 않았다. 언어화할 수 없는 개념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 일은 없었던 것과 같다. 나는 야영에 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나는 분명히 야영을 가지 않았다.

이윽고 도래하고 말았다. 예선 첫경기 멕시코전! 더 말해 무얼하리? 나라를 잃는데 소년이라고 울지 않으리오. 우롱과 농락을 마취시키기 위한 처방으로 미디어는 또 한번 간단하게 프로파간다를 가공시켰는데, 마침 백태클 원아웃 퇴장이 나타나 또 한번 효도 노릇을 톡톡히 했다.

운이 나빴던 거야, 벌써부터 최면-정신승리를 배워버린 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이용수였나? 전문가들이 패널로 나와서 전망을 하는 방송을 자정이 되도록 눈을 부릅뜨고 신청했다. 금강과 황산벌로 달려가던 백제의 소년들이라고 못 비할까 나는 비장했다. 다음 상대는 말로만 듣던 베르캄프의 네덜란드였다. 언론의 힘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새벽 네시, 한국은 멸망했다.

소년들의 영혼은 모두 말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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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좋아한 지 만 10년이 됐습니다. 다들 똑같은 컷으로 기억하고 계실, 안정환 선수가 골든골을 넣고 반지에 키스를 하는 장면이 한국축구에 대한 제 마지막 영상입니다. 지금 아이돌 가수를 구경하기 위해 초행길로 다소 먼 어딘가에 와있는데, 본의 아니게 밤을 새버리고, 뒤척임 끝에 별안간 낙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씻고 나가봐야 할 시간이 임박해서 마무리가 유예됐습니다. 아니 네덜란드전 이후의 기억은 영 좋지 못한 쓴웃음으로만 기억될 악몽과 같은 현실이라 부러 써제낄 필요가 없기도 하겠습니다.

축구가 야구보다 위대하다고 확신합니다. 단순한 규칙, 두지도 못하면서 비유하는 게 스스롤 자조하게 만들지만, 바둑과 비슷하달까요? 어쩌면 다시 축구에게 안녕하고 싶어지는 마음의 조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포츠는 항상 옳습니다. 모두 즐거운 한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왜정만 지난 참이니, 아직 유효한 인사라고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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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구조
    2002월드컵이 있던 해에 축구하다가 헤딩 중에 눈 바로 위 뼈를 살짝 골절 당했습니다. 병원에 입원 한 채로 안절부절 했지요. 거리 응원 나가야 되는데... 병원에서 이렇게 썩을 수는 없는데... 이러면서. 그게 고3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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