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6/08 07:34:12
Name   뤼야
Subject   남자의 詩, 여자의 詩
고종석의 유명한 책 [모국어의 속살]에 보면 아름다운 여인의 속살처럼 보드랍게 만져지는 모국어의 향연을 펼치는 시집들이 소개되어 있지요. 수많은 시집을 다 훓어보기 어려울 때, 저는 이 책을 참고하여 시집을 고르곤 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두 편의 시는 제가 좋아하는 두 시인의 시입니다. 함성호의 매우 남성다운 목소리와, 최영미의 이지적이고 여성스런 목소리가 이 두 편의 시속에 잘 녹아있지 않나 합니다. 요새 나오는 시집에 실린 시들이 신경증적인 방황을 하는 화자를 등장시켜 알듯 모를듯한 말들로 읇조리는데 비해서 이 두 편의 시에는 두 시인의 고유한 목소리가 잘 간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지러운 뉴스가 많은 시대에 그저 눈 감고, 귀 닫고 사는 저같은 사람은 보탤 말이 없고 한가하게 시나 한 편 읇조리며 살고 있습니다.



56억 7천만 년의 고독

-함성호 시집[56억 7천만 년의 고독] 중에서-

21세기는 우리를, 마약과 동성애와 근친상간과 싸운
바보스러운 세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聖과 俗과 천국과 지옥의 잠 속에서
나는 그대를 추모하지 않는다
당신은 꽃과 비의 정원에서
무엇인가에 불리어가는 듯한 썰물의 흉한 가슴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모든 죽음들에게, 입에서 항문까지
비로소 내장된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
기껏 돌보아 주었더니 몸이 나를 배반한다
바람에 담쟁이덩굴이 온 집을 흔들어놓고
당신은 안개꽃을 먹으세요
나는 장미꽃을 다 먹어치우지요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일 신문에 코를 박고
방금 자신이 떠나온 세상의 풍경들을 읽어내며
간단없이 생을 수군거립니다
권태롭듯이 아버지가 실내 낚시터에서 돌아오지 않고
형은 노래방에서 하루종일 살았습니다
寂寞江山-, 오늘은 비가 징벌의 연대기처럼 내려
萬花方暢의 정원에서 식구들은
내 머리에 자라 있는 무성한 숲을 보고 놀라
시퍼런 낫을 들고 쳤지마는요 나는 늘 시원했습니다
나도 뜨겁거나 차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 입 밖으로 뱉아버리겠습니다
당신의 그 지루한 기다림만큼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 위증의 세계에서
나도 그댈 겁나게 기다립니다
당신은 오래 꽃과 비의 정원에 서계세요
나는 넘치는 술잔을 들고 삼독번뇌의 바람을 기다리지요



이 시의 공간은 매우 복잡한데, 그 복잡성은 이 시를 건축적인 형상으로 만듭니다. 자본주의 세계의 세속적 풍경(지하철, 실내 낚시터, 노래방)과 신화적 문명의 공간(천국, 지옥) , 원죄가 탄생하기전의 유토피아적 공간(만화방창의 정원)이 경계가 불분명한 채 얽혀있지요. 그 어느 공간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나'는 차례로 공간을 거닐거나 관조하면서 '아무 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 위증의 세계에서' 그리고 '당신'은 '꽃과 비의 정원'에서 서로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기다림은 지루하지만 '나'는 그저 넘치는 술잔을 들고 삼독번뇌의 바람을 맞을 뿐이지요.

무의식이나 꿈이 만들어낸 공간과 같은  '나'의 공간은 복잡하게 얽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괴된 자본주의적 공간과 '당신'이 오래 서있는 풍요의 정원이 대비되며 생명의 공간에 귀속되지 못하는 '나'의 오랜 고독을 도드라져 보이게 합니다. 21세기를 굽어보는 듯한 '나'의 선언(바보스러운 세대, 그대를 추모하지 않는다)은 이 시의 강력한 [남성성]을 내포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꽃과 비의 정원'은 반문명의 풍요로움으로 넘쳐나지만 '나'는 결코 그곳에 속하지 못하지요. 그곳은 '나'의 공간이 아닙니다.

함성호는 세계를 자신의 관념으로 재정비하려는 남성적 욕망을 여러 공간과 그것의 복잡한 얽힘으로 형성화하고 대비시키며 그려냅니다. 현실과 신화, 반문명의 서로 다른 공간은 이런 남성적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으로 파괴와 재구축의 순환 속, 남성의 고독한 분투에 대한 언어적/건축적 형상화로 읽힙니다. '뜨겁거나 차지않은 것들'을 거부하는 그는 레디메이드의 세 가지 공간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관념 속에 침잠한채 그 안에서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수렴될 수 없는 세상과 대립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남성적인 시는 찾기가 무척 어렵지요. 제가 매우 좋아하는 시입니다.




돌려다오

-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너를 의식하면서 나는 문장을 꾸미기 시작했다
피 묻은 보도블록이 흑백으로 편집돼 아침밥상에
올랐다고 일기장에 씌어 있다

푸른 하늘은 그냥 푸른게 아니고
진달래는 그냥 붉은게 아니고
풀이 눕는 데도 순서가 있어
강물도 생각하며 흐르고
시를 쓸 때도 힘을 줘서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드려패고

나의 봄은 원래 그런게 아니었다
그렇게 가난한 비유가 아니었다

하늘, 꽃, 바람, 풀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던 구름......

어우러진 봄은 하나의 푸짐한 장난감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마음대로 바라보며 갖고 놀면
어느새 하루가 뚝딱 가버려
배고픈 것도 잊었다
가난은 상처가 되지 않고
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어리고 싱겁던

나의 봄을 돌려다오
원래 내 것이었던
원래 자연이었던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두들겨패서' 만든 '가난한 비유'가 넘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글쟁이는 얼마나 슬픈 존재일까요. 그 역사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관념의 모험, 즉 최종적으로 완벽한 형이상학으로 세상을 재정비하려는 시도는 여성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최영미에 따르면,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너를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행인의 시선을 끌기위해 세워둔 공기인형처럼 중심이 없기에 계속해서 바람에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게 되지요. 결국에 그것은 철저히 관념적이지 않아(못해) 나이브하고 여성적 풍성함을 잃어 생기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최영미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운동보다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이 여성입니다. 이것은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비판은 관념의 세계로 넘어가 하도록 하지요.

여성의 '텅빈 중심'은 보르헤스의 단편에 등장하는 허구의 세상인 틀뢴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습니다. '언어의 모음과 자음들이 존재의 유일무이한 광휘를 찬양하는 데 바쳐지는 그곳'은 분류와 추상이 거부된, 관념의 환원주의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물병속의 물은 단지 물일 뿐이어도 달콤해질 수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최영미는 그것을 '원래 내 것이었던, 원래 자연의 것이었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관념의 언어로 추상되기 이전의 것이며, '4월의 라일락과 6월의 라일락'을 뭉퉁그리는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성의 오리지낼리티는 '계속해서 매혹됨'이며 끝까지 열린 결말이라 읇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머리 아픈 뉴스에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잠시 언어의 숲으로 도망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를 소개한 제 뻘글은 그냥 스킵하셔도 좋습니다. 홍차넷 회원 여러분 메르스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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