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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9/04 07:20:46
Name   호로
Subject   우당탕쿵탕
* 특별한 경험도 아니고, 딱히 느낀 점이나 감상도 없지만 새벽 시간에 멍하니 있다가 떠오른 기억인데 왠지 글로 남기고 싶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날씨가 딱히 춥지 않았으니 봄 혹은 여름이고... 슈퍼스타k4 예선을 하던 당시니까 2012년. 2012년 초중반이겠네요. 시기에 대해서 대강 기억할 수 있는 건 친구가 당시에 슈스케 예선을 참여했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잠원역 근처 대형상가의 맥도날드에서 저와 가수지망생 친구 S, 재수생 친구 J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친구 S는 수줍게 본인의 참가 여부를 저희에게 알렸고, 부끄러우니 주변에 소문내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해왔습니다. 당시의 저희는 스무살이었고, 뭘 몰라도 잘 몰랐을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좀 더 나이 들면 다들 한 자리씩 하고 있을 것 같고, 뭔가의 실패는 사실상 남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너 가수 되면 뭐해줄 거냐.' '윤종신 사인 좀 부탁해.' '성공하면 우리 버리지 마라.' 맥도날드에서 김치국만 푸고 있었죠.

  그 나이대의 저에겐 굉장히 기분 나쁜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디든 제가 앉아 있는 곳이 있으면 근처에 앉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입은 옷 브랜드나 나이, 직업이나 관계 등을 유추했었어요. 중학생 당시 꽂혔던 추리 소설들의 여파와 치료가 덜 된 중2병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튼 저희가 앉아있던 테이블 열의 가장 끝에는 굉장히 수줍어보이는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가 안 쪽에 앉아있으니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플인가, 아님 썸 타고 있나? 안경을 쓰시고 머리를 성의 없게 기르신 남성분은 무난한 무채색 SPA 풀셋으로 후드자켓부터 청바지까지 두르고 계셨고... 제가 두 분을 좀 더 찬찬히 살펴보게 된 계기인 여성분은, 막 상경해 처음 화장을 배운 소녀처럼 화려한 볼터치를 하고 제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연노랑 원피스에 근 10년간 보지 못한 발토시 부츠를 착용하고 계셨습니다. 얼굴 주름이나 쳐짐 정도로 보아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 느껴졌었는데, 그러면서도 수줍게 감자튀김을 케찹에 찍어 먹여주는 것을 보고 참 부러운 커플이구나 생각했었어요.

  주변 사람들을 스캔하고서 친구들과 대책 없는 김치국을 몇 사발 더 푸고 있는데, 뭔가 옛날 느와르 영화에 나올 법한 표정의 남성 두분이 들어섰습니다. 176은 넘고 180이 안되는 게 분명한, 적당히 큰 키의 흰 셔츠와 검정 정장 바지의 두 분. 무섭다... 얘들아, 사발 내려놓고 나가자. 여기 빈자리는 우리 옆 테이블 뿐인데 저 사람들 왠지 무서워... 라고 말하던 차였습니다.

  우당탕쿵탕!

  왠 안경이 저희 테이블의 트레이로 날아왔습니다. 돌아보니 흰 셔츠의 한 분이 커플의 남성분을 후려치고 있더군요. 속도를 봐서는 기습 당했음이 분명한데, 커플 남자분이 당황하지 않고 반격을 하는 것을 보고 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가수지망생 S가 사이로 들어가봤으나 바로 튕겨나오고, 고교 중반까지 체대 준비반을 다녔던 S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것을 보고 당황한 저희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습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보니,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건. 중고교 때 학생들 많이 싸우잖아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똑같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데 뭐가 그렇게 생경하게 느껴졌었는지... 살의? 그런 추상적인 단어로 밖에 표현이 안 되네요. 셔츠 입은 남성이 휘두르는 주먹과 눈빛에는 정말 살의가 실려 있었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었던 남성이 밀리기 시작하자 바로 근처에서 직관하고 있던 여성분이 "오빠 이러지 마", 이러고 셔츠에게 안겼습니다. 잠깐 멈춰서 대화하는 셔츠의 목을 커플 남자분이 뒤에서 조르더군요.

  음... 이런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손가락을 부러져라 깨무는 것. 비명을 지르며 조르던 손을 풀자 그대로 파운딩을 하고 얼굴을 수차례 때립니다. 몇번 주먹이 왕복하자 얼굴형이 변하기 시작했고, 땅바닥엔 물에 적신 걸레를 쥐어짜듯이 피가 줄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나다니요. 핏방울이 튀기기 시작하면서 정신을 차린 남자들이 말려보려고 하니 분노로 흔들거리는 목소리가 몇마디 말을 던졌어요.

  "너희 같으면 안 그러겠냐? 마누라가 다른 남자랑 놀아나는 거 보고도 꼭지가 안 돌겠냐고 시X...!" 갑자기 남성분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일제히 팔짱을 낍니다. 와중에 여성분은 "오빠 우리 신고는 안 했잖아 왜 이래" 이딴 소리나 하고 있고... 아예 목을 조르기 시작하니 셔츠 입은 남성의 일행이 근엄한 목소리로 꾸짖더군요. "그만 하면 다 팼어. 그 쯤 해. 죽이려고 온 건 아니잖아 오늘." 어떤 여성분의 "좀 말려봐요, 저러다 진짜 죽겠어!"란 일갈도 일행 분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묻혔습니다.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경찰이 올 때까지 조르던 손을 푼 셔츠의 그 분은 주먹질을 계속했고, 그 남성이 경찰에 인계되는 동안 안경을 돌려 받으며 고맙다고 고개 숙이는 남성분의 완전히 무너져버린 광대와 콧대를 보고 우리는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했나하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일이 끝나자 우루루 몰려나와 땅바닥에 넘치는 핏물을 닦는 알바들과, 죄송하다며 스낵랩을 나눠주시던 매니저님도 떠오르네요. 맥도날드를 가득 채운 관중들은 굉장히 무력했고... 지급 받은 스낵랩을 깔끔하게 해치웠던 사람은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쓰다보니 별로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군요. 좋은 일요일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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