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7/02 07:50:52
Name   뤼야
Subject   사랑 - 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의 한 구절로 생각해보기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번째 되던 날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중에서 -

왜 일까요? 하룻밤만 더하면 그에게 내려진 일종의 '집행'은 끝나는 셈인데 선비는 왜 떠나버렸을까요?
아흔아홉번째 되던날 의자를 팔에 끼고 떠난 선비를 보며 기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연인들간의 메세지는 대체로 투명하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롤랑 바르트가 인용한 중국의 옛이야기는 이러한 '연인들의 신호의 불투명함'을 극단적으로 부풀려 만든 이야기겠지요. 말하자면 기녀가 선비에게 전한 '기다리라'는 신호의 내용은 선비의 입장에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백일을 향해 가는 시간동안 기녀의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선비가 전달받은 사랑의 신호는 서서히 붕괴해갔을테지요. 선비는 아마 '나는 누구? 여긴 어디?'하며 회의했을 것입니다.

기녀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볼까요? 처음에 기녀는 선비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비를 사랑하게 되려면 그녀에게는 현실의 긴장에서 풀려나(말하자면 선비는 기녀가 생각했던 이상형은 아니었겠죠.) 둘에게 내려진 사랑의 운명을 낭만화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사랑에 빠진 순간 여자는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화엄론적 명제에 묶이고 마는데, 여자에게 이러한 환몽幻夢의 경지는 거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홍차넷이 생기기전에 피지알의 질문게시판에 올라오는 수많은 연애에 관한 질문 중 대다수는 '이 여자의 신호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말것인가?'였습니다. 중국의 옛이야기에 나오는 선비마냥 남자는 여자가 보낸 신호를 어려워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여자인 제가 보아도 난해한 신호가 많았으니까요. 상대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내려진 선고없는 형벌을 견뎌야 하는지, 아니면 알쏭달쏭한 신호를 밀쳐내야 하는지에 대해 항상 여러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애담을 듣는 것은 즐겁습니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겐 타인의 연애담을 통해 자신만의 판타지를 만들기도 하고, 실패한 연애담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겠죠. 또 이제 연애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기혼자(과연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나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들은 짜릿했던 지난 추억을 회고하는 계기가 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연인과의 관계를 되짚어 볼 수도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좋습니다. '사랑'이야기니까요. 그럼 이 연애의 희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처방합니다. [진실과 거짓, 성공과 실패를 떠나 나는 그냥 받아들이며 긍정한다. 모든 궁극성으로부터 물러나 우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중략) 모험에 부딪혀서도 (내게 우연히 다가온) 승리자도 패배자도 아닌 채로 빠져나온다. 나는 비극적이다.] 다른게 아니고, 그것이 사랑의 문제라면 우리는 언제나 비극적이어야하지 않을까요?

출근은 언제 하려고 이렇고 있는 걸까요? 저야말로 비극적입니다.
뻘글과 함께 좋은 하루 되세요~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23 1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286 2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215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8 트린 25/12/03 455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565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953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47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506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39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43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698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903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689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26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49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71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57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14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74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14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46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70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76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12 2
    15854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 육회한분석가 25/11/17 562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