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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07 17:35:56
Name   유리소년
Subject   해외 게임개발 프로젝트 참여하며 써본 이야기
저는 초짜 머신러닝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데 원래 대학시절 꿈은 게임개발자였어요.
취업준비생 시절에 한국 게임회사들이 내놓는 게임의 퀄리티에 절망하고 길을 틀었지만 (내 인생에서 최고 잘한 결정!), 게임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 퇴근 후 남는 시간에 외국의 게임 개발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짬짬이 참가하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지요.

돈 한 푼도 되지 않는 무료게임이지만 깃허브 누적 커밋 수가 5만개를 넘어가는 나름대로 매니아층이 두터운 게임인데, 참가하다 보면 해외 게임개발자들의 일하는 방식을 지켜볼 수 있어서 참 흥미로운데요.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제가 본 외국 게임개발자들은 게임 내 어떤 요소의 "본질"에 대해 캐치하는 속도가 놀랄만큼 빠르고, 불필요한 요소를 쳐내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새로운 요소로 제안한 거들이 개발자 토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reject를 먹기도 하고 구현이 되기도 했는데요. 거절 근거를 보면 다들 납득할만하더라구요.

ex 1)
나 : 둔기와 검의 특성이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둔기에 "일정 확률로 적의 방어력을 절반 무시" 라는 특성을 넣는 게 어떨까?
A : 일정 확률로 방어력 무시라는 건 그냥 데미지를 올리는 것과 본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어. 한마디로 쓰잘데없는 특성이고, 유저들에게 혼란만 줄 뿐이지.
나 : 음, 그러면 검에 "출혈 효과"를 넣는 건 어때? 날붙이니까, 맞으면 체력이 계속 깎이는거지.
B : 우리는 이미 "독이 발린 무기"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맞으면 체력이 계속 깎이는" 효과는 이미 존재하는 효과인데, 이름만 바뀌고 본질적으로 똑같은 효과를 왜 추가해야 하지?
나 : 그러네. 그러면 둔기에 "둔화 효과" 특성을 넣자. 오금을 맞으면 다리가 저려서 이동 속도가 느려지는거지.
C : 이봐, 이미 "냉기 속성 무기"에 이동속도/행동속도 감소 효과가 달려있잖아!
A : 좋은 생각이 났다. 검에 "회피 반격" 효과를 넣자. 검은 회피시에 연결동작으로 휘두르기가 쉬운 무기이니까, 일정 확률로 자동 카운터가 나가는거지.
B : 그건 나쁘지 않군.

ex 2)
A : 몬스터들 중 "그리즐리 곰"와 "북극곰" 둘 중 하나는 없애버리는 게 어때? 이 두 몬스터들은 "근접공격만 하고, 보통 속도이며, 피해를 많이 입으면 흉폭해진다" 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몬스터잖아. 단지 북극곰이 다른 도트, 약간 더 높은 능력치, 경험치를 갖고 있을 뿐이지.
나 : 그거 좋다.
B : 그러네. 왜 아직까지도 누군가 하나를 없애버리지 않았지? 아니, 애초에 저 두 몬스터를 처음에 동시에 만든 놈이 누구야?
A : 누가 git blame 쳐봐.
C : 멸종시키는 건 그리즐리가 좋겠다. 더 약한 걸 없애는게 난이도가 높아져서 재밌으니까. RIP 그리즐리!


이런 과정들로 배우면서 저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선이 굉장히 많이 바뀌게 되었는데 지금 국산 온라인 게임들을 하다보면 "쳐내지 않은 수많은 잔가지"의 요소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예를들어 메X플스토리같은 국내 RPG 게임의 경우 "왔다갔다하면서, 몸통박치기만 하는데, 도트와 능력치, 경험치만 다른 수많은 몬스터"들이 몇백 종류씩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캐릭터를 키우는 것이 "똑같은 키를 반복해서 누르기만 하는 작업"이 되고 재미없어지죠. 국내 게임들 보면 이런 요소들에 대해 많이 성찰해보는 개발자는 상당히 드물다고 느껴요.

와우같은 게임이 한국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한국 게임개발자들이 저런 생각을 할 줄 몰라서인지, 아니면 한국 게임회사의 구조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비전문가가 받아들여 의사결정하는 비극적인 구조여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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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스트
    그게 꼭 게임개발의 분야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게 슬프죠.
    유리소년
    저 프로젝트도 무료게임이니까 그렇지 겜알못 투자자가 의사결정하는 구조였으면 저럴 수 없었겠죠 ㅎㅎ
    October
    흐흐 슬프게도 예시로 드신 와우도 오래 서비스하면서 리소스 늘여쓰는게 많아지곤 있죠. (트럴이라던가 눈트롤이라던가 숲트럴이라던가 더러운 트럴이라던가)
    짧은 식견이나마 말해보자면 한국에서 비슷한 능력치의/혹은 비슷한 컨셉의 스킬이나 몬스터를 제한없이 계속 쏟아넣는건 하드한 게임 플레이 환경도 한 몫을 한다고 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요구하는 유져층이 더 많은거죠.

    그렇다고 리소스 재탕이 모범답안으로 나와있는건 참 우울합니다만.. (뿔달면 다른거! 빨간색이면 3배 빠른거!)
    유리소년
    사실 팔레트 스왑이라고 불리는 몬스터 색깔 바꾸기는 고전게임의 전통이었죠.
    손나은
    엇... 죄송한데 그런건 어떻게 참여하나요??
    유리소년
    pull request 몇개 신청해서 반영하니까 개발팀으로 넣어주더군요.
    해외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가장 제대로 된 협업 개발을 하는 문화가 잡혀있는 것 같아요.
    반면 국내에서는 헬조선이라 그런지 그런식으로 일하지 않아서, 대부분이 그렇게 일하는 방법을 모르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불타는밀밭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조별과제화....
    사실 저도 그렇게 일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제가 잘 해보지는 못했거든요.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조별과제화는 느껴보지 못했지만,
    학부에서 한국에나 있을 법한 조별과제화를 느끼고 나서는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립서비스하느라 바빠서, 실제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했었죠.
    아직 연차가 별로 안되서, 감히 말하기 그렇지만,

    현재까지 제가 느낀 바로는
    보통 대형 게임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각 팀별로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려고 합니다.
    게임개발쪽으로 오시는 대부분의 분들은 업계의 열악함을 알고서도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이니까요.
    (보통 팀원만 60명이 넘어가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이 정도 사이즈의 프로젝트면 투자자가 의사 결정은 할래야 할수 없게 됩니다. 일정을 재촉하긴 하죠...)

    그래서 보통 실제 리더쉽과, 하부 조직과의 목적/시선이 정렬(Alig... 더 보기
    아직 연차가 별로 안되서, 감히 말하기 그렇지만,

    현재까지 제가 느낀 바로는
    보통 대형 게임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각 팀별로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만드려고 합니다.
    게임개발쪽으로 오시는 대부분의 분들은 업계의 열악함을 알고서도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이니까요.
    (보통 팀원만 60명이 넘어가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이 정도 사이즈의 프로젝트면 투자자가 의사 결정은 할래야 할수 없게 됩니다. 일정을 재촉하긴 하죠...)

    그래서 보통 실제 리더쉽과, 하부 조직과의 목적/시선이 정렬(Align)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경영진과 리더쉽(PD 및 디렉터들), 조직원들간에 지금 게임을 바라보는 시야가 상당히 엇나가게 되는 거죠.

    제대로 된 조직구조 및 Mass Production단계가 제대로 구축 되지 않으면, 이미 결정하고 픽스되어야 할 것이 고정되지 않은 채 프로젝트가 진행되게 됩니다.
    그러한 주관이 없다면, 또 중간에 거치는 수많은 테스트 (CBT만이 테스트가 아닙니다... 실제로 FGT, FFT등 꽤나 많은 내부 프로토타입 테스트등이 이뤄지곤 하죠. 그리고 그 테스트의 주요 대상은 기존 장르를 재밌게 플레이했던 인원 중에 뽑히게 됩니다. 만약 만드는 게임이 MMORPG라면 와우 만렙, 아이온 랭커 등등의 이력을 가지신 분들이 옵니다.) 중에, 그동안 개발했던 많은게 뒤집히게 됩니다.
    [실제 플레이하는 고객님들과 개발자의 시야는 당연히 현저하게 다르니까요]

    그렇게 결정 사항이 여러번 뒤집히게 되면서, 만든 것을 버리고 다시 만드는 과정을 꽤나 많이 거치게 되면서,
    [처음에 만드려던 게임은, 전혀 다른 게임으로 변해갑니다.]

    이것 저것 다른 시스템이 붙고, 아트의 방향성이 변해가며, 개발하던 사람들도 많이 바뀌게 되죠.
    또 자기가 제안했던 것들이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면서, 보통 그 개발자는 세경우로 변해갑니다.
    한없이 패시브해지거나, 매사에 짜증을 내면서 싸우거나, 프로젝트에서 탈출하죠.

    이 와중에 저 역시 길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CoD 모워3 엔딩을 보면서, 언젠간 저도 저사람들 처럼 당당하게 저 엔딩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 있길 원했고.
    또, 제가 주체가 되서 저런 게임을 만들고 싶어했었지요.

    프로젝트에서 친해졌던 주변사람들이 힘들어하면서, 혹은 발전을 위해서 하나, 둘 퇴사하는 모습을 볼때마다,
    저는 여기서 뭘하고 있나, 또 뭘 위해서 이걸 하고 있나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몰라서 그렇게 만드는건 아니고..

    돈 + 시간 + 기타 이슈들이 있긴 한데..
    서양게임 개발사만 해도 위에 말씀한 형태 많이 합니다. -.-;;

    저만 해도 그래봤었기 때문에..


    패키지라면 그런 요소를 많이 줄일수 있겠지만 온라인은 그런게 더 심해지는게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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