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3/07 23:07:17
Name   기아트윈스
Subject   아들이 더 좋다는 친구
대만인 친구가 하나 있어요. 남잔데, 와이프랑 같이 유학왔대요. 와이프는 임신중이었고, 이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자연스럽게 `아이 성별은 아니`라고 물어봤지요. 그러자 그 친구가 슬슬 눈치를 보더니,

["왜 그 있잖아. 너도 아시안이니 그렇겠지만, 아시아 사람들은 아직 아들을 더 좋아하잖아. 그치? 난 아들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아들이어서 좋았어."]

영어도 아주 유창하고, 배울 만큼 배워서, 그러니까, `서구화`가 충분하다 못해 지나치게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은 그 친구에게서 남아를 선호한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던 저는 조금 당황했어요. 말하는 뽐새를 보아하니 이런 이야기를 저 (아시안) 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 (영국인)에게 말했다간 생매장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을 가진 듯했어요. 말하자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사상을 문화적으로 동질할 것으로 추정되는 친구에게만 조심스럽게 털어 놓는 느낌.

전 거기에 동조해주자니 제 생각과 맞지 않고 거부하자니 그 친구가 상처 받을 까봐 조심스럽게

"어 글쎄, 잘 모르겠어. 한국에선 그냥 아들이나 딸이나... 선호도에 큰 차이가 없어."

라고 말했지요.

그 친구는 약간 풀이 죽은 듯했어요. 제가 낄낄 웃으며 '맞아맞아! 사실 까놓고 말은 못해도 나도 아들이 더 좋아'라고 말해줄 거라고 기대했었나봐요.

화제를 돌려 이런저런 이야기들, 논문은 잘 되가니 같은 박사생들이 할 법한 그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은 어느덧 다섯시가 됐고, 그 친구는 '이제 가봐야겠어'하며 자리를 떴지요.

"저녁 먹기엔 좀 이르지 않니?" 하고 묻자

["무슨 말이야? 밥해야 하잖아."]하더군요.

...?

"아! 와이프가 임신 중이라 네가 밥을 해주는구나. 멋지다." 라고 칭찬해줬는데

["응? 아냐아냐. 밥은 당연히 남자가 하는 거 아냐? 결혼한 이후로 밥 빨래 설거지는 다 내가 했는데?"] 라는 거예요.

이번엔 역으로 그 친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제가 조금 난처해졌어요. 방금 전까진 제가 킹갓제너럴 글로벌 스탠다드 페미니스트 리버럴 포지션에 있었는데 이젠 마치 가부장 수꼴러가 된 느낌. 껄껄.

저는 그친구에게 진심을 담아 "그래, 네가 옳아. 네 아들도 나중에 자라서 너처럼 훌륭한 남편이 되었으면 해."라고 축복해줬지요.

시간이 흘러 그가 바라던대로 건강한 아들이 태어났고, 산모의 몸조리를 위해 그 친구의 장인/장모가 모두 영국으로 날아왔어요. 매일 5인분 식사를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장인-사위 콤비를 보니 어쩐지 마누라 품 속에서 사는 제가 부끄러워졌어요.

페미니즘이란 게 문화권을 초월해서 단순하고 보편적인 전선을 형성하고있을 거라고 막연히 상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모든 사안이 문화적으로 매개되고, 그래서 몹시 복잡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p.s. 그 친구 요리를 한 번 먹어봤는데 실력이 대단하더라구요. 이제 바라던대로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났으니 요리 비기도 꼭 전수해주길.



1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718 7
    15066 도서/문학린치핀 - GPT 세계에서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를 벗어나려면 4 + kaestro 24/11/24 143 0
    15065 경제chat-gpt를 사용하여 슈뢰더 총리의 아젠다 2010 연설 번역하기 3 와짱 24/11/24 212 0
    15064 문화/예술아케인 시즌2 리뷰 - 스포 다량 kaestro 24/11/23 206 0
    15062 오프모임29일 서울 점심 먹읍시다(마감) 12 나단 24/11/22 580 4
    15061 스포츠[MLB] 2024 AL,NL MVP 수상자.jpg 1 김치찌개 24/11/22 128 1
    15060 스포츠[MLB] 2024 AL,NL 사이영 수상자.jpg 김치찌개 24/11/22 127 1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96 0
    15058 방송/연예예능적으로 2025년 한국프로야구 순위 및 상황 예언해보기 11 문샤넬남편(허윤진남편) 24/11/21 472 0
    15057 일상/생각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 SKT Faker 24/11/21 643 1
    15056 오프모임23일 토요일 14시 잠실 보드게임, 한잔 모임 오실 분? 4 트린 24/11/20 365 0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6 알료사 24/11/20 3594 32
    15054 생활체육[홍.스.골] 10,11월 대회 상품공지 켈로그김 24/11/19 267 1
    15053 여행여자친구와 부산여행 계획중인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29 포도송이 24/11/19 710 0
    15052 일상/생각오늘도 새벽 운동 다녀왔습니다. 5 큐리스 24/11/19 483 9
    15051 일상/생각의식의 고백: 인류를 통한 확장의 기록 11 알료사 24/11/19 520 6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77 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959 10
    15048 의료/건강고혈압 치료제가 발기부전을 치료제가 된 계기 19 허락해주세요 24/11/18 736 1
    15047 일상/생각탐라에 쓰려니 길다고 쫓겨난 이야기 4 밀크티 24/11/16 908 0
    15046 정치이재명 1심 판결 - 법원에서 배포한 설명자료 (11page) 33 매뉴물있뉴 24/11/15 1848 1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32 arch 24/11/15 1024 5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918 20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476 10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575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