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8/21 18:18:10
Name   tannenbaum
Subject   빵꾸난 팬티...
좀 전에 빨래를 정리하다 보니 구멍난 빤쓰가 몇 장 보이네요. 구멍난 양말도 여러개....

저는 먹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인데 옷이나 신발, 악세사리, 화장품 이런데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진짜 무늬만 게이가 맞는가봄.. ㅜ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쇼핑을 싫어해서요. 매우.....

옷가게.. 정확하게는 백화점, 쇼핑몰 같은데 문열고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빨라지고 약간 어지럽기도 합니다. 그냥 대충 빨리사고 집에 가자..는 생각만 들어요. 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면 땡이지] 패션이고 나발이고 개나줬!! 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러다보니 최근 몇년간 옷을 산게... 몇달 전 백화점에서 여름에 입을 티셔츠 몇장 샀던게 다네요. 진심으로요. 기억이 맞다면 2년전인가 3년전인가.... 홀리스터 본사 홈피에서 직구로 한박스 잔뜩 샀던 이후로 저번 그 티셔츠 말고 옷을 산 기억이 없네요.. 속옷 한장, 양말 한짝두요. 그러다보니 이사할 때 제 옷짐은 사계절 통털어 박스 하나면 땡입니다. 평소에도 싼거 자주 사기보다는 좀 괜찮은거 하나로 오래입는 편이라 더하죠. 대신에 먹는데는 관대합니다. 어차피 죽으면 땡인데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싶은 거 맘대로 먹자... 며 어제도 새벽에 닭도리탕 시켜 먹었다지요.

그런데.. 제가 어릴적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듀스와 서태지가 힙합바지를 티비에 입고 나왔던 90년대 초반 저는 그 시골구석 대학교 힙합바지 1호였습니다. 마대자루 같던 바지와 투엑스라지 셔츠, 혹은 끈나시를 입고 수업에 들어 갔을때 쏟아지던 눈들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또... 당시 저는 학교 앞 미용실 VVIP 고객이었습니다. 염색, 펌, 두피관리, 정기적인 팩... 아주 특급손님이었죠. 어느해였던가요... 여름 방학에 동아리 수련회 가던달 노란색으로 탈색한 뒤 래게파마 하고 갔을 때 동아리 사람들은 물론 해수욕장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었지요. 꼴에 운동 좀 한다고 근육 자랑하고 픈 욕심에 쫄티랑 끈나시 입고 수업 들어가기도 하고... 그땐 저도 다른이의 시선을 즐기며 돋보이고 싶은 욕구가 참 강했었나 봅니다. 90년대 초반 그 시골 구석 학교에 노란 래게머리가 가슴골 다 보이는  헐렁한 끈 나시에 마대자루보다 큰 힙합바지 질질끌고 다녔으니... 모르긴해도 100미터 앞에서도 눈에 확 틔였을겁니다.

여튼간에 그렇게 나머지 빨래를 정리하다 웃음이 빵 터졌습니다.

저 중학교 때 아버지가 했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요. 그땐 교복자율화 시절이라 다들 사복입던 때였습니다. 타지에 근무하시다 오랜만에 집에 오신 아버지에게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또 망설이다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던 6만원짜리 게스 청바지를 사달라 했습니다. 입던 바지가 구멍났다고요.

'야이 미친놈아. 공부한다는 새끼가 먼 놈의 치장에 그렇게 신경을 쓰냐!!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면 그만이지] 할머니한테 꼬메달라 해. 몇년은 더 입겠구만... 쯧쯧 저렇게 쓸데 없는데 신경을 쓰니 성적이 그모양이지. 헛소리 말고 가서 공부나 해!!'

어느새.....
30년전 아버지와 제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제 빵꾸난 팬티를 보며 그렇게 한참 웃었습니다.
살짝 눈물도 났구요.

아닌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지 새끼 먹고 입히는 거 아까운 부모가 어디 있을까요? 당시 우리집은 이런저런 이유로 지하 단칸방에 할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승진 점수를 위해 오지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일년에 몇번 보러 오시는게 전부였죠. 오랜만에 본 자식이 청바지 하나 사달라 했을때... 아버지는 매달 갚아 나가야 하는 빚이 먼저 생각 나셨을테고.. 하루라도 빨리 집한칸 마련하기 위해 한푼이라도 모을 생각이 드셨을거고.... 곧 대학에 입학하는 큰놈을 생각하면.... 당장 아들놈 청바지 한장 사주는 것보다 다른 중요한 것들이 더 많으셨던게지요... 자식이 없는 나도 이리 변했는데 하물며 당신께서는 그때 어떤 심정이셨을까요... 그건 지금도 가늠이 안되네요.

그깟 빵꾸난 빤쓰 한장이...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헤헤.

아이고... 글 올리고 시내 백화점에 가야겠습니다. 빤쓰도 사고 양말도 사고 가을옷도 좀 여러개 사고 해야겠습니다.




비싼걸로...



9
  • 엄마 저 아저씨 빤스에 빵꾸났어. (쉿. 눈마주치지마)
  • 방구쟁이
  • 팬티는 브레이브맨...
  • 앞쪽이 찢어진건 아니...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32 1
15879 창작또 다른 2025년 (4) 트린 25/12/06 109 0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352 3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260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5 트린 25/12/03 504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605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1002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74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544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65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61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712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924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708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44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68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86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74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33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87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28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57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85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89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27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