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7/22 22:57:01
Name   삼공파일
Subject   아마추어 심리학 팬 입장에서 본 [인사이드 아웃]
[인사이드 아웃]은 매우 훌륭한 영화다. 각본의 짜임새, 연출의 섬세함 등 훌륭한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건들을 대부분 갖추었다. 여기에다, 인간의 심리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감정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참신한 소재도 [인사이드 아웃]이 훌륭한 영화가 되는데 큰 몫을 했다. 그런데 영화적 감상을 뒤로 하고도 정말 놀라운 점은, 최신 심리학 이론을 철저히 반영하여 배경과 주인공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아마추어 심리학 팬 정도 되는 입장에서 내가 본 [인사이드 아웃]의 심리학적 요소를 설명해본다.

일단 머릿속의 가장 중심 구조에 ‘본부’가 있다. 그리고 본부 바깥으로 ‘인격’을 형성하는 요소들이 테마 파크처럼 세워져 있고 본부와 연결된다. 그 주변으로는 장기 기억 보관소가 빼곡히 들어서 있고 생각의 ‘기차’들이나 회상의 ‘터널’들을 통해서 본부로 생각이나 기억을 보낸다. 이 설계도는 최신(이라고 하면 근 10년 정도의) 심리학 연구 결과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근대 이후에 학자들은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때 언제나 이성 중심으로 보았다. 감정은 이성을 방해하여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여겼다. 인간이 목적격의 사물을 인지하면 이 사물에 대해 사고 과정을 거쳐서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을 한다는 모델이 심리학의 기본이었다. 여기서 사고 과정과 판단이 심리학이 연구하는 대상이었고 곧 이성이었다. 감정은 이 모델의 방해 요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신 심리학은 이러한 모델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은 사물을 인지함과 거의 동시에 직관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까칠(disgust)”가 브로콜리를 보자마자 “이건 이상하게 생겼네? 공룡 모양도 아니고! 안 먹어!”라고 반응하는 것이 그 예다. 이러한 모델은 성인이 되어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다. 조금 더 복잡해지지만 브로콜리를 “까칠”이 먼저 반응하는 것은 똑같다. 다만 ‘생각’의 기차에서 브로콜리에 대한 몇 가지 ‘사실’(안 먹으면 엄마가 화를 낼거야, 브로콜리에는 건강에 좋은 비타민이 많아, 등등)을 싣고 와 본부에 전달하여 “까칠”이를 설득시키는 과정이 추가될 뿐이다. 물론 아무리 똑똑한 성인이어도 브로콜리를 먹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대부분 이러한 설득의 과정은 처음 “까칠”이가 내린 결정을 거의 바꾸지 못한다.

‘본부’에서 언제나 사물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인간의 사실상 모든 판단을 담당하는 이 친구들은 감정이다. 그렇지만 감정을 나타내는 emotion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로 옮기면 직관이나 원초에 가깝다. 가령 하키 경기에 져서 슬프다고 했을 때의 슬픔은 맥락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이 emotion에 해당한다. 무지개가 빛나는 햇빛 창창한 날씨를 떠올렸을 때 혹은 비가 내리는 어둡고 우중충한 하늘에 있다고 상상했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이 ‘본부’에 있는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은 즉각적이고 판단적이면서, 우리의 심리 그 자체이다. 이성은 ‘본부’에 가끔 사실(fact)인지 의견(opinion)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택배나 보내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이 친구들이 5명 밖에 없는 것 역시 최신 심리학 이론을 반영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세분화시키면 가장 원초적인 감정은 “소심(fear)”이다. 두려움은 amygdala에서부터 시작되는 싸움-회피 반응(fight-flight response)가 활성화될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도망칠 것인가, 싸울 것인가를 판단하고 이를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교감 신경계를 자극하여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이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감정이 “기쁨(joy)”으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까칠(disgust)”와 “화(anger)”는 좀 더 사회적 맥락에서 발전된다.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혹은 처음 보는 동물을 건드려도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해를 입힐 수도 있는 낯선 것들을 우리는 자동적으로 피하게 되는데 이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구역감(disgust)’이다.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이는 타 집단에 대해 나타나게 됐고, 오늘날에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집단과 대립하는 가장 주요한 감정이 되었다. (“이명박”이나 “노무현”을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각각의 상대편에 대한 자동적인 거부감, 그것이 구역감이다.) 화(anger)는 인간의 승부욕이나 권력욕을 자극하고 도전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슬픔(sadness)”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데 맥락적 이해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사이드 아웃]은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으면서 끝까지 섬세함도 놓치지 않는데 고양이나 개 정도 되는 포유동물이면 이 5가지 직관이 정신 작용에 인간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영향을 준다. 다만 가끔 보내는 임의적인 기억 회상(‘터널’로 운반되는 기억)이나 이성적 판단(가끔 출발하는 생각의 ‘기차’)이 약간 듬성듬성할 뿐이다. 즉, 생각의 ‘기차’의 열차 간격이 좀 더 길고 열차량이 몇 개 부족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 이론은 심리학에서 거의 폐기되다시피 했지만, 인간의 심리가 어떠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그 발상 자체는 언제나 프로이트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핵심 기억’으로부터 인격이 형성된다는 개념은 ‘잠재 의식’으로부터 인격이 형성된다는 프로이트 이론과는 배치되는데 어쨌든 사물에 대한 인지가 기억을 형성하고 그 기억 중 일부는 다시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은 다시 사물에 대한 인지에 영향을 주는 구조는 아직 인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 프로이트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영아기 때 기억을 망각의 골짜기에 놓고 가고, 그 안에서도 직관은 전혀 빛을 잃지 않고, 좌절을 겪으면서 양가적인 감정에 대해 깨닫게 되고, 공감에는 슬픔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잠재의식을 지키는 경비들이 허술해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올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등 세밀한 요소들이 모두 유머러스하면서도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참 심리학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셉션]보다 훨씬 더 치밀했던 이 애니메이션을 몇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이드 아웃]을 봤거나 볼 예정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이었길.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663 7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4 + arch 24/11/15 210 2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5 nothing 24/11/14 617 18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334 9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373 6
    15041 영화미국이 말아먹지만 멋있는 영화 vs 말아먹으면서 멋도 없는 영화 3 열한시육분 24/11/13 500 3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31 dolmusa 24/11/13 580 3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8 Iowa 24/11/12 335 7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1009 31
    15038 정치머스크가 트럼프로 돌아서게 된 계기로 불리는 사건 3 Leeka 24/11/11 954 0
    15037 일상/생각와이프와 함께 수락산 다녀왔습니다. 10 큐리스 24/11/11 470 4
    15036 일상/생각과자를 주세요 10 하마소 24/11/11 508 17
    15035 일상/생각화 덜 내게 된 방법 똘빼 24/11/11 367 14
    15034 일상/생각긴장을 어떻게 푸나 3 골든햄스 24/11/09 574 10
    15033 일상/생각잡상 : 21세기 자본, 트럼프, 자산 격차 37 당근매니아 24/11/09 1664 42
    15032 IT/컴퓨터추천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되나 13 토비 24/11/08 676 35
    15030 정치 2기 트럼프 행정부를 두려워하며 13 코리몬테아스 24/11/07 1422 28
    15029 오프모임[9인 목표 / 현재 4인] 23일 토요일 14시 보드게임 모임 하실 분? 14 트린 24/11/07 493 1
    15028 도서/문학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 오직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 6 다람쥐 24/11/07 703 31
    15027 일상/생각그냥 법 공부가 힘든 이야기 2 골든햄스 24/11/06 657 16
    15025 생활체육기계인간 2024년 회고 - 몸부림과 그 결과 5 Omnic 24/11/05 551 31
    15024 정치2024 미국 대선 불판 57 코리몬테아스 24/11/05 2209 6
    15023 일상/생각마흔 직전에 발견한 인생의 평온 10 아재 24/11/05 767 24
    15021 생활체육요즘 개나 소나 러닝한다고 하더라구요 10 손금불산입 24/11/05 536 13
    15020 문화/예술2024 걸그룹 5/6 8 헬리제의우울 24/11/04 489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