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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7/11/04 18:06:12 |
Name | droysen |
Subject | 독일 대학원에서의 경험을 정리하며: 6편 |
안녕하세요. 이제 몇편 이내로 연재를 끝내려고 생각 중인데, 오늘도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써보겠습니다 :) 저의 세 번째 학기는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는 구두시험을 봐야 하는 포어레숭을 4개나 들었고 (첫학기 때 구두시험을 볼 자신이 없어 최대한 뒤로 미뤘기 때문에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세미나도 2개를 들으면서, 동시에 마지막 학기에 쓸 석사논문도 슬슬 준비를 해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대형강의인 포어레숭은 "Revolution 1848 (1848 혁명)", "Transkontinentale Europäische Geschichte in der Moderne (근대의 간대륙적 유럽사)", "Deutsche und Russen vom 18.-20. Jahrhundert: eine Beziehungsgeschichte (18-20세기의 독일인과 러시아인: 관계사), 그리고 "Geschichte Großbritanniens vom 16. bis 19. Jahrhundert (16-19세기 영국사)"을 수강했습니다. 첫 두개는 원래 관심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나름 수업듣기가 괜찮았는데, 뒤의 두개는 저한테는 너무 어렵더군요. 특히 전근대 러시아사와 독일사가 얽힐때는 아주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따라가려고 노력했죠. 다만 재밌는 경험도 있었는데, 독일의 사학과 수업에서는 드물게 다른 동양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여기에 오게 된 여학생이었습니다. 서로 눈에 띌 수 밖에 없어서, 매주 인사를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은 범위가 너무 헬이었습니다. 교수가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종교사 등이 얽혀있는 영국사를 굉장히 상세하게 강의하더군요. 역사가 보통 그렇긴 하지만, 어느 한 부분을 놓치면 바로 다른 부분을 이해하는데 차질이 생겼습니다. 세미나는 "Die Weimarer Republik als Nachkriegsgesellschaft (전후사회로서의 바이마르 공화국)", "Problems and Debates: Social and Economical History of Colonial and Postcolonial India", 그리고 "Das 17. Jahrhunder: ein Zeitalter der Widersprüche? (17세기: 모순의 시대?)"에 참가하게 됐어요. 첫 번째는 앞의 두 학기에서도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의 세미나였고, 두 번째는 좀 달랐습니다. 원래 저희 과에는 식민지사를 담당하는 교수님이 계신데 (무려 하버마스의 따님이십니다...) 그 분이 마침 해당 학기에 미국의 한 대학에서 초청받아서 강의를 하러 갔거든요. 그래서 식민지사 모둘의 수업이 열리지 않게 됐어요. 근데 전 이번이 수업을 듣는 마지막 학기고, 해서 반드시 이 모둘을 이수했어야 했죠. 석사 논문을 쓰면서 세미나를 들을 수는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시험청에 문의를 했더니, 사학과와 별도로 존재하는 인도사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 해당 모둘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게 제가 독일에서 들은 유일한 영강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은 제가 약한 초기근대 분야였는데, 교수님이 유명한 분이기도 하고 (특히 전쟁사 분야로) 주제가 은근 재밌어서 들을만 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모순적인 현상들을 다루는 수업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바이마르 공화국에 관한 세미나는 제가 석사 논문 주제로 생각하고 있던 것과도 관련이 있어서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학기 초에 교수님도 따로 찾아갔고, 혹시 석사논문 지도를 맡아주실 생각이 있냐고 여쭤보니 알겠다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주제를 생각해서 다시 찾아오라고 하더군요. 반면에 두 번째 세미나는 좀 힘들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이전의 글 어디선가 말씀드린 대로 제가 들었던 세미나 중 참여인원이 가장 적었던 수업의 인원이 2명이었는데, 그게 바로 이 수업이었습니다. 첫 주에 7명 정도가 왔는데, 두 번째 주가 되니 저 포함해서 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럴만도 한게, 이 수업은 갓 박사과정을 마친 선생님이 맡으셨는데, 가르치는 능력(혹은 경험)이 약간은 부족해 보였거든요. 근데 읽을 텍스트는 정말 무지막지하게 줬습니다. 매주 200페이지는 줬던 것 같은데, 문제는 참가 학생이 저랑 다른 학생(인도 학생이었습니다) 한 명 밖에 없으니, 텍스트를 대충 읽어온다는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죠. 어쨋든 그렇게 정신없는 학기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습니다. 이 때가 딱 JTBC에서 태블릿 피씨 보도를 한 후의 시점이었습니다. 친구들과 부모님이 한국에서 매주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듣고 있으니, 마음이 영 좋지 못했습니다. '난 역사를 공부하는데, 그리고 서양사를 공부하고 있지만 어쨌든 한국의 시민이기도 한데, 한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가까이 있지도 못하고 역할을 하고 있지도 못하구나'라는 생각이 저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하다못해 베를린 같은 도시에서는 교민들이 촛불집회를 열기도 했다는데, 여기는 작은 도시라 그런게 없었거든요. 그런 생각으로 몇 주 동안 지내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독일인 친구와 수업이 끝나고 같이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우리나라에 지금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 었어"로 시작해서 대략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사실 이거 짧게 설명하기 굉장히 힘듭니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너무나 달라서 독일 애들이 이해를 잘 못해요...). 그 친구는 학사때 사학과와 정치학을 같이 공부해서, 대학원에서는 석사만 전공하고 있지만 우리 대학 정치학과에서 운영하는 "민주주의 연구소"에서도 일을 하고 있었는데요. 저보고 "내가 여기 민주주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거기 분기마다 투고를 받거든. 한 번 그거에 대해서 써보지 않을래? 분량은 5페이지 정도고, 알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기본적인 배경지식은 설명해주면서 써야할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바쁘긴 했지만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대화가 화요일에 있었는데, 집에 가자마자 글을 쓰기 시작해서 목요일에 글을 완성했던 것 같습니다. 이게 은근히 어려웠습니다. 우선 저는 1. 기본적인 상황설명을 해야하지만, 2. 그것에만 국한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3.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논의하면서, 4. 글의 분량은 5 페이지 이내로 제한해야 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말로 하면 "신화의 해체"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됐죠. 박근혜만의 몰락이 아닌, 박정희 시대부터 이어진 어떤 신화의 붕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친구한테 메일을 보내주니 벌써 다 썼냐면서 놀랐습니다. 근데 투고하고 나서 검토 후 최종적으로 연구소로부터 받아들여진게 마침 국회에서 탄핵투표가 있던 날이라, 마지막에 급하게 수정했던게 기억에 남네요. 대단한 글도 아니고, 분량도 짧고 심지어 독자도 많지 않겠지만, 전 이 글을 쓰고 나름대로 뿌듯했습니다. 시민으로서 할 최소한의 일은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와중에 학기는 계속 진행됐고, 전 제가 생각한 석사논문 주제를 가지고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제부터는 지도교수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대화의 시작은 주로 면담의 본 목적과는 직접적으로 상관 없는 작은 이야기꺼리들이었습니다. 여름엔 날씨였는데, 작년 겨울부터는 지도교수님과 만날 때 항상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 역사학자로서 한국의 사태에 대해서 굉장한 관심을 보이셨는데, 매번 만날 때마다 그동안 있었던 사태의 진전에 대해서 설명드렸습니다. 독일에서 간간히 보도되는 것도 항상 읽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와 지도교수님의 작은 전통(?)이 이어져서, 가장 최근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전임자와는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될 것 같냐"를 논의하는데까지 왔습니다. 참고로 적어도 제가 겪어본 바로는 독일 사람들은 대북 화해정책을 거의 자동적으로 자신들의 Ostpolitik(동방정책)과 비교하면서 생각하더군요. 이건 일단 패스하고... 제가 생각한 석사논문 주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보수혁명 지식인들의 근대상"이었습니다. 보수혁명이라는 사상적 흐름 안에서도 Nationalrevolutionäre (민족혁명가) 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해한 근대란 무엇인가를 논문에서 다뤄보는 것이었죠. 이 민족혁명가들은 제가 보기에 여러모로 흥미로웠는데, "과연 얘네들을 보수라고 불러도 될까"싶을 정도로 급진적이었습니다. 반자본주의적이었고, 반의회적이었으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혁명을 부르짖었죠. 얘네들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는게 낫겠네요. 그렇게 한편으로는 정신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숭숭하게 학기를 보내다가 마침내 구두시험을 준비해야 할 떄가 다가왔습니다. 가장 문제가 된 거는 영국사였습니다. 지난 번 다른 과목들과는 달리 다뤘던 모든 것이 시험 범위 안에 포함된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영국사의 지식을 30분안에 어떻게 평가하지? 싶어서 막막했죠. 그래서 같이 수업을 들었던 친구와 하루 날을 잡아서 같이 준비를 하기로 합니다. 전 친구를 만나기 전에 우선 익숙한 방식으로 대충 준비를 했습니다. 왕 순서를 외우고 (ㅡㅡ) 주요 사건들의 순서를 정리한 것이죠. 이것조차 안하면 전체적인 맥락이 잘 안 잡힐 것 같았습니다. 친구를 만나니까 놀라더군요 ㅋㅋ 이걸 다외웠냐고. 그렇게 3 시간 정도 서로 예상 질문을 던져주고 답을 하고 하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교수 연구실에 시험을 보러 들어갔죠. "어서오게" "안녕하세요" "바로 시작하지. 영국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무엇인가?" "왕위 계승을 위한 정치적인 동기가 강했다는 점입니다. 헨리 8세가 블라블라 첫 번째 부인부터 블라블라 결국 이건 17세기까지 이어져서 크롬웰까지 블라블라" (다 외운걸 다시 말한거라 쉬웠어요) (중간에 다른 평범한 질문들이 이어지고) "좋네. 그럼 크롬웰 당시 아일랜드는 상황이 어땠지?" "크롬웰이 거의 학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짓을 했기에 피폐했습니다" "'거의'라고 약하게 부를거 없네. 학살 맞으니까. 어쨌든 이때 아일랜드 인들이 잉글랜드 쪽으로 이주를 많이 한 것은 알고 있겠지. 이주의 주 원인은 무엇이었나?" "그야 크롬웰이 학살을 저질러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 갑자기 말문이 또 막혀버렸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라니... 갑자기 저렇게 물어보니까 대답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도움을 주려는듯이) 좀 더 역사적이고 긴 맥락으로 생각해보게" "아일랜드 안에서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아서요..?"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하는구만!" "네.. (아니, 알고있는 것도 저런식으로 물어보면 떠오르지가 않잖아요 -.-)" "다 됐으니까 잠시 나가 있게" "넵" 기다리면서 영 느낌이 안 좋더군요. 역시 돌아와보니 1,7이었습니다. 뭐 억울한 면이 있긴 했지만 버벅거린 것도 사실이니까 납득하고 돌아갑니다. 나중에 같이 준비했던 친구한테 물어보니 본인은 무려 낙제를 했다고 하더군요. 억울함을 한가득 하소연합니다. 토닥토닥을 해줍니다. 사람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게, 지난 번에 한 번 1,0을 받으니 제 마음 속에 좋은 점수의 기준이 1,0으로 자리 잡혀버리고 그 이하는 모두 불만족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이 학기에는 위에 말씀드린대로 구두시험을 4개나 봤어야 했는데, 남은 3개를 준비하면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경험이 참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은 3개 중에 하나는 1,3, 2개는 1,0을 받았어요. 학기 말 쯤에는 지난 학기에 쓴 페이퍼들도 평가가 끝났는데, 모두 1,0을 받았습니다. 이 학기에 쓴 페이퍼들은 석사논문을 신청하기 위해 필요하니 혹시 평가를 빨리 해줄 수 있냐고 부탁한 결과 내고 나서 2주 정도 후에 점수를 받았는데, 17세기에 관한 세미나에서는 1,3을 받고 나머지 두개는 1,0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체 학점 평균은 1,2가 되었고,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제출한 페이퍼가 2,3으로 평가되고 눈물을 흘렸던 당시와 비교하면 만족스러운 채 석사논문을 쓰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죠. 그치만 100쪽 분량의 석사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고작 몇 십 분 동안 치루는 구두시험과는 물론, 20쪽 분량의 페이퍼를 작성하는 것과도 전혀 다른 과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저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텐데, 체험을 해보지 못했으니 다가올 시련을 예상치 못하고 있었죠. 한국의 대학에서 학부를 다닐 때 학사논문이라도 썼으면 달랐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독일은 학부 때 당연하게도 학사논문을 쓰는데, 일찍 경험을 해보는게 많은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거든요. 한국에서는 저희 학교의 경우 한국사학과는 학부논문을 쓰는데 반해 동양사학과와 서양사학과가 합쳐진 그냥 사학과는 논문을 쓰지 않는 기형적인 제도가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논문 준비를 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새벽에 일어나 헌재의 탄핵 판결을 지켜보고 그 후 일련의 선거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저의 3, 4월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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