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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12/01 21:54:23
Name   tannenbaum
Subject   오야지 형아 - 하
내 예상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하는데는 딱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사고는 그날 점심 때 식당에서 터졌다. 지금이야 알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험한 일 하는 사람들은 매끼 제대로 푸지게 먹여주는 게 그 바닥 원칙이라는 걸... 우리들이야 뭐 뼈해장국 한그릇이어도 맛있게 먹었지만 십수년 현장에서 그들만의 원칙으로 살던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나는 아침에 광주로 다른 업무를 보기 위해 떠나며 선배가 시킨대로 아침, 점심 때 반주는 안되고 식사는 1인당 얼마 이하만 먹으라 했다고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오야지 형이 폭발했다.

XXX 개같은 일 시키면 밥이라도 제대로 먹여야 할거 아냐!! 뭐 이따구로 XX XXXX 하는 새끼가 다 있어!!

너무 놀란 나는 딸국질이 시작 했고 옆에 있던 아재들이 오야지 형아를 말렸다.

아이고 참아 참아 저 어린것이 뭘 알것는가. 사장이 돈 애낄라고 시켰것지. 왜 엄한 어린애한테 그런가. 애 놀랬자네.

결국 그날 그 팀은 파업을 선언하고 숙소로 돌아가 술을 푸기 시작했고 나는 현장에 혼자 벌벌 떨면서 선배를 기다렸다. (*주- 당시엔 핸드폰이 보급되기 전이라 선배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할 무렵 선배는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선배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한성깔 하던 선배도 잔뜩 열이 받아 숙소로 쳐들어 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옴팡지게 싸움이 났고 지구는 멸망... 하지는 않았다. 아침, 점심때 반주는 금지하고 대신 먹고 싶은거는 마음대로 먹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두 사람이야 합의를 봤을지 모르지만 억울하게 봉변 당했다 생각한 나는 다음 날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입이 댓발 나온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막 봉분 하나 작업을 마치고 사진을 찍는데 누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야지 형이 씩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삐졌냐? 사내 새끼가... 니 사장이 니 방패로 세워놓고 수 쓰는게 밸 꼴려서 그랬다. 니가 미워서가 아니라... 화 많이 났냐? 풀어라. 내가 미안했다.

어.... 내가 미쳤나보다. 갑자기 그 오야지 형이 잘생겨 보였다.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찬찬히 뜯어보니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날이 추워서인지 갑자기 볼이 살작 달아 올랐던것도 같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고 어느새 나는 작업중에 오야지 형에게 장난치고 도망가고 장난치고 도망가고 그러고 있었다.

일이 끝나기 하루전인가 이틀전인가... 갑자기 두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현장으로 달려 들었다. 그들은 작업을 이미 마친 봉분의 가족이었다. 나는 막아서며 그사람에게 무슨일로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러시면 안된다 말렸다. 그러자 내 멱살을 잡고 집어 던졌고 나는 그대로 붕 나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오야지 형은 삽을 집어 던지고 달려와 날 집어 던진 사람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세사람은 경찰서에 끌려 갔었다. 오야지 형은 그날 저녁 늦게서야 얼굴에 상처를 달고 숙소로 돌아왔다. 술에 잔뜩 취한채로.... 나는 미안한 마음에 물끄러미 얼굴의 상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오야지 형이 그랬다.

안 아프니까 가서 자라.

현장이 마무리되고 회식이 있었다. 1시간 전까지 죽이네 살리네 하던 선배와 오야지형은 어느새 세상 둘도 없는 절친마냥 굴고 있었다. 아재들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긴.. 오야지 형과 아재들은 돈 받았으니 좋았겠지, 선배는 공기를 맞췄으니 좋았겠지, 나도 사글세방이랑 반년치 생활비 만들어서 즐거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썼다. 소고기도 맛없고 스끼다시도 맛없고... 혼자 밖으로 나와 목포 바닷가를 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왔는지 오야지 형이 내 옆에 걸터 앉았다.

니는 사무실에서 일해라.

응? 무슨 말이야?

니는 나처럼 흙 파먹지 말고 따듯한 사무실에서 좋은 옷 입고 볼펜으로 일하라고.. 멍충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겨울 찬바람 불던 목포 어느 현장에서 나는 열 아홉이 되었다. 그 열 여덟에서 아홉으로 넘어가던 시간들 속에 잠시 마음이 설레던 사람도 있었다. 두번다시 보지 못했지만 그 두근거림이 여전히 선명한 걸 보면 아마....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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