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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29 07:17:06
Name   뤼야
Subject   너무 유창한 화자의 문제
제가 블로그를 한창 열심히 할 무렵, 한 독서가를 알게 되어 작품을 읽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책으로 번 돈은 모두 책을 사는데 써야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써줄 것이라고 믿는 분이었죠. 본업은 따로 있기에 책을 펴내 얻는 인세는 가계에 보태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유용한다나요. 부러운 일이지요. 어쨌든 그 분이 제게 소개해주어 읽게된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영국작가 마크 해던의 [한밤중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크리스토퍼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라고 불릴만한 기억력과 더불어 수학과 물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만 자폐증을 앓고 있습니다.  타인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지요. 이러한 크리스토퍼에게 자그만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이웃집의 개가 정원 갈쿠리에 찔려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크리스토퍼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크리스토퍼는 의문의 사건을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런 그의 결심을 달가와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크리스토퍼의 인생과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 사건을 해결하러 나선 와중에, 엉뚱하게도 그는 자신의 일생의 아주 중요한 사건의 실마리를 얻게 되지요.

영국의 문학상중 하나인 휘트브레드상을 받기까지한 이 작품을 저는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면 제 이웃이었던 독서가는 '나는 이 소설이 이상하다. 아무리 크리스토퍼가 지능이 뛰어나다고 하나, 자폐증 소년이 이런 목소리를 냈을 것 같지는 않다'라고 제게 말씀하셨더랬습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것에만 집중했던 제게 화자의 문제를 다시 한번 강렬하게 환기시킨 대화였습니다. 아직도 전통적인 기법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는 손에 꼽을 수가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들에게 '화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처럼 보이지요. 화자의 문제를 강렬하게 인식하며 작품을 쓰는 작가는 흔히 '난해함'과 '작품성' 이라는 한 축의 문제와 '가독성' 내지는 '인기'라는 서로 양립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문제를 두고 도박을 해야하지요.

교과서적으로 살펴보자면 소설의 화자란 소설의 시점과 거리를 상정하게 하는, 즉, [작중 현실을 누가 어떤 각도에서 보는가]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보는 각도와 입장에 따라서, 내용은 완전히 다르게 판단되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도록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지요. 또한, [모더니즘 소설에 있어서 화자는 작품의 완성도와 완전히 밀착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화자를 설정하여 어떻게 사건을 진행할 것인가'는 주제, 인물의 성격 뿐만이 아니라 작품에 있어 [미적효과와 작품의 완성도]의 문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화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이유는 지난 주말에 서점에 들러 두 권의 신간을 살펴본 덕분입니다. 한 권은 도나 타트의 신작 [황금방울새]이고, 한 권은 미셸 우엘벡의 [복종]입니다. 두 작가의 전 작을 모두 재미있게 읽은 터라 신간이 반갑기는 했지만, 퓰리처상을 수상한 도나 타트의 신작은 전작에 비해 그리 나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미셸 우엘벡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후속작은 이 시대의 공기를 포착했다고 말할 수 있는 전작 [소립자]의 마이너버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흥미로운 사건을 만들어 내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가독성은 높일 수는 있겠지만 작품성을 높일 수는 없습니다. 가독성과 작품성의 문제는 쟝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는데 있어 각각 중요한 지표인 것은 이로서 당연해집니다. 도나 타트가 상정한 화자는 난처한 지경에 처해 호텔에 머무르며, 어린 시절에 사고로 죽은 어머니를 회상하는 젊은 처자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작품을 동시에 떠올릴 수가 있지요. 하나는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이고, 또 하나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입니다. 호텔방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사회적 죽음(또는 모라토리엄)을 맞이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처음 설정이니 말입니다.

도나 타트의 작품이 항상 쟝르소설과 순문학의 교묘한 경계에 머무르며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 소개한 두 작품을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나 타트가 상정한 화자는 '너무 유창합니다.'  심리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있는 화자가 이토록 수다스럽게, 치밀하게  과거를 회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으니 작품에 몰입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에 반해 폴 오스터의 작품과 크누트 함순의 작품 속 화자는 '정말 그럴 듯'합니다. 1890년에 발표된 소설인 [굶주림]의 시대적 배경이 풍요로운 현대와는 완전히 유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심리에 완전히 몰입가능한 것이 바로 작가의 역량이지요.

[달의 궁전]의 결말이 좀 나이브 하다고 느끼신다면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달의 궁전]의 주인공인 포그가 심미적인 목적으로까지 고양된 허무주의자가 되어 공원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하기까지는 무척 좋았는데 말이죠. '우'라는 중국계 미국인 여자에게 구원을 받으면서 작품은 비루해지기 시작하지요. 여자한테 구원받지 마세요. 인생을 예술로 만들기 어려워집니다? 도나 타트의 작품을 읽을 때,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났습니다. "기억하세요. 과거는 남김없이 기억에 담기지 않으며 과거에는 미래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내게 유창하게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는 누구인가?'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모더니즘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소설들은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죠. 화자의 문제가 작품성에 밀착되어 있음을 완벽하게 입증하는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또는 [소리와 분노]) 그리고 살만 류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입니다. 까뮈와 사르트르, 오르한 파묵등이 포크너에게 바친 찬사는 누군가 이야기하듯 '모더니즘의 충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크너가 난해한 것은 전통과 완벽한 결별을 선언했음과 맞물려 있습니다. 작품성은 높으나 가독성이 떨어지기로 독자들 사이에 원성이 자자하지요. 그러나 읽다보면 재미있습니다? 오기가 생기고 한 번 읽고 나면 포크너에 중독되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제가 포크너의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내가 죽어 누어있을 때]입니다. 이 작품은 포크너의 작품중 비교적 분량이 짧기도 하지만 다른 작품에 비해 가독성도 높은 편인데다, 시체가 말을 하는(?) 신기한 경험도 해 볼 수 있으니 한 번쯤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에 비해 살만 류슈디는 모더니즘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살만 류슈디는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로 분류하기도 하지요. 모더니즘이 '화자'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윌리엄 포크너나 제임스 조이스를 선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살만 류슈디는 거기에 한 술 더떠서 작품 속에서 [소설 속의 화자를 도저 믿을 수가 없다]로 나아갑니다. 화자의 문제가 대두되어, 화자의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작품에 녹아들도록 이야기를 꾸몄는데, 이제와서 화자를 의심하라? 믿을 수없다? 독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이 교활한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독자는 부처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손오공이나 악마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파우스트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화자의 문제'를 강렬하게 인식하는 작가의 작품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시간의 순서나 인과관계와 같은, 일반적으로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논리대로 서사를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화자의 문제가 강력해지면, 그리고 그러한 작품에 빠져들게 되면,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이야기 하듯 '타인의 꿈을 꾸는 경험'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 그 강렬함! 타인의 무의식과 욕망에 접속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적게 읽으라. 많이 읽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화자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적게 읽으라'는 결론은 이상해 보입니다만, 하나의 서사예술로서의 소설은 아무리 작가가 먼 산 이야기를 해도 온몸을 뒤덮은 실핏줄처럼 작가의 생각이 맥동하기 마련입니다. 이 실핏줄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벗어던질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는 주체할 수 없는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정말 좋은 작품을 읽고 나면 거의 정신적 강간을 당한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어쩌면 저는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를 마저 읽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그저 재미있게 읽으며 즐길 거리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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