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8/04/05 15:49:38
Name   염깨비
Subject   왜 쓸데없이 정직했을까??
2017년 12월
회사 업무로 설문조사를 나섰다.
외고, 과학고 입학을 위해 면접을 보는 학생들을 붙잡고 설문조사를 한다.
중학교 1,2,3 학년 때 성적은 어떠하였는지, 면접관은 몇명이 있었는지, 면접 질문은 몇 가지였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조사를 하는 업무다.

내가 나간 학교의 위치는 산 꼭대기에 있었다.
그날은 패딩을 입어도 추웠고, 바람이 어찌나 불던지 설문지 종이도 바람에 날아다녔다.
학생들은 나를 '도를 아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 정도로 취급을 했고, 학부모들도 추워죽겠는데 뭐하시는거냐 화를 내시더라.
사은품 하나 안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만 하는 나도 그분들 심정이 이해가 갔다.

결국 약 20명 정도 설문조사를 받아냈다. 회사는 50명 이상 받아내길 원했지만, 정말 이게 최선이었다.
그나마 중학교 내신이 어떤지는 제대로 못물었고, 가장 중요한 면접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같이 일한 아르바이트 생들과 차 한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 액셀로 자료를 정리한 뒤에 이메일로 보냈다.
이거 조사 나온다고 돈 한푼 더 받는거 아니지만, 뭐 1년에 한 두번 하는 외근이니 그러려니 넘겼다.


자료를 보내고 다음날 몸살기운이 너무 심했지만, 회사에 출근했다.
괜히 밖에서 일한거 티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틀 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났고 결국 회사는 결근했다.

쉬면서도 설문조사에서 성적 부분을 많이 조사하지 못한게 내심 염려가 되었다.
그냥 내가 임의로 1,2,3 등급 공평하게 나눠서 적고 제출 해도 된다. 회사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자료를 임의로 수정해서 모자란 명수를 채워넣고 제출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몸살 나면서 까지 조사한 내역인데 설마 이거 적다고 뭐라 하지 않겠지 싶었다.

하루 쉬고 그 다음날, 그 다다음날, 1월 까지도 내가 제출한 자료에 대해선 아무말이 없었고 설문조사에 관해선 까맣게 잊었다.





2018년 4월
기획실로 부터 전화가 온다. 'XX고등학교 설문조사 나가셨죠? 잠시만 와보실래요?'
기획실 대리 한명이 나를 찾는다. 당일날 까지 제출하라던 자료를 5개월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찾는지 모르겠다.
문제가 생겼단다. 성적 부분의 표본이 너무 적단다. 엑셀로 제출하기 전 설문조사 용지를 갖고있는지 묻는다.
벌써 5개월이나 지났는데 별 말씀이 없으셔서 아마 없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한숨을 쉬며 아 큰일났네... 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혹시 조사 종이가 있는지 내일까지 찾아봐 달란다.

다음날 기획실 부장이 날 찾는다. XX고등학교 설문조사 나갔죠? 잠깐 와보세요.
상무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XX고등학교 설문조사 나갔다면서? 아니 근데 성적을 왜 멋대로 조사를 안해와? 너 때문에 성적 평균 하나도 못내잖아?'

뭔지 모르겠는데 문제가 생겼나보다. 5개월 지난 지금.
'좀 시간이 된터라 기억이 안나지만 그때 너무 춥고 학교가 고 지대에 있어서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조사가 거의 불가능 했습니다. 그래서 성적보다 중요한 면접 질문에 치중해 조사를 하느라 성적은 제대로 조사 못했습니다'

라고 하자 이내 다그친다.
'아니 그걸 누가 멋대로 중요한걸 판단하래? 여기 서울에서 탑3에 드는 학교인데 어쩔꺼야? 니 때문에 성적 평균 다 망했잖아?'
상황이 쯤되니 뭐 할말 이 없었다. 죄송하다고 말할 뿐이었고, 경위서를 써오란다.




아차 싶다.
그 쓸데없는 정직함이 뭐라고. 그 쓸대없는 신념이 뭐라고. 무단횡단 한번 안한 사람이 어딨다고 괜히 혼자 깨끗 청렴한 척 했다 험한 꼴 당해버렸다.
정직한 숫자를 원하지 않았다. 구라 라도 형식상 채워진 갯수를 원하는 업무였다.
대충 학생 성적 채워넣어봐야 그 학교는 상위권 학생들만 지원했을 텐데.

쓸데 없는 정직과 솔직함이 5개월 만에 웃기지도 않는 화가되어 돌아왔다.





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712 7
    15062 오프모임29일 서울 점심 먹읍시다(마감) 8 + 나단 24/11/22 339 4
    15061 스포츠[MLB] 2024 AL,NL MVP 수상자.jpg 1 김치찌개 24/11/22 105 1
    15060 스포츠[MLB] 2024 AL,NL 사이영 수상자.jpg 김치찌개 24/11/22 99 1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84 0
    15058 방송/연예예능적으로 2025년 한국프로야구 순위 및 상황 예언해보기 11 문샤넬남편(허윤진남편) 24/11/21 450 0
    15057 일상/생각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 SKT Faker 24/11/21 612 1
    15056 오프모임23일 토요일 14시 잠실 보드게임, 한잔 모임 오실 분? 4 트린 24/11/20 338 0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5 알료사 24/11/20 3377 32
    15054 생활체육[홍.스.골] 10,11월 대회 상품공지 켈로그김 24/11/19 257 1
    15053 여행여자친구와 부산여행 계획중인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29 포도송이 24/11/19 699 0
    15052 일상/생각오늘도 새벽 운동 다녀왔습니다. 5 큐리스 24/11/19 468 9
    15051 일상/생각의식의 고백: 인류를 통한 확장의 기록 11 알료사 24/11/19 504 6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65 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946 10
    15048 의료/건강고혈압 치료제가 발기부전을 치료제가 된 계기 19 허락해주세요 24/11/18 724 1
    15047 일상/생각탐라에 쓰려니 길다고 쫓겨난 이야기 4 밀크티 24/11/16 900 0
    15046 정치이재명 1심 판결 - 법원에서 배포한 설명자료 (11page) 33 매뉴물있뉴 24/11/15 1808 1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32 arch 24/11/15 1014 5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910 20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466 10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565 7
    15041 영화미국이 말아먹지만 멋있는 영화 vs 말아먹으면서 멋도 없는 영화 8 열한시육분 24/11/13 696 3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33 dolmusa 24/11/13 764 3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8 Iowa 24/11/12 415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