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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3/05 20:16:32수정됨
Name   주문파괴자
Subject   수학적 엄밀함에 대한 잡설
#1
수학은 엄밀한 논리전개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다른 학문 분야도 객관성을 중요시하고, 수학만큼 엄밀한 학문분야도 많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수학이 엄밀함의 마스코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저는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는데, 한때 이 엄밀함을 과도하게 추구하여 바보같은 짓을 한다고 여길 때가 있었습니다.

대수적 위상수학 과목을 수강할 때의 일입니다. 학기 초에 원(x^2+y^2=1)의 기본군(fundamental group)이란 것을 계산하는 과정을 배웠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원의 기본군은 정수집합 Z가 되고, +1은 시계 방향으로 원을 한 바퀴 감는 것에 해당, -1은 반시계 방향으로 감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인데요. 예를 들면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감고 반 시계로 다섯 바퀴 감으면 이는 정수 3-5 = -2 에 대응되는 것이지요

기본군의 정의는 조금 더 복잡합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아닌 거 같고, 어쨌든 이걸 증명하기 위해 학기 첫 2주 가까이 덮개 공간(covering space)이니 뭐니 해서 아주 난리법석을 피웠습니다. 내용도 어려워서 겨우겨우 따라가다가 어느 날 "원의 기본군은 Z와 동형이다"라는 것 까지 증명을 배우고 집에 와서 생각하는데, "이거 그냥 원을 어떻게 감느냐만 세면 되는거잖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감이 몰려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학적 엄밀함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이 과목이 너무 어려워서 수학적 엄밀함이란 그냥 나를 고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네요. 여러분에게도 그 생각을 공유해볼까 하여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2
조금 더 캐주얼한 예제로 시작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평면(=R^2)상에 끈이 놓여져있습니다. 이 끈이 원점 0(그림에서 i라고 생각하셔도 무방)는 지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제 이 평면에서 원점을 제거한 집합을 U=R^2-{0}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끈은 U 안에 놓여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게임을 합니다. 이것을 "끈 넘기기 게임"에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목적은 끈을 원점의 반대편으로 넘기는 것입니다. 규칙은

1. 끈의 양 끝(그림에서 a와 -a)은 절대 움직일 수 없음
2. 끈의 신축성은 무한함
3. 끈을 절단하거나 붙일 수 없음
4. 끈을 움직이는 중간과정에서 끈은 언제나 U 안에 속해있어야함. 즉, 끈은 원점을 통과할 수 없으며 평면에서 수직 방향으로 떼어내는 것도 불가능함.

(댓글 중 Hide_D 님의  "점프하지 않고 줄넘기"가 좋은 비유 같습니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이 규칙하에 끈을 원점 반대편으로 넘길 수 없음을 압니다. 당연히 수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끈을 원점 반대편으로 넘기려면 "당연히 원점을 지나야 하므로"  끈 넘기기 게임은 클리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밀한 논증이 아닙니다. 단순히 평어로 써진 서술이라서 엄밀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끈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없는 이유로 "원점을 지나야 함"이라고 말하는 것에 논리적 비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더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아는 바 수학과에서 가장 빠르게 배우는 이론으로 전개할 수 있는 증명을 간략히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더 기초적인 방법을 아시는 분은 알려주세요!)

이는 복소함수론에서 contour integration(외곽적분?)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른 바 "homotopy invariance of contour integration"라고 불리우는 정리를 사용하는 것인데요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homotopy(*비직관적 용어이므로 앞으로 "연속변형관계"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는 학술적 용어는 아닙니다)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양 끝 점이 같은 두개의 끈이 있습니다. 이 중 하나의 끈이 위에서 언급한 1,2,3,4의 규칙을 통해 나머지 하나의 끈으로로 변형될 수 있으면 두 끈을 "연속변형관계"에 있다고 부릅니다.

"homotopy invariance of contour integration" 정리는 다음을 말합니다.

"어떤 성질이 좋은 복소함수 f:U->C가 있을 때 (대충 얼버무렸습니다만, 정확히는 f가 U위에서 holomorphic하다는 조건입니다) 서로 연속변형관계에 있는 두 끈을 따라서 f를 적분한 결과값은 서로 같다."

이후 U를 복소평면의 부분집합으로 간주하고, 함수 f를 복소수 z에 대해 f(z)=1/z로 정의합니다.(U가 원점이 빠진 집합이라 z=0에서 정의가 불가능함을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원점을 둘러싼 원을 하나 생각한 후 원을 위쪽 반원과 아래쪽 반원으로 나누어 두 개의 끈을 정의합니다. 그리고나서 각각의 끈을 따라서 f를 적분한 결과값을 계산해보면 실제로 다른 값이 나오게 됩니다.

만약 위쪽 반원과 아래쪽 반원이 U 안에서 "연속변형관계"에 있다고 가정하면 f를 적분한 결과값은 homotopy invariance정리에 따라 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값이 나왔기 때문에 위쪽 반원과 아래쪽 반원은 U 안에서 "연속변형관계"에 있지 않다는 결론(=즉, 끈 넘기기 게임은 클리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납니다.

이것이 제가 아는 바 수학에서 가장 기초적 지식만을 활용해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느낌이 어떠신가요? 처음 증명을 보았을 때 제 솔직한 인상은 "쉬운 것을 이악물고 돌아돌아가서 엄밀한 척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원점을 못 지나니 끈을 반대편으로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이 관찰을 수학적 언어로 잘 정제하면 증명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실제로 이 방향으로 증명을 여러차례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괴상한 방법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4
어떤 명제에 대한 증명을 고안할 때, 종종 보이지 않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장벽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내가 어떤 증명을 고안해냈는데, 내 증명이 이 "장벽"을 직면하여 극복해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 증명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끈 넘기기 문제를 통해 "장벽"의 예시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설명을 위해 추상적 세계에서 실 세계로 무대를 잠시 옮겨보겠습니다. 우리는 넓은 운동장에 있고, 운동장 한 가운데 높은 장대를 꽂습니다. 그리고 신축성이 매~우 뛰어난 고무줄의 양 끝을 운동장 적당한 지점에 고정합니다. 이제 이 고무줄을 지표면에서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장대 반대편으로 넘기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이 고무줄을 꼭 붙들은 채로 동해바다로 향합니다. 여기서 배를 타고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건너 서해바다로 들어와 운동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물론 고무줄은 꼭 붙들고 있는 채로요.

이제 우리는 끈이 장대 반대편으로 넘어가있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끈이 끊어지지도 않았고, 장대를 통과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이(그리고 오늘날 소수의 사람들이) 믿던 것처럼 지구가 평평하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끈 넘기기 게임의 불가능성의 증명에 있어서 "장벽"이 하나 드러나게 됩니다.

"끈 넘기기 게임의 본질은 원점 근처의 상태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이 문제는 평면 전체의 고유한 성질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제가 어떤 정교한 논리적 표현들로 "원점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끈 넘기기는 클리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수학적으로 정제해내더라도 만약 그 논리의 어딘가에서 평면의 고유한 위상적 성질(평면과 구를 차별지을 수 있는)을 적절히 활용해내지 못했다면, 해당 논리는 "장벽을 회피한 것"이 되고, 당연히 논리의 비약이 생기게 됩니다. 실제로 구면에서 끈 넘기기 게임이 클리어 가능하다는 것이 그 반증입니다.

이제 다시 끈 넘기기 문제의 복소함수론적 증명을 되짚어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여전히 엄밀함에 집착하여 불필요하게 복잡한 논증을 도입한 것처럼 느껴지시나요? 이제 저는 저것보다 간편한 증명이 있을 수 있는지 진심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16
  • 오오, 재미있어요. 감사합니다 >_
  • 수학빌런은 추천
  • .
  •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게시판에 등록된 주문파괴자님의 최근 게시물


CONTAXS2
이게 홍차넷의 자유게시판이다!
https://redtea.kr/?b=10&n=1248&c=4926
1
주문파괴자
엌ㅋㅋㅋ 마침 오늘 있었던 글타래군요.
메아리
수포자의 눈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크흐흑...
2
주문파괴자
차근차근 읽어보시면 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눈물입니다...
2
주문이 아니라 나의 대뇌 피질을 파괴할 셈입니까?
5
주문파괴자
ㅋㅋㅋㅋ 나름 가장 덜 파괴적인걸로 주제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ㅠㅠ
저희가 뭘 잘못했나요?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homotopy invariance of contour integration"라는 정리를 1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도 안오지만, 우리의 직관은 종종 틀리기 때문에 수학적 엄밀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치만 그게 변태적인 것 같다는 생각은 변함 없어요. ㅎㅎ

[니 마법은 소용없다.]
고대 수학 사용자들은 사실 엄밀함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지만, 미적분 발명 이후 극한 개념을 다룰 때 엄밀함 없이 막 쓰다가 한번 논증이 와르르 무너지고, 20세기에 엄밀파 vs 비엄밀파가 쌈나다가 또 비엄밀파의 논증이 와르르 무너진 뒤 엄밀한 수학이 자리잡게 되죠. "수학적 엄밀성 그까이꺼 말로 때우면 되는거 아냐? 수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선험적 직관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고, 그 선험적 직관이면 충분하다!" 고 하다가 학파가 망해버린 케이스도 있다능..

https://en.m.wikipedia.org/wiki/Italian_school_of_algebraic_geometry#Collapse_of_the_school
1

넘나 무서운것...
프로듀사
끈을 원점 반대편으로 넘긴다는 정의가 뭔가요...?
주문파괴자
이 상황에서는

양 끝이 동일한 두 개의 끈(A,B)이 서로 반대편에 있다 <=> A와 B의 양 끝을 붙였을 때 나오는 닫힌 폐곡선이 원점을 내부에 포함한 원과 같은 연속변형관계에 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문제를 "원점을 포함하는 원을 두 개의 끈으로 나누었을 때 각 끈이 서로 연속변형관계에 있느냐"로 시작했으면 좀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R^2이 뭔가요..? 전 여기서부터 막혔어요!
R^2이 극좌표계..?면 i란 점도 R^2에 있어야 하는데 그림이랑 다른것 같아서..
와일드볼트
그냥 가로 세로로 무한대로 펼쳐진 2차원 평면요..
좌표계를 표현하는데 필요한 실수가 두 개(RxR)라서 R^2!
주문파괴자
R^2는 와일드볼트님 답글대로 직교좌표계로 주어진 평면입니다.
수학 단어가 어색해서 무슨뜻인지 이해하는데 헤맸네요 ㅎㅎ...
점프 안하고 줄넘기로 해석했더니 이해가 됩니다.
저 문장이 줄넘기로 안 읽혔을까요.... ㅜㅜ
주문파괴자
점프하지 않고 줄넘기 맞습니다ㅎㅎ 좋은 비유 감사드립니다.
본문에도 추가해놔야지..
와일드볼트
구간적분에 원점이 i로 적혀있는걸로 봐서 pole이 i인 수식의 구간적분 예제에서 그림을 잘라온게 아닌가 하는 킹리적갓심을 해봅니다.
주문파괴자
https://en.wikipedia.org/wiki/Estimation_lemma
여기서 가져왔습니다ㅎㅎ 직접 그릴까 하다가 괜찮은 그림이 있길래 여기서 가져왔어요.
조금 더 캐주얼하게 시작해보시는 데서...전 이만.
에스와이에르
재밌습니다 ㅋㅋ 근데 제게 이런 부분은 지적유희로 남겨두는 것이....제 머리로는 전공삼지는 못하겠네요... 공학수학만으로도 힘들어서...ㅜㅜㅜ
명랑소녀
0.999...=1인가 하는 유명한 떡밥도 사실 실수의 구조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죠. 수학에 재밌는 문제가 참 많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주문파괴자
ㅎㅎ 맞습니다. 글쓰기 전 생각해봤던 주제 중 하나입니다. 저는 "(실수집합의 수직선 모델을 받아들인다면) 0.999...=1일 수밖에 없다"고 요약하고싶네요
재밌게 잘 봤습니다! 흥미롭고 유익한 글 감사드립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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