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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9/09 19:34:19
Name   웃는눈
Subject   터널 진입 중
"미안한데 소개팅했어."

직감은 하고 있었지만 직구로 맞게 될 줄은 몰랐던 일이었다.
만난 지 10년 넘었지만 안정적인 연인이었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7살의 나이 차이로 뭐 어쩔거냐 라는 생각으로 상대가 있거나 마음이 식었다고 느껴질 때 연락을 받지 않거나 그만하자고 말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3년 전에도 그런 상황에서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그가 살던 근처로 이사오게 되어서 연락을 주고 받다가 만난 그가 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말했다.
"누나 나 암 이래"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생각이 안난다. 수술과 이사를 동시에 해야 했고 퇴원 후 한 달은 매일 그의 집으로 퇴근해야 했다.

그 해 가을 엄마도 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 후로 일주일에 한 번쯤 집과 드라이브로 이어지던 관계는 엄마의 재발로 정신없는 상황에서 가끔 그의 직장동료의 홈 로스팅 커피를 받기 위해 얼굴이나 보는 정도가 되었다. 엄마가 거동을 못하시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간병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잠깐씩 묻지도 않고 어디론가 달려주며 머리를 식혀주던 그가 어느 때보다 고마웠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주에 친구에게 빌려 온 오픈카로 한 밤 드라이브를 나갔는데 여자 이름으로 카톡이 왔다. 그리고 여러 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또 내가 스탑이라고 말했다.

6개월이 지나 연락이 왔다. 상대가 생긴 것도 문제였지만 잠을 자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매일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 마시고 담배 두 갑을 피우는 그가 다시 아프게 되는 상황을 보게 될까 봐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3년 차 암 검진을 앞두고 있었다. 병원에 같이 가주겠냐고 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건강은 나빠보이지 않았지만 검진을 앞둔 불안과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재발하지 않았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진 그는 다시 자상하고 따뜻해졌다.

하지만 간병과 퇴사, 장례 이후에 난 괜찮을 거야 라고 되뇌며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자격증을 따고 준비했지만 40대 후반의 재취업은 쉽지 않았고 진로도 막막했다. 서울에서 23년간의 직장생활을 해 온 나로서는 낯선 도시에서 친구 하나 없는 백수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고 살도 심하게 쪄서 약물로 체중조절을 시작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의 통화 중에 그가 말했다. 더 이상 내가 누나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은 아닌 거 같아. 아니, 지금은 내가 너한테 신세를 지고 있는 건데, 다시 말하지만 누가 생기면 언제든지 꺼져줄게.라고 말했다.

부탁한 일이 있어 톡을 보냈는데 이틀 동안 답이 없었다. 왜 답이 없냐고 하자 전화를 걸어온 그의 얼굴이 무척 붉었다. 뭐 봤길래 그러냐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그가 몹시 화를 냈다. 어디로 여행을 떠나든지 뭘 하려고도 하지 말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쉬라는 내용이었는데 뜬금없었지만 걱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커피 봉투를 들고 나타난 그가 말했다.

"일요일에 소개팅해서 잘 되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연락하지 말라고?"
"그래야겠지. 커피 만드는 형 번호 줄까?"
"내가... 그 커피를 왜 마시니?"
"누나가 그동안 나 세 번 찼잖아. 근데 앞으로 내가 연락해도 무시해 줘."

그가 떠나고 욕실 불을 켜자 쩍 소리를 내며 등이 꺼졌다. 깜깜한 욕실에서 웃음이 나왔다. 인과응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가라앉으면 다시 얘기하자고 했지만 매번 그런 상황에서 보였던 무심하고 공감없는 그의 태도에 비추어 대화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심약한 상태여서인건지 이별 통보가 예상을 뛰어넘게 무례한 것이어서인지 그 날부터 당장 잠이 안왔다. 다이어트 주사를 맞지 않아도 물도 한모금 넘기기가 어려웠다. 한 주 전까지 동호회 다녀오는 길에 사다준  두부전골을 가족들과 나눠 먹은 상태라서 말을 꺼내기가 너무 쪽팔렸다. 나도 그랬을까. 서로 그 자리에서 필요할 때 도움 주는 안정적인 관계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병상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니가 아무리 좋아해도 누구한테 가겠다고 하면 좋게 놔주거라."
얼굴도 본 적 없는 인간을 엄마도 다 파악했는데 나는 혹시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이틀정도 멍한 상태로 냉장고 문도 열지 못한채 모임에 나가서 말 한마디도 못꺼내고 휘척휘척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갑자기 숨이 안쉬어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예전 직장에서 회장이 횡령사건과 관련한 임원들을 거의 고문하다시피 하면서 회사 문을 닫겠다고 하던 무렵에 비슷한 발작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겨우 기다시피 한의원에 갔다가 병상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쉬다가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지만 그 이후로 상황은 진정이 되어서  회사도 나도 작동이 잘 되는 듯했다.

병원을 검색했다. 예약은 5일 후에나 가능했고 그 사이에 연락을 몇번 하게 될테니 피하지 말고 잘 받으라고 했다. 비상연락처를 받고 사전 설문지를 작성해서 반송해달라고 했다. 설문지는 장장 6장에 달했고 성장배경과 가족력까지 자기소개서를 능가하는 TMI 였다. 설문지를 작성하면서 찬찬히 상황과 문제를 살펴보면서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정말로 예약 전날 전화와 문자로 생사를 확인하더라.
막상 병원에 갔을 때는 또다시 증상과 관련된 산더미 같은 설문지를 또 쓰게 했다. 의사를 만나고 몇마디 안했는데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티슈를 건네 주거나 하지도 않았고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네요' 라고 말하고 증상과 원인에 대해 물어보고 이렇게 말했다.
"**씨는 지금 터널에 진입했어요. 언젠가 터널은 끝나는 거니까 이제 라이트를 켜고 무리하게 달리지만 않으면 돼요. 블라블라. 약먹으면 괜찮아요. 실연문제, 음 이런 걸로 많이 와요. 보통 6개월 정도 생각하고 진행을 봅시다."
그리고 약의 모양과 색깔을 찬찬히 설명해 주고 약효에 대해서 설명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집에 돌아와 공통적으로 우울에 효과가 있다는 작은 알약 세알을 삼켰다. 세상이 휘청하더니 소파에 쓰러져 눈을 뜰수가 없었다. 2시간 후 눈을 떴는데 일어날 힘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밤이 늦어지자 다시 졸음이 쏟아지고 평평한 램수면이 아침까지 이어졌다.

아마도 나는 아픈 그의 곁에서 간호하던 시절을 못벗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술 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의 이삿짐을 정리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마른 몸을 쓸어주며 울던 그 때가 우리 관계에서 가까운 때였고 의미가 있었고 지속될 거라고 믿었나보다. 2년 뒤 완치 판정을 받고 나면 아픈 사람이 아닌 건강하고 매력적인 남자로  적당한 나이와 조건에 맞는 상대와 결혼을 하고 늦었지만 아이를 갖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식은 마음을 붙들고 빚갚는 기분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걸 이해해야 돼요?" 라고 후배는 말했다. "갱년기가 코앞인  여자가 꼴뵈기 싫어서 추방당한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편하겠니?"

지금 나는 인생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스트레스인 상황 몇가지를 한꺼번에 겪고 있는 중이다. 핸들 꽉 붙들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잘 밟아서 터널 출구를 찾아야 할 뿐이다. 장롱면허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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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이팅입니다
  • 모든 상황은 나에게 와서 비로소 의미가 생기니까 힘내세요.
  • 터널 속과 같은 글이에요
  • 빛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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