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0/13 20:58:30수정됨
Name   멍청똑똑이
Subject   이별의 시작
가을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남녀가 집을 나오기 전에는 이별을 준비했을까. 분홍색 종이로 쌓인 꽃다발을 가슴팍에 던졌을 때, 꽃향기가 그 남자에게는 느껴졌을까. 숙취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동네 커피숍을 향하는 길에, 우연히 남의 이별을 목격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리 위는 하늘색인데, 저 멀리 교회 십자가와 커다란 빌딩 사이로는 샛누런 하늘이 이어진다. 도시의 가을 하늘 답다는 생각과 함께, 비단 하늘이 아니라 사람 사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마주 보고 있으면 맑고 푸르른 그대도, 한 발자국씩 멀어지다 보면 샛누런 색으로 변해간다. 둘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어쩌면 아직도 한 사람만큼은 푸르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활짝 핀 미소와 어울렸어야 할 꽃송이들이 거뭇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둘은 왜 아무도 꽃다발을 잡으려 하지 않았을까. 서로의 색이 다른 온도로 변해가는 것을 그들은 막을 수 없었을까 하는 의미 없는 물음이 떠오른다.



남자의 트렌치코트와 넓은 어깨, 쭉 뻗은 손가락, 말끔한 얼굴이 그녀에게 사랑이었을 때, 그 역시 그녀를 사랑했을 터였다. 이유는 한 가지일지도, 혹은 여러 가지 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헤어짐에는 몇 가지 이유가 필요했을까. 꽃 집주인에게 예쁜 꽃을 골라 담던 남자의 마음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이딴 거 필요 없다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들어버린 여자의 비명에, 나는 무척 개인적이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그 순간의 모습에 상상을 더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별이, 누군가의 보편이 되어 그려진다.



여자의 발걸음이 하염없이 멀어진다. 남자는 천천히 꽃다발을 줍는다. 뒤 돌지 않는다. 만남이 사랑의 시작이었듯이, 헤어짐은 이별의 시작이다. 그것은 긴 계절과 함께 흐를 것이다. 절기가 바뀌고, 하늘의 색이 바뀌고, 망가진 꽃다발의 향기가 사그라드는 것과 함께 이별은 발걸음을 맞춘다. 이윽고 도로 끝에서 사라지는 '저 여자'를 보며, '그 남자'는 걸음을 옮긴다.



커피숍이 있는 모퉁이를 돌자, '저 여자'가 건물 벽을 바라보고 서있다. 실례가 될까 싶은 마음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 해도 어깨의 들썩임이 크기도 하다. 남자에게는 이별의 시작이 꽃 향기였다면, 여자에게는 차가운 대리석의 거뭇한 때 낀 기둥의 모습이다.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이어질 수 있는 끈은, 누구의 마음 탓인지 멀어져 간다. 흔하디 흔한 이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순간이나 다름없지만 둘에게는 오늘을 잊기가 무척 힘들 것 같았다.



오늘의 커피를 들고 나왔을 때, 거리에는 그 남자도, 저 여자도 온데간데없다. 다만 서로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몇몇 커플들만이 이 자리에는 어떤 슬픔도 없었던 것처럼 밝은 미소로 거리를 걷는다. 발걸음 사이로 느껴지는 가을바람에 사랑을 남기는 사람들. 그 예쁘고 애틋한 마음들 만큼이나, 누군가에겐 꽃과 바람이 오래도록 그리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들의 평화를 빈다. 생각보다 오래도록 덜어내야 할 이야기의 마침표에도 향기가 남아있기를.




20
  • 감성 너무 좋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352 사회섹슈얼리티 시리즈 (1) - 성인물 감상은 여성들에게 어떤 이득을 주는가? 29 호라타래 20/03/06 6916 20
10319 일상/생각불안에 대한 단상 2 안경쓴녀석 20/02/23 3845 20
10052 의료/건강꽃보다 의사, 존스홉킨스의 F4(Founding Four Physicians) 11 OSDRYD 19/12/06 5287 20
9832 일상/생각이별의 시작 16 멍청똑똑이 19/10/13 4403 20
9684 일상/생각서울 6 멍청똑똑이 19/09/19 3579 20
9612 일상/생각조국 워너비 이야기 67 멍청똑똑이 19/09/02 6523 20
9561 정치홍콩의 재벌이 신문 광고를 냈습니다. 10 Leeka 19/08/18 5142 20
9543 꿀팁/강좌영어 공부도 하고, 고 퀄리티의 기사도 보고 싶으시다면... 8 Jerry 19/08/14 5770 20
9343 일상/생각매일매일 타인의 공포 - 안면인식장애 25 리오니크 19/06/25 4630 20
9319 과학/기술0.999...=1? 26 주문파괴자 19/06/14 6801 20
9251 일상/생각알콜 혐오 부모님 밑에서 과다 음주자로 사는 이야기 9 Xayide 19/05/29 4352 20
8785 여행혼자 3박 4일 홋카이도 다녀온 이야기 (스압) 20 타는저녁놀 19/01/21 8065 20
8666 정치스물 다섯 살까지 저는 한나라당의 지지자였습니다 (6) 5 The xian 18/12/20 3640 20
8336 일상/생각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함에 대하여 12 일자무식 18/10/07 5044 20
7851 여행어두운 현대사와 화려한 자연경관 - 크로아티아 12 호타루 18/07/15 4586 20
7643 기타(마감) #전직백수기념나눔 #책나눔이벤트 36 la fleur 18/06/09 6220 20
7526 의료/건강술을 마시면 문제를 더 창의적으로 풀 수 있다?!!!! 60 소맥술사 18/05/15 5910 20
7457 일상/생각선배님의 참교육 12 하얀 18/04/29 4863 20
7820 의료/건강고혈압약의 사태 추이와 성분명 처방의 미래 28 Zel 18/07/10 5102 20
7351 정치미중갈등의 미래와 한국의 선택 18 Danial Plainview 18/04/08 4645 20
7333 생활체육산 속에서 안 써본 근육을 쓰다가 5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8/04/04 5628 20
10370 정치일본의 검사억제 표준 - 일본의 여론 53 코리몬테아스 20/03/11 6199 20
7141 일상/생각사라진 돈봉투 4 알료사 18/02/21 4783 20
7106 IT/컴퓨터금융권의 차세대 시스템이 도입되는 과정 34 기쁨평안 18/02/13 12550 20
6949 일상/생각이불킥하게 만드는 이야기. 28 HanaBi 18/01/16 3785 2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