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게시판입니다.
Date 16/04/19 23:48:58
Name   김덕배
Subject   \'가람과 바람\'을 추억하며


다들 창세기전에 열광할 때,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를 거쳐 디아블로에 빠져있을때
저에게는 '가람과 바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그리곤 엔터테인먼트가 전부였습니다. 그 추억을 한번 이야기해보고자합니다.

순서 상으로는 레이디안-심연속으로, 씰-운명의 여행자들, 나르실리온, 천랑열전(쓰면서도 부들부들합니다)이겠지만 제가 접한 순서대로 말해보겠습니다.

스포는 많지 않습니다.


씰, 파스텔 RPG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잘 보면 게임을 산다, 이것이 제 학창시절의 지론이었습니다. 패키지 게임을 사서 장롱위에 전시해놓는게 제 낙이었죠. 그런데 아쉽게도 씰은 정품 CD가 아니라 당시 게임잡지의 부록으로 접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 영웅전설5와 제노에이지 등을 하던 저는 씰이라는 게임을 하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당시에 세계관이 완전히 연결되지 않았고 다른 편에 비해 아쉬웠던 영웅전설5나, 게임은 재밌었지만 뭔가 만들다 만것 같은 제노에이지와 달리 씰은 그 한 작품으로 완전했고, 다른 게임처럼 요란한 느낌이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그 내용의 전달히 충분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씰은 파스텔을 닮았습니다.


씰은 '에라스네츠의 예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험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씰의 캐릭터는 다소 전형적인 데가 있습니다. 불같지만 냉철한 검사 듀란, 우유부단한 기사 아루스, 활동력은 있지만 그다지 특이하지 않은 공주 클레어, 어디에나 있을 법한 말괄량이 발데아, 그리고 마법사 베오린. 하지만 씰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자 주인공들의 숙적인 갈라드리엘을 대상으로 한 다섯가지 '감정'과 그에 대응하는 다섯 인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런 전형성은 다소 의도된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게임 내에서 캐릭터들은 일관되게 오오오오 분노 오오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겪으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언을 밝혀가는 과정에서 각 주인공들의 목적이나 감정의 흐름은 지금껏 나온 거의 모든 한국게임에서 가장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전이나 악튜러스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씰의 전투방식은 타임게이지와 그에 따른 턴제인데, 파이널 판타지와는 시점이 반대로 되어있어서 캐릭터들의 액션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몬스터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몰입이 안가는 단점도 있씁니다.) 씰의 캐릭터들은 뛰는 모습도 제법 자연스럽고 귀여운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발데아의 일기장이라는 시스템을(지금까지의 여행에 대해서 말괄량이 발데아의 입장에서 쓴 글로, 스토리 진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해서 소소한 재미도 있으며, 일본식 RPG처럼 스토리 진행은 단선적이지만 필드 이동은 제법 자유롭기 때문에 여러가지 꼼수를 쓸 수도 있습니다.(절대 잡을 수 없는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던전에 가서 몬스터들과 싸우지 않고 숨겨진 고급 아이템만 먹고 나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재밌는 요소들이 가득한데, 정보를 주는 아이가 돈을 요구할 때 안준다고 하면 쪼잔하다고 하면서 지금 세이브하고 돈 주고 정보 얻은 다음에 로드하면 되지 않냐고 합니다. 그리고 돈을 줘서 보스를 물리치고 그냥 게임끝! 같은 엔딩도 있지요. 확실히 알면 알수록 재밌는 구석이 많은 게임이었습니다.


씰은 나중에 온라인게임이 되기도 했습니다.



레이디안, 비극적이고 아쉬운.

레이디안은 씰보다 먼저 나온 작품입니다. 레이디안은 '심연 속으로'라는 부제에 걸맞게 분위기가 몽환적입니다. 처음에 엘렌의 스탯을 정할 때 '세피로트의 나무'와 연계하여 결정하는데, 이때 나온 음악도 참 기억에 남네요. 음악과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레이디안은 정말 잘어울리고 훌륭합니다. 그리고 다소 수수한 씰보다는 기억에 남습니다.


레이디안은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엔딩도 찝찝하기 그지 없죠. 처음부터 불행을 잉태하고 있었던 주인공은 끝끝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열심히 게임했건만 일루바타르가 나타나서 '메테오!'할 때 얼마나 허무하던지. 엘렌의 동료는 후린과 애스타드가 있는데, 엔딩도 저 두 분기로 나뉩니다. 그리고 씰에 비해서 확실히 스토리를 체감하기 힘듭니다. 필드이동은 자유로운데 스토리의 맥은 놓치지 않았던 씰과 달리, 필드이동은 제법 자유로운데 스토리로 가득찬 느낌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서브퀘스트가 부족한 탓도 있는데, 실제 게임에서 '개발자가 넣을 퀘스트가 없어서 넣었다'라는 게 있을 정도니 더 아쉽습니다. 그래도 스토리의 큰 맥은 확실하게 가져가고 있고, 엘렌의 비극은.... 너무 단순하고 선명해서 느껴질수밖에 없습니다. '왜 행복할 수 없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게임이랄까요.


레이디안도 캐릭터 성이 제법 다양합니다. 마검사 엘렌, 무투가 애스타, 성기사 후린, 기사 카토니스, 그리고 기억 안나는 총쏘는 카토니스의 딸까지... 적군도 개성이 넘칩니다. 보통 마법사지만 니에노르같은 캐릭터는 시대를 앞서간 매력이 있는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인지 니에노르는 후술하는 나르실리온에도 등장합니다.


다만 레이디안은 초기작이라 그런지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레이디안은 ARPG(액션 RPG)인데, 캐릭터들이 뛰는 모습은 팔을 거의 안움직이고 다리만 크게 움직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씰에서 이 부분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초기에 두더지들이 너무 강력해서 거기서 게임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카토니스가 돌진하면서 칼질하는 모습이라던가, 전투 시작할 때 후린이 성호를 그으면서 '신이시여...'하는 모습은 충분히 멋진 연출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도 후린이 '신이시여...'하는게 생생하네요.



나르실리온,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레이디안과 씰 때문에 가람과 바람의 광팬이 된 저는, 우연찮게 TV에 출현할 기회가 있을때 팀 이름에 '가람'이나 '바람'은 꼭 넣어야 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지경에 이릅니다.(결국 넣었습니다.) 가람과 바람이 그리곤 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고 나서 나르실리온이 나왔을때 저는 엄청 흥분했고, 체험판이 1GB라는 용량으로 나왔음에도 한참을 기다려 다운을 받았죠. 학생이라 돈이 없어서 끙끙 앓다가-시험도 없고- 할인하자마자 바로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한 나르실리온은.... 글쎄요.


나르실리온은 레이디안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레이디안의 주인공 엘렌의 어머니 마도사 레이나와 아버지 엘의 이야기입니다. 레이디안은 2D를 극한으로 뽑아냈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는지 너무 눈이 아픈 게임이 되어버렸습니다. 전투도 정신없이 쾅쾅하는 느낌이었는데, 레이디안이 파티장만을 직접적으로 조종하면서 사실상 1인 액션을 한 느낌이라면 나르실리온은 그냥 정신없이 부셔부셔 하는 느낌? 전투를 재미없게 한 기억이 가득합니다.


나르실리온은 스토리는 준수합니다. 레이나의 친구 마도사들을 레이나가 처치하는 이야기는 정말 슬프고, 그 와중에 태어난 딸 엘렌의 미래는 이미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이기에 가슴이 아픕니다. 예정된 비극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흥미진진할 때, 나르실리온은 그 비극을 두 남녀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으로 봉합합니다. 엘렌은 엘의 친구손에 맡겨지고, 루이닐을 사로잡았던 퓨리는 다른 대상을 찾는 등, 비극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중화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나르실리온은 앞선 게임들에 비해서 확실히 부족했는데, 캐릭터와 효과를 지나치게 밝게 해서 액션의 맛을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게임맛을 낮춰버린 느낌이랄까요. 덕분에 캐릭터들에게 몰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밸런스 역시 문제인데, 그냥 엘과 레이나로 거의 모든 걸 합니다. 엘렌, 후린 그리고 애스타드라는 3각편대의 레이디안이나, 5캐릭 전부 개성넘치는 씰에 비해서는 단순합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이 다음 작품에 더 크게 다가올 것을, 저는 그때 알았어야 했습니다.



천랑열전, 나는 이 게임을 깔 권리가 있다

가람과 바람의 팬이었기 때문에, 천랑열전을 재밌게 읽었기에, 게임으로 나온다는 것만해도 저는 흥분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랑열전 게임 홈피에서는 SoundTeMP의 노래와 일부 캐릭터들의 기술소개를 하였는데 하루라도 안 들어간 날이 없었습니다.(모용비의 격공장!은 아직도 기억나네요.) 그렇기에 예약구매를 당연히 했고, 4만원이상 무료배송인데 가격을 39800원으로 해서 배송료 3000원까지 물어서 42800원을 지출하고 저는 2달 정도 게임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정된 날, 게임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게임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게임이 많이 이상하다는 커뮤니티의 글을 읽습니다.

다음 날, 게임이 왔습니다. 패키지는 정말 정말 대박이었습니다. 앨범식으로 일러스트가 가득한 패키지! 그리고 게임을 깔자 실망이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이 게임은 다 만들기 전에 왔습니다. 연오랑과 월하랑 두 시점에서 게임을 진행하게 한다는 것은 그냥 연오랑 혼자 하는 것이 되었고(나중에 추가되긴 합니다), 기술들은 심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냥 오프닝이 제일 좋았어요. 패치 CD가 한두개씩 날라왔을 때도 크게 달라지는 것 없었습니다. 사극성연주붕격이었나 극성현무칠연격이었나는 한대 때리고 말기도 하더군요. 말은 이상하게 뛰고... 그냥 연오랑을 3D카툰렌더링으로 감상하는 비용이 42800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월하랑은... 그 와중에 낭자 낭자가 아니라 사내 랑자를 썼더라구요.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지금의 저였다면 소송을 진지하게 생각했을 정도의 처참한 퀄리티의 게임이었습니다. 아쉬워하면서 패키지만 바라봤었네요. 마그나 카르타? 손가락이 벙어리 장갑이라도 캐릭터들은 완성이 되어있었고, 칼린츠의 목소리는 좋았잖습니까.(저... 에스텔 ... 돌아왔어요) 진지하게 천랑열전은 환세취호전의 액션신의 반의 반의 반도 못따라간 졸작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게임을 깨긴했지만 이게 대체 뭔지... 그리고 천랑열전을 끝으로 저의 '가람과 바람', '그리곤'에 대한 사랑도 끝이 났습니다.


RPG를 추억하며

그리고 한국 RPG는 온라인이 아니고서는 구경하기 힘들게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창세기전3파트2, 악튜러스로 최전성기를 구가한 한국RPG의 정점에 씰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그 시기에 최고의 게임은 씰이었고, 레이디안과 나르실리온도 다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천랑열전을 마지막으로 그 사랑과 아쉬움은 갈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씰도 계속하고, 창세기전도 계속 했었네요.


게임은 여러 사람에게 다양하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맛을 느끼느라, 어떤 사람은 스펙을 쌓기 위해. 하지만 제게는 게임은 종합 텍스트로 음악과 그래픽, 그리고 글을 하나로 엮어서 스스로 체험하는 가장 진보한 텍스트였습니다. 그렇기에 소설같이 닫혀있는 RPG를 선호했고, 그것을 몇번이나 플레이하면서 감성에 젖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씰'은 '죄와 벌'만큼이나 소중한 텍스트였습니다.(작품의 위대함 정도는 차치하고) 그 기억이 떠올라서 감자줄기처럼 다른 게임까지 줄줄이 이야기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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