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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4/07 11:18:46
Name   바보왕
Subject   하이퍼 FPS와 한국 게임의 상호 단절
같은 문화를 향유한다고 해서 같은 집단이 되지는 않습니다. 갈라파고스화라는 일본어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같은 장소라도 다른 시대와, 같은 시대라도 다른 장소와 어울리지 않으면 집단은 외부와 유리된 이해범주를 누리게 되고, 이는 곧 특수한 용어와 개념의 창발로 이어집니다.

사실 흔하고도 당연한 일이고요.

보통 이런 개념이 긍정적인 현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제가 말하려는 대상은 좀 더 부정적인 현상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단절이 낳은 왜곡입니다.

한국 게임도 당연히 외부와는 동떨어진 이해범주를 규정하는 특수한 용어를 쓰곤 하는데, 그 중에는 [하이퍼 FPS]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슈퍼 FPS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하이퍼 FPS는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하이퍼라니, 도대체 뭐가 하이퍼하단 말인가? 사실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물어봐도 말도 안 해줍니다. 아니 말을 해주는 사람끼리도 누가 맞는지 놓고 싸웁니다. 장르의 정의를 놓고 키배가 벌어지면 그게 장르가 맞기는 한가요?

다만 대답을 해주는 사람의 의견을 통틀어 보자면 어떤 경향은 있습니다. 우선 배경이 되는 시대가 현대보다 앞서나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광대한 우주 공간이 배경이라는 뜻일까요?

어떤 사람은 콜옵, 배필, 혹은 ARMA나 레드 오케스트라 같은 밀리터리 혹은 택티컬 슈터 게임과 구분되는 긴장성, 격렬함, 높은 플레이어 체력 수준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쏴제치고 총알을 맞아도 레인보우 식스보다는 쪼끔 더 오래 산다 이거죠.

여기서 의문이 시작됩니다.

시대가 미래라면 하이퍼 FPS인가요? 딥 락 갤럭틱, 데드 스페이스, 섀터드 호라이즌, 스타워즈 배틀프론트(....엄밀히 말하면 과거지만 넘어갑시다) 같은 게임은 모두 하이퍼 FPS일까요?

우주 드워프와 데드 스페이스가 그렇게 분류되는 건 한 번도 못 본 데다(데드 스페이스의 경우 숄더 뷰라는 시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디자인이 말이죠) 섀터드 호라이즌, 배틀프론트는 그냥 배필에 우주 스킨 씌우고 영웅유닛 나오는 것뿐이지 않던가요? 하이퍼 FPS 용어를 쓰는 사람도 이들 게임을 그쪽으로 분류하는 경우는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격렬한, 그리고 체력 수준이 높은 (단순히 숫자가 높다 낮다가 아니라, 피해를 받았을 때 생존 가능한 기회가 많고 평균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사례라는 뜻입니다) 게임이면 하이퍼 FPS입니까? 그런 게임을 제가 몇 개 알고 있습니다. 배틀그라운드, 워해머 버민타이드 2, 페이데이, 콜오브 듀티 모던워페어 시리즈. 특히 모던은 동명의 클래식 넘버 시리즈에 비해서 체력 수준이 높고, 전장의 구성이 과격하다는 평가를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이퍼 FPS인가요?

오히려 체력 수준이 극도로 낮고 (그러니까 한 번 물리면 메르시 바티스트가 오지 않는 한 순식간에 죽는 게 일상인 게임이란 소리죠) 팀단위 전술전략 또한 개인 실력만큼 중요하게 보는 오버워치를 '느낌이 그러니까' 하이퍼 FPS의 대표로 언급하는 데서 저는 모순의 극치를 느낍니다.

그럼, 오버워치의 디자인 전신인 팀포 시리즈도 하이퍼 FPS로군요. 이렇게 되물었을 때, 사람들은 "당빠지 이 멍청한 놈아!"와 "아니 그건 다르지 이 멍청한 놈아!"로 대답을 가르기까지 하죠. 왜 하나는 논란의 대상인데 다른 건 논란조차 되지 않는 겁니까? 그래도 발로란트가 하이퍼 FPS인지 여부는 논란의 대상은 아니더군요.

여차저차 정리하면, 한국에서 말하는, 그리고 제가 이해하는 하이퍼 FPS라는 장르는 스스로의 경계조차 짓지 못한 ['그냥 느낌이 좀 그런' 총겜의 집합]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장르를 구성하는 사례조차 원칙 없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원칙에 의해서 한 장르로 인정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일은 다를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렇습니다.

왜곡은 대체로 단절에서 발생합니다. 같은 장소의 다른 시대, 혹은 같은 시대의 다른 장소와 외따로 떨어진 상태에서 타자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타당함을 강요하는 데만 치중하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각종 논리를 만들어내게 되는 거죠.

논리의 완결성을 위해 해당 문화권 사람들이 뭉쳐 커뮤니티나 위키의 탈을 쓰고 타당성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더 큰 물과 섞이지 못한 상태에선 결국 똑같은 사람들끼리 맞장구치는 소꿉놀이일 뿐. 외부인이 보면 "그럼 이건 왜 아니냐" 소리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뭐... 지류를 무시한 채 주류에서만 몸담그고 노는 사람들이 서로 짝짜꿍하는 것도 똑같은 소꿉놀이일 뿐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이쪽은 그나마 다양함이 모여 수렴하는 보편성을 흉내라도 내긴 합니다.

한국의 경우 게임에 단절이 가시화된 최초의 계기가 저는 PC방의 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딱히 통계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왜곡이 발생하는 한국 게이머 집단이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이해와 몰이해의 대상을 볼 때, 명백히 나타나는 어떤 경향성이 있거든요. (물론 그 이전에서 80년대 게이머와 90년대 게이머, 아케이드 게이머와 어드벤처 게이머 사이의 의견 갈등은 있었습니다)

스타와 바람, "조금" 더 역사가 유구하면 창세기전 단군의땅이 홈구장인 반면 위저드리, 둠, 웨이스트랜드(특히 1), 미스트 같은 게임은 잘 나오지 않죠. 한편 후자의 게임군을 자주 언급하는 집단은 반대로 "큰물"의 개념 역시 자유롭게 끌어다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요, 한국 집단이라도.

바꿔 말하면, 한국 게이머 사이에서도 즐기는 게임의 범위에 따라 이해의 단절이 나타날 수 있고, 이미 그 단편이 시야에 잡힌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리고 PS2를 시작으로 한 게이밍 콘솔의 보급, PC 사양의 상향 평준화, 아프리카와 트위치를 이용한 게임 방송의 대두 등 한국 게임계는 때로 보편하고 때로 특수한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저변을 넓혀 나갔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유입된 새로운 소비자끼리 서로의 영역을 교환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아직도 한국 게이머들은 서로에게 낯선 존재라는 거죠. 콘솔이나 하는 놈, 스팀이나 하는 놈, 롤이나 하는 놈, 와우나 하는 놈, 뭐뭐나 하는 놈. 개돼지, 씹덕, 비틱 등의 용어가 단순한 멸칭이나 웃음거리가 아닌 "용어를 쓰는 사람의 정체성"까지도 규정하고 있다는 현상은 한국 게이머가 겪고 있는 상호 단절의 좋지 않은 편린입니다.

그리고 그 상호 단절의 표면에는, 공통점과 차이라는 원칙 대신, 한 게임이 다른 게임과 정확히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구분하려는 노력 대신, 한 게임과 닮은 다른 게임이 무엇이 있고 닮지 않은 게임은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모험 대신 향유자의 느낌을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 장르 용어가 있습니다.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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