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1/08 20:14:14
Name   사이시옷
Subject   쭈글쭈글

어렸을 땐 밥 빨리 먹는 것이 정말 멋져 보였어요.

뭔가 능력이 있어 보였거든요. 사실 잘하는 게 별로 없었어서 그랬는지 몰라요.
빨리 먹는 게 제일 만만해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밥을 먹을 때마다 빨리 먹으려 노력했어요.
씹는 횟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빨리 삼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빨리 삼키면 그만큼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냈어요.
많이 먹고 빨리 먹을수록 주변 어른들은 박수를 쳐줬어요. Success!

그러다 보니 모든 일을 빠르게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무엇이든 많이 경험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빠르게와 많이'는 '바르게와 깊게'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몰랐네요. 이건 마치 여행지 이곳저곳을 부리나케 달려가 깃발만 꼽고 나오는 것 같은, 주요 관광지에서 사진만 찍고 바로 다음으로 이동하는 삶.

그냥 뷔페의 모든 메뉴를 한꺼번에 섞어 입에 밀어 넣듯이 세상을 살아왔어요. 분명 먹어보긴 했지만 맛은 잘 몰라요. 이게 짠맛인지 단맛인지 쓴맛인지. 모두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되기 전에 비빔밥이 되었다가 응가가 되어버렸거든요.  

쭈글쭈글

그래서 깊이가 없어요. 남들은 응당히 하나씩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 같은 통찰도 없고 어른 같은 영근 생각도 부족해요. 늘 과거를 돌아보지만 성장은 별로 없어요. 어쩌면 그저 잘한다 잘한다 어른들이 박수를 쳐줬던 과거에 얽매이고 있을 뿐인지도 몰라요. 많은 것을 빠르게 집어삼켰지만 결국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로 남아버렸네요.

나이가 마흔 줄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박수를 쳐주던 어른들이 하나 둘 사라졌어요. 이제는 제가 다른 이들을 위해 박수를 쳐줘야 하는데 저는 여전히 박수를 받고 싶어요. 그러니 박수를 쳐주는 척하면서 은근히 나에 대한 박수를 구걸하죠. 그렇게 엎드려 절을 받으면 당장 기분은 좋아지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그냥 땅 밑으로 숨어들고 싶어요.

박수가 줄어 들어서, 성장하지 못해서 자꾸 저를 질책하게 돼요. 즐거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가 뱉었던 말들을 늘 후회해요. 그리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계속해서 돌아보곤 해요. 이미 바꿀 수 없는 과거인데도 말이죠.

쭈글쭈글

그냥 쭈글쭈글해져서 그래요. 모두 이런 시기 있잖아요. 그렇죠?
크게 잘못한 건 없는데 스멀스멀 작은 실패들이 등을 타고 기어 올라오고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을 마주치기가 어렵고
이 실패들이 결국은 내가 고치기 힘든 근본적인 단점에서 태어난 것을 깨달을 때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건데요 뭘.
제가 잘못한 작은 실수들만 인정하면 되는데 인정을 하려 하니 제 모든 게 깎이고 베여 피가 나네요.
너무 아파요.

그래도, 그래도 며칠이 지나면 또 밝아질 거고 또 많은 것을 빠르게 입에 욱여넣을 거예요.
그리곤 또다시 쭈글쭈글 해질 때면 가오나시처럼 먹은 것들을 토해내고 다시 어린아이처럼 작아질 거예요.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반복하겠죠.

어쩔 수 없죠. 뭐. 어쩔 수 없죠.



6
  • 통찰이 깊은 글이네요 멋집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41 6
14625 의료/건강SOOD 양치법 + 큐라덴 리뷰 3 + 오레오 24/04/26 195 0
14624 일상/생각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4 kaestro 24/04/26 322 1
14623 방송/연예요즘 우리나라 조용한 날이 없네요 6 + 니코니꺼니 24/04/26 613 0
14622 IT/컴퓨터5년후 2029년의 애플과 구글 1 아침커피 24/04/25 357 0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63 치킨마요 24/04/25 1672 0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135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597 17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8 kaestro 24/04/24 1127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812 9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78 14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405 8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49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15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34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2 joel 24/04/20 1235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66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88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30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93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67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53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23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66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89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