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9/03 22:11:00
Name   nothing
Subject   게임을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네요.
요즘 틈틈히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 라는 게임을 합니다. 밥먹고 쇼파에 누워 소화시킬 때,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볼 때, 자기전에 침대 위에서도. 요즘은 책도 잘 읽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국이니 외출이나 산책도 멀리한지 오래구요, 그냥 게임만 합니다.

어릴 때도 게임을 좋아하긴 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제 또래 분들은 다 비슷비슷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릴 때는 게임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많지 않으니 매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피씨방을 나와야 했습니다. 특히나 고등학교 때는 살인적인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학교 밖에 있는 시간 자체가 많이 없었지요.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는 고삐가 풀립니다. 내일 1교시가 있더라도 오늘밤 게임이 하고 싶으면 까짓꺼 밤샘 한번 하고 수업 재낍니다. 이제 알바도 하면서 주머니도 조금 빵빵해지겠다 마음껏 피씨방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자취를 시작하니 집에 늦게 들어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담배 연기 매캐한 피씨방에서 한창을 모니터와 죽네 사네 사투를 벌이다가 눈이 뻑뻑해져 귀가길에 나서면 시간은 어느덧 새벽 세네시 경입니다.

이 때 뒷맛은 참으로 씁쓸합니다. 나는 뭐가 되려고 이러나, 내일 수업은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 들어간다 해도 정신차리고 내용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나는 오늘 하루를 왜 이깟 게임에다가 몽창 쏟아넣었나. 후회와 죄책감이 듭니다.
남들은 학점관리네, 토익이네 열심히 준비하는 동안 나는 게임만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고는 남들처럼 취업이고 결혼이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쩌면 내 인생이 벌써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답도 없는 초조함이 드는 그 날 밤에는, 에스프레소 쓰리샷을 때려넣은 것마냥 잠도 잘 안옵니다.

대략 십 사오년전 이야기 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게임을 했습니다. 예전처럼 하드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이사이 짬나는 시간에 알뜰하게도 게임을 켭니다. 그래도 뒷맛은 씁쓸하지 않습니다. 죄책감 같은 건 크게 들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대로 살다가는 내 인생 죽도 밥도 안되겠다 하는 마음이 죄책감을 만들었다면, 요즘 제 인생은 죽과 밥 사이 그 무언가가 이미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무덤덤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아직 앞길이 구만리같은 나이입니다만, 그래도 왠지 게임을 끄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의욕이 잘 나질 않습니다.

누군가가 유튜브에서 그럽디다. 인생에서 이십대 중반 이전까지는 튜토리얼 같은 거라고.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잘 채워도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또 이병에서 병장으로 자동으로 레벨업이 되는 자동사냥 같은 시스템이라고. 그래서 그 시절 우리는 상대적으로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성취감 비슷한 느낌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십대 중반 이후의 삶은 이제 본게임입니다. 이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다고 자동으로 레벨업을 시켜주질 않습니다. 아니, 레벨같은 명징한 마일스톤 같은 건 애초에 잘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예전의 삶에는 그래도 미니맵 같은 게 있어서 졸업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고, 전체 여정에서 나는 어느정도 와 있구나 하는 걸 대강은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 게임에서 그런 편리한 시스템은 없습니다. 내 인생이 어디쯤 와있는지, 잘 가고 있는건지, 아니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이 길이 막다른 길인지 아니면 창창대로인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전의 삶이 100미터 달리기 같은 단거리 경주였다면 지금의 삶은 지도 한 장 없이 아마존을 횡단하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사주니 타로니 하는 것들을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너는 앞으로 물을 조심해. 가다가 강이 나오거든 횡단하지 말고 거슬러 올라가. 그게 니가 살 길이야” 이런 나침반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답답하고 다소 우울한, 거기다가 조금 습하기까지 한 밤에 씌여진 글이라 글에서 무력감 묻은 곰팡내가 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경고는 글 상단에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스크롤을 올릴 의욕이 나질 않으니 그냥 여기에 적어둡니다. 내일은 태풍도 지나가고 해도 쨍쨍하다니 근교에 드라이브나 좀 다녀오고서 상큼한 기분으로 홍차넷에 더 뽀송뽀송한 이야기들을 남기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4
  • 새벽에 읽으니 쪼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32 1
15879 창작또 다른 2025년 (4) 트린 25/12/06 51 0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337 3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251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5 트린 25/12/03 487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594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992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69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539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61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54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710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917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705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40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63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80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71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29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84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25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54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83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88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25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