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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9/26 19:12:27 |
Name | 王天君 |
File #1 | movie_image_(6).jpg (1003.1 KB), Download : 3 |
Subject | [스포]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보고 왔습니다. |
가난한 남자 아라쉬는 정말 정말 어렵게 모아 산 차가 있습니다. 이 유일한 자랑거리는 아버지에게 마약을 판매하던 사이드에게 넘어가고 말죠. 벽을 치며 성질을 부려보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라쉬는 언제나 그렇듯 고용주의 집에 찾아가 정원사 노릇을 합니다.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꾸역꾸역 언덕을 올라가야 했지만요. 그렇게 정원 손질을 하던 와중 주인집 아가씨의 부탁 같은 호출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아라쉬는 틈을 봐서 아가씨의 귀걸이를 훔쳐내죠. 밤이 찾아오고, 사이드는 아라쉬에게 뺏은 차에서 창녀 에티와 마약 거래를 합니다. 위협적이고 끈적이는 몇마디를 나누다가 둘은 육체를 섞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백미러 뒤로 차도르를 뒤집어 쓴 이상한 여자가 보입니다. 겁에 질린 사이드는 하던 짓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던 아까의 그 존재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괜한 화풀이로 에티를 쫓아내지만 헛것이라고 안심하기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 선명합니다. 영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섞여있습니다. 흑백화면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챠도르를 뒤집어쓰고, 스케이드 보드를 타며, 빠른 템포의 노래 속에서 흐느적거리죠. 형식적으로는 한정된 공간과 인물로 상징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가 싶다가도 정작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인 뱀파이어는 일상적으로 건드리기도 합니다. 검은색 챠도르에서 얼굴만 떡하니 떠다니며 건너편의 남자와 행동을 똑같이 하는 걸 보면 제 7의 봉인처럼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보이지만 속눈썹을 화장하고 혼자 방안에서 춤을 추는 걸 보면 뱀파이어보다는 사춘기 소녀처럼 보입니다. 텅 빈 공간과 거대한 기계들이 단조롭게 움직이는 공간 속에서, 인간들은 외로워 보이지만 그만큼 자유롭고 섬뜩한 만큼 올망졸망한 구석이 있어요. 오늘날의 뱀파이어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 속 뱀파이어도 피를 빠는 조상들로부터 어떤 성질들만 취사선택했습니다. 이 소녀는 몇 안 되는 등장인물 중에서 욕망에 초탈한 존재입니다. 뱀파이어치고는 거의 피를 탐하지 않아요. 생존에 절박한 느낌도 없습니다. 영화 중반 소녀는 한밤중 길을 걷는 꼬마를 만나 피를 빨 것처럼 굴다가 직접적으로 경고합니다. 넌 착한 아이니? 거짓말 하지 마.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내 이빨에 혼이 날 거야! 라고 말이죠. 뱀파이어가 윤리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들로 그려지는 관습과 달리, 이 영화의 뱀파이어는 가장 엄격한 존재입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의 스케이트보드를 뺏을 만큼 짓궂긴 하지만요. 오히려 뱀파이어를 둘러싼 인간들만이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인공인 아라쉬는 더 매력있는 존재로 거듭나고 싶어하고, 사이드는 돈과 여자를 쫓습니다. 아라쉬의 아버지는 마약의 쾌락과 창녀 에티를 갈구합니다. 에티는 평온한 가정을 가지고 싶어하며 세계일주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뱀파이어 소녀의 흡혈은 다른 뱀파이어 영화들처럼 성적 매력과 야수성을 뽐내지 않습니다. 사이드와 아라쉬의 아버지가 송곳니의 희생자로 전락하는 장면은 뱀파이어들의 나르시시즘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가장 뻔뻔하고 구제불능의 인간들만이 핏덩이가 되면서 뱀파이어와 인간은 자연스레 단죄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뱀파이어는 벌을 내리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벌을 받습니다. 이 죄와 벌의 도식은 공간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악의 도시"입니다. 악의 도시를 떠나기 전, 아라쉬와 소녀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들의 죄입니다. 마지막에는 그 죄를 감싸 안은 채 이들은 악의 도시를 벗어납니다. 영화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도 보입니다. 피를 빨리며 스러진 이들은 모두 남자들이고, 이들이 피를 빨리는 장면은 에티를 괴롭히던 장면과 맞닿아있습니다. 여자 뱀파이어가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의 피를 빨며 죽이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물론 그 심판은 분노나 원한을 해소하는 감정적인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들어 닥친 재앙과 더 유사한 형상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에티를 쫓아다닙니다. 사이드를 죽이고 뺏은 장신구를 주고 에티와 이야기를 나누며 동경과 연민을 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에티의 입을 빌어 여자로서의 소망과 해진 꿈을 관객들에게 들려줍니다. 또한, 소녀와 아라쉬와의 관계 역시 일방적인 구원의 공급과 수요로서 남녀를 그리지 않습니다. 뱀파이어로서 훨씬 초월적인 존재가 평범한 인간을 만나며 강한 여성이 무능하고 못난 남자와 함께 합니다. 동시에 지은 죄가 훨씬 큰 악인이 그보다 덜한 악인을 포용하는 뻔뻔함도 가지고 갑니다. 챠도르를 망토처럼 휘날리며 그 안을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여자가 바퀴 달린 보드를 타고 다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랍 문화권을 향한 반항적인 도발이기도 합니다. 이런 함의들이 숨어있지만 영화의 가장 중심이 되는 축은 로맨스입니다. 피를 걷어내고 보면 외롭고 찌질한 남자가 외롭고 무서운 여자를 만나 함께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절도로 얻은 미약한 매력을 속절없이 걷어차인 남자와 혼자 방안에서 춤을 추고 화장을 하는 소녀가 오밤중 가로등 아래에서 마주칩니다. 어설픈 코스튬을 걸친 남자가, 나는 드라큘라라며 자기 소개를 하고 피를 빨겠다며 뱀파이어를 끌어안습니다. 농담으로 시작한 이들의 만남은 이내 하나의 역설적 순간을 만듭니다. 뱀파이어 소녀의 방 안에서 붕 떠오르는 가사의 노래가 울려퍼집니다. 천장에 매달린 미러볼을 남자가 돌립니다. 자그만 빛 조각들이 방안을 뛰어다니고 가짜 드라큘라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진짜 뱀파이어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갑니다. 느린 시간 속에서, 서로의 콧날이 뒤통수와 목젖을 쓰다듬습니다. 그렇게 차마 깨물지도 섞지도 못하는 속에서 어쩌지 못하는 외톨이들은 심장박동으로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목적도 욕구도 없이 어떤 운치에 취해있는 영화입니다. 피와 시체와 욕망이 고독과 섞여서 차갑고 설레는 도시전설 연애담이 됩니다. 쓸쓸하고, 섬뜩하고, 알쏭달쏭하고, 그럼에도 숨결을 주고 받고 싶다는 건 결국 매혹적이라는 말이겠지요. 의미 같은 건 다 흘려보내고, 스케이드보드 위로 뱀파이어 소녀가 한들거리며 그리는 밤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가치는 충분합니다. @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 영화 중간 중간 잡생각을 좀 했네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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