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0/25 08:07:32
Name   뤼야
Subject   내포저자 - 간절히, 아주 간절히 이야기하기
부제: 모순을 통해 그려내는 모순없는 세상의 이야기

대학의 국문과에서 수학중인 애인에게서 '내포저자'라는 용어를 처음 들었습니다. 수많은 소설을 읽었지만 특별히 어떤 '문학론'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각별하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을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만약 제가 그의 이론을 내면화시켜 모든 작품을 그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얼마나 줏대없는 짓이 되겠습니까? 줏대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런 것은 작품을 재미있게 읽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지요. 문명을 누리는 거의 모든 현대인이 그러하듯 저는 쾌락주의자입니다.

제게는 아주 오랫동안 문학을 접하며 스스로 쌓아온 기준이 있고, 그 정점에는 항상 '재미'라는 잣대가 있습니다. 만약 제가 문학을 접하며 느끼는 재미에 대해 힘주어 말하고자 한다면, 그 중심에 '내포저자'라는 개념이 있을 것입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용어였지만 듣자마자 '아하!'하며 무릎을 쳤죠. 오랫동안 그저 막연히 생각해 왔던 것인데, 영미의 문학비평에서는 꽤나 모양새를 갖춘 이론인 모양입니다. 이론의 자세한 모양새는 아시는 분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독자로서 대강의 내용만을 그려볼 뿐입니다.

먼저 한 작가의 성장기를 소설을 통해 읽는 경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든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같은. 사실 저는 어린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성인이 되기까지의 성장기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위의 두 작품을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가지의 작품이 소설로써 매우 훌륭한가 하면... 약간 갸우뚱합니다. 글쎄요. 별로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장에 대한 심리적 동기의 차단], 이것은 성장기를 소재로 하는, 흔히 교양소설로 불리우는 수많은 작품의 주제이며, 위의 두 작품은 그런 의미로 주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마이웨이한다는 이야기라는 뜻이죠.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길게 잘 쓴 '하소연'이며, 찬란한 수사가 동원된 '징징글'이지요. 수많은 작가들이 거듭해서 어두운 자신의 성장기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다르지요. 저처럼 그저 타인의 목소리를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찾는 독자도 있을테고, 시시하다 여기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하소연이 뭐 그리 대단할 것이 있겠는가?' 누군가 제게 반문한다면 저는 덧붙일 말이 궁해집니다.

성장하면서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조각나버린 세상이라는 퍼즐, 성장에 들어서기 전, 온전했던 유아적 세상의 깨어짐. 이것은 수많은 성장기를 탄생시킨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누군가에게는 재미없는 작품일 지언정, 춥고 습한 아일랜드의 한 시골 학교의 교실에서 스티븐 디댈러스가 지리책을 펴고 서로 다른 장소가 서로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음의 불가사의에 대해 말하는 장면은 인상깊지요.

[스티븐 디댈러스, 기초반, 클론고우즈 우드 칼리지, 샐린즈, 킬데어주, 아일랜드, 유럽, 세계, 우주...]

지리책 표지장에 쓴 자신의 좌표를 두고 화자는 '그것은 그의 필적이었다.'라고 스티븐의 심정을 전합니다. 오직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필적뿐이라는 주인공의 인식을 대리해서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이지요. 약간은 어색한 화자의 등장을 익스큐즈 하지 못한다면, 이 짧은 장면에서 드러나는 어린 소년의 황망한 두려움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면, 작가의 성장기이기도 한 이 소설을 읽어보았자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때]는 어떠합니까? 중간에 어색하게 끼어든 화자없이 내가 스스로 나의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열아홉살,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턴테이블을 가장 가지고 싶었던 주인공 '나'는 다소 시시하게까지 느껴지는 세 가지의 물건을, 불가해한 세상과의 일종의 타협을 통해 얻어냅니다. 그속에서 소년의 사춘기는 찢겨 나가고 결국 '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등록금의 일부를 헐어 글을 쓸 타자기를 구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두 작품 모두 감당하기 힘겨운 세상을 등지고 즉, 성장을 멈추고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한 작가자신의 자기고백적 소설입니다. 성장기의 고백은 무한대의 의문으로 깨져버린 세상과 유한한 인생에 대한  강렬한 대비와 그로 기인한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작품들은 문학적인 승화로 풍성함으로 무장하고 있고, 독자는 그로 인한 만족감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주제로 쓰여지고 있어 이제는 식상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편이 옳겠습니다.

다른 작품을 더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하일지의 [누나]라든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같은. 이 두 작품 모두 소년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위에서 예를 든 두 작품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유는 주인공인 소년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작품 속 '소년의 세상'은 완전히 재창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어색한 화자가 등장하든, 내 이야기를 직접하든, 제임스 조이스와 장정일의 작품 속 세상은 현실적인 인식의 틀안에서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러나 나무가 걸어다니고, 나무와 처녀와 결혼을 한다거나[누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네겹의 폭넓은 치마를 겹쳐입은 화자의 할머니가, 그 치마안에 숨어든 도망자를 통해 아이를 얻는 일[양철북]은 불가능 하지 않을까요?

제임스 조이스와 장정일의 소설이 그러므로, 성장에 대한 때늦은 알리바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누나][양철북]에 그려진 허풍이 섞인 허구적 세상은 오직 '말하여지는 것'에만 의의가 있습니다. 일찌기 그런 세상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독자는 강렬히 인식합니다. 즉 제임스 조이스와 장정일의 작품 속 세상은 이미 깨져버린 소년의 세상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뒤늦게 수습하는 시도인 반면, 하일지와 귄터 그라스의 작품 속의 세상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황당하면서도 온전한 이율배반적 세상으로 독자를 이끕니다. 황당한 언어의 탁류 속에서 독자는 급격하게 타인의 성장기에 대한 심리적 제방이 무너지는 셈이지요.

작품 속 재창조된 세상 속에서, 화자는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는 있으면서도 없지요. 정작 독자가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화자가 아니라 화자가 간절히, 간절히 이야기함으로 얻어진 작품 속의 세상입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룰과는 전혀 다른 룰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화자는 스스로의 동력을 얻고, 스스로 만들어낸 세상에 포섭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현실 속의 작가는 일부라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현실의 작가와는 다릅니다. 작가도 아니요, 화자도 아닌, 화자를 통해 새로이 창조되고 화자마저 포섭해버린 세상을 엮어내고 있는, 물음표에 갖힌 인물, 아마도 그가 바로 내포저자일 것입니다. 내포저자는 오직 이렇게 '이야기하기'라는 과정에 놓인, 그 가운데서만 존재하는, 그 화려함과 풍부함 속에서만 오직 존재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작품 속에서 작가를 찾지만, 그것은 소설을 재미없게 읽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서툰 작가는 작품 속에 자신의 변변치 못한 일부를 남기지요. 작가가 한 작품을 창작할 때 어떤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동기란 것이 무엇일지 독자인 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알아야할 이유도 없구요. 작가는 작품의 작품성으로 승부를 보아야지, 그의 '아름다운' 예술혼이 가져다준 동기따위가 타인인 제게 중요할리 없지요. 저는 작품이 시작되는 첫 페이지에서 작가가 흔히 '이 이야기 속의 인물과 줄거리는 모두 창작된 것이다.'라는 말만이, 작품 전체에서 찾을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전히 소설을 많이 읽고 있고, 여전히 세상엔 어두운 뤼야입니다. 간간히 문학과 관련된 글 올리겠습니다. 어제 밤에 비오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오늘은 좀 쌀쌀해진 것 같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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