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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3/08/13 09:31:48수정됨 |
Name | 골든햄스 |
Subject | 머레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한테 친절해요? |
작성자가 본문을 삭제한 글입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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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생은 버겁죠. 각자 고민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대개는 스스로의 인생도 버거운 사람이 대부분인걸요.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글 중간에도 쓰셨지만 나 자신 그대로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주는 사람에게도 가볍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 사람을 구원할 정도의 사랑은, 제 기준으로는 많이 잡아도 두세명 정도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테레사 같은 분들이 위인이 되는게 아닐까 싶긴 해요.
그래서 저는 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밟히지만... 더 보기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글 중간에도 쓰셨지만 나 자신 그대로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주는 사람에게도 가볍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 사람을 구원할 정도의 사랑은, 제 기준으로는 많이 잡아도 두세명 정도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테레사 같은 분들이 위인이 되는게 아닐까 싶긴 해요.
그래서 저는 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밟히지만... 더 보기
타인의 인생은 버겁죠. 각자 고민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대개는 스스로의 인생도 버거운 사람이 대부분인걸요.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글 중간에도 쓰셨지만 나 자신 그대로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주는 사람에게도 가볍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 사람을 구원할 정도의 사랑은, 제 기준으로는 많이 잡아도 두세명 정도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테레사 같은 분들이 위인이 되는게 아닐까 싶긴 해요.
그래서 저는 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밟히지만, 저에게 주어진 사람들에게 사랑주고 받으며 살아가자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또 다른 구원이 있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글 중간에도 쓰셨지만 나 자신 그대로가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주는 사람에게도 가볍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한 사람을 구원할 정도의 사랑은, 제 기준으로는 많이 잡아도 두세명 정도가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테레사 같은 분들이 위인이 되는게 아닐까 싶긴 해요.
그래서 저는 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눈에 밟히지만, 저에게 주어진 사람들에게 사랑주고 받으며 살아가자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또 다른 구원이 있길 바랍니다.
세상은 상처 하나 없어본 사람처럼 살아가는게 가장 좋읍니다. 퐈하하. 가까워져서 그 큰 상처를 드러낸다해도 관계가 더 견고해지거나 그런 믿음을 가질 필요도 없고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 애써 무시하고 보지말고 자기 자신만을 사는게 좋아요. 자신을 너무 크거나 단단한 존재로 보지말고 나의 비겁함 나약함 형편없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아보는중입니다. 그저 행복만 추구해보아요
뻐큐를 날려야겠습니다만 어렸습니다.. 그런 애들이 한가득이고 제 대학 인맥 대부분입니다 후하하 걔네도 어려서 그런 건데 걔네는 아직 자기 잘못을 몰라요 다수가 겪는 일들은 밈화되고 단어라도 생기지만 소수가 겪는 일은 우리의 내면 안의 일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이 글을 적은 것도 다수보단 소수를 위함임을 보시는 분들이 알아두셨으면!
걔네들 나이들어도 똑같읍니다 대부분. 되돌아가서 생각해보고 반성하고 사과할 줄 아는 인간은 제 미약한 경험상 100명중 0~1명입니다. 어느정도 적당한 정서환경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적정량의 공격성으로 똥인간을 근본적으로 잘 쳐내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지만알고, 똥이 좀 숙성되면 된장되겠지 생각하기 쉬운데 똥은 똥이요 된장은 된장이니 똥은 변기에 흘려보내시면 됩니다~
쉽게 들려질 수 있는 (수동형을 쓰기 싫지만 어쩔 수 없네요) 고통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고통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벌어진 사건들도 그런 예가 있지만… 말씀 주신 것 중에도 “남자친구와 헤어진“ 고통은 쉽게 들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다수가 경험하고 사실 그렇게 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보통 아니며 어떻게 위로하고 함께할 지도 대충 합의되어 있는)인 반면, 골든햄스님의 경험은 그렇지 않은 쪽, 재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들어주지 ... 더 보기
쉽게 들려질 수 있는 (수동형을 쓰기 싫지만 어쩔 수 없네요) 고통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고통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벌어진 사건들도 그런 예가 있지만… 말씀 주신 것 중에도 “남자친구와 헤어진“ 고통은 쉽게 들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다수가 경험하고 사실 그렇게 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보통 아니며 어떻게 위로하고 함께할 지도 대충 합의되어 있는)인 반면, 골든햄스님의 경험은 그렇지 않은 쪽, 재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들어주지 못한 지인들 편을 들어주고 싶은 건 아니에요! 단지, (저를 포함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것, 그래서 쉬운 답(예컨대, “부내”)을 내놓는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단독적인 경험은 어떤 사건이라고는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지… 그래서 최근의 이론들이 자기 진술/구술사/자서전 등의 개인적 목소리에 주목하지요. 다른 무엇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을 인정하면서.
사실 갈무리했지, 제 고통-뿐 아니라 그냥 이런 고통, 불평등을 겪는 사람들이 있단 것 자체-에 대해서 '왜 그런 얘기를 꺼내고 그러냐' 는 식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들이 상대방들에게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하품을 하면서 겨드랑이를 긁는다던가, 자리를 뜬다던가, 저를 공격하는 말을 한다던가, 가족에게 효도하라고 한다던가, 웃으라고 한다던가. 어려운 사회적 담론을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환영받기 어려웠습니다. 만일 다른 주제에 대해 상대들이 그런 식의 반응을 했다면 그 상대가 무례한 것으로 규정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제게... 더 보기
사실 갈무리했지, 제 고통-뿐 아니라 그냥 이런 고통, 불평등을 겪는 사람들이 있단 것 자체-에 대해서 '왜 그런 얘기를 꺼내고 그러냐' 는 식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들이 상대방들에게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하품을 하면서 겨드랑이를 긁는다던가, 자리를 뜬다던가, 저를 공격하는 말을 한다던가, 가족에게 효도하라고 한다던가, 웃으라고 한다던가. 어려운 사회적 담론을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환영받기 어려웠습니다. 만일 다른 주제에 대해 상대들이 그런 식의 반응을 했다면 그 상대가 무례한 것으로 규정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제게는 무례하게 느껴졌고요. 그렇지만 공적으로는 그런 반응은 무례한 것이 아닌 대다수의 보편적 리액션으로, 이해할 만한 반응으로 이해되고 있는 데서 간극을 느낍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을 그 개개인의 인격의 문제가 아닌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 사회 전체가 '들을 만한 고통'과 '들을 수 없는 고통'을 분류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것에서 배제된 자들이 낙오되고, 고통받으며, 비뚤어지는 것도 통계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인 거죠. 내러티브에서의 배제인 셈입니다. 저는 그 협곡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후배들에게 이런 글을 남김으로써, '너는 남들의 고민을 아무리 들어줘도 남들은 네 고민을 안 들어주는' '너한테 어떻게 상처를 줘도 그건 사회적으로 잘못이 아닌데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는 조그만 상처를 줘도 잘못인' '이야기의 불균형' 상태에 대해 설명해놓으려는 욕심뿐이었지 저도 이걸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은 안 합니다. 부내는 단순히 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제가 생활수준이 나아져서 (독립도 했고요!) 이제는 더는 남들이 듣기 어려워하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서 전체의 이야기와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경험상 유의미하게 학벌이 낮거나 인생에 실패를 다수 경험했거나 가족 중 질병을 겪은 사람이 있거나 할수록 남들의 고통에 더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는 경향을 발견했어요. 그만큼 다수-아시겠지만 이건 숫자적 의미의 다수가 아니라 관념적 다수죠-의 이야기에서 탈락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예외에 대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저도 행복을 위해 다수의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기 때문에, 제 지난 기억을 잊는 중입니다. 이제 제 새로운 고민은 수영을 못한단 것인데, 이건 공감 받을 거예요 특히 함께 (이제 올라간 신분으로 누릴 수 있게 된) 소비활동이나 갖가지 sns 등으로 여러 가지 공감대와 공통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후 슬쩍 이야기하면, 뭐든지 다르죠 전 이것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생각 외로 고통스럽단 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도 그냥 자전적으로 그걸 그냥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을 그 개개인의 인격의 문제가 아닌 말씀해주신 것처럼 우리 사회 전체가 '들을 만한 고통'과 '들을 수 없는 고통'을 분류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것에서 배제된 자들이 낙오되고, 고통받으며, 비뚤어지는 것도 통계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인 거죠. 내러티브에서의 배제인 셈입니다. 저는 그 협곡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앞으로의 후배들에게 이런 글을 남김으로써, '너는 남들의 고민을 아무리 들어줘도 남들은 네 고민을 안 들어주는' '너한테 어떻게 상처를 줘도 그건 사회적으로 잘못이 아닌데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는 조그만 상처를 줘도 잘못인' '이야기의 불균형' 상태에 대해 설명해놓으려는 욕심뿐이었지 저도 이걸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은 안 합니다. 부내는 단순히 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제가 생활수준이 나아져서 (독립도 했고요!) 이제는 더는 남들이 듣기 어려워하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서 전체의 이야기와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경험상 유의미하게 학벌이 낮거나 인생에 실패를 다수 경험했거나 가족 중 질병을 겪은 사람이 있거나 할수록 남들의 고통에 더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는 경향을 발견했어요. 그만큼 다수-아시겠지만 이건 숫자적 의미의 다수가 아니라 관념적 다수죠-의 이야기에서 탈락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예외에 대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저도 행복을 위해 다수의 이야기 속에서 살고 싶기 때문에, 제 지난 기억을 잊는 중입니다. 이제 제 새로운 고민은 수영을 못한단 것인데, 이건 공감 받을 거예요 특히 함께 (이제 올라간 신분으로 누릴 수 있게 된) 소비활동이나 갖가지 sns 등으로 여러 가지 공감대와 공통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후 슬쩍 이야기하면, 뭐든지 다르죠 전 이것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생각 외로 고통스럽단 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도 그냥 자전적으로 그걸 그냥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이해도 공감도 실상 굉장히 표층적이고 피상적인 지점에서만 통용되던 개념인 것 같지요. 나의 경험과 상태를 나누고 공유함에 있어 중요하다 여겨지던 - 심지어 트렌드에 따라 우/열세가 나뉘기까지 하던 - 저 두 개념의 통용 양태엔 중대한 게 빠져있었읍니다. 상상력. 그게 결여된 이해 내지는 공감의 영역은 배타적일 수 밖에 없지요. 내 시야 밖의 존재가 의미를 지니리란 짐작은 믿음 하에서 가능하지만, 그 믿음은 상상력의 몰가치화로 인해 점차 소거되어갔죠.
그래도 되니까, 의 함의는 몇몇 악의로만 생겨나진 않죠. 배제가 제공하는 편리... 더 보기
그래도 되니까, 의 함의는 몇몇 악의로만 생겨나진 않죠. 배제가 제공하는 편리... 더 보기
이해도 공감도 실상 굉장히 표층적이고 피상적인 지점에서만 통용되던 개념인 것 같지요. 나의 경험과 상태를 나누고 공유함에 있어 중요하다 여겨지던 - 심지어 트렌드에 따라 우/열세가 나뉘기까지 하던 - 저 두 개념의 통용 양태엔 중대한 게 빠져있었읍니다. 상상력. 그게 결여된 이해 내지는 공감의 영역은 배타적일 수 밖에 없지요. 내 시야 밖의 존재가 의미를 지니리란 짐작은 믿음 하에서 가능하지만, 그 믿음은 상상력의 몰가치화로 인해 점차 소거되어갔죠.
그래도 되니까, 의 함의는 몇몇 악의로만 생겨나진 않죠. 배제가 제공하는 편리는 이해와 공감의 헤게모니 전반을 아우르는 기저의 문제였으니. 그래서 정상과 평이, 평범을 논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전역을 아우르는 시야를 획득했다 믿는 일이 팽배한 사회는 이미 병폐를 오랫동안 축적해오고 있던 셈이죠. 최근의 수, 아니 십수년에 걸쳐 터져나오는 문제들은 어쩌면 이 중심부가 얼마나 협소했는지, 그래서 없는 것으로 실재해온 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층위에 분포해왔는 지를 치명적으로 알려주는 지표일 거라 생각합니다.
정책과 대중 시야를 위시한 앞으로의 방향성 같은 건 모르겠어요. 그렇게 스케일이 큰 사람이 되지 못해서 그런지. 다만 지금의 이 공간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생각못한 영역과 조우했을 때, 최선을 다해 상상하기. 그리고 혹여 모를 위화감의 개연성 속에서도 이를 온전히 긍정하도록 노력해보기. 내 삶을 긍정해주는 경험을 기적 마냥 바라야하는 이들이 방치될 이유는 너디에도 없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상상력도 포함해서.
그래도 되니까, 의 함의는 몇몇 악의로만 생겨나진 않죠. 배제가 제공하는 편리는 이해와 공감의 헤게모니 전반을 아우르는 기저의 문제였으니. 그래서 정상과 평이, 평범을 논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전역을 아우르는 시야를 획득했다 믿는 일이 팽배한 사회는 이미 병폐를 오랫동안 축적해오고 있던 셈이죠. 최근의 수, 아니 십수년에 걸쳐 터져나오는 문제들은 어쩌면 이 중심부가 얼마나 협소했는지, 그래서 없는 것으로 실재해온 이들이 얼마나 다양한 층위에 분포해왔는 지를 치명적으로 알려주는 지표일 거라 생각합니다.
정책과 대중 시야를 위시한 앞으로의 방향성 같은 건 모르겠어요. 그렇게 스케일이 큰 사람이 되지 못해서 그런지. 다만 지금의 이 공간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생각못한 영역과 조우했을 때, 최선을 다해 상상하기. 그리고 혹여 모를 위화감의 개연성 속에서도 이를 온전히 긍정하도록 노력해보기. 내 삶을 긍정해주는 경험을 기적 마냥 바라야하는 이들이 방치될 이유는 너디에도 없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상상력도 포함해서.
그렇다면 언뜻 생각난 이야기를 좀 해봐도 되겠네요. 그런 존재라는 시야에서 외면당한,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위기감에 종속된 이들에게 세상에의 실존을 일깨우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달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아마도 권위를 얻으며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되겠죠. 그런 위치에 오르려면 필요한 게 무얼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우선 상대의 욕망을 이해함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뭐 누구나 지닐법한 말초적 욕구의 영역은 쉬이 들추어낼 수 있겠죠. 다만 뻔한 자극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신뢰일 리는 없으니, 욕망의 영역을 파고드는 건 심층의 문제로 접어듭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는 공간은 그 측면에서도 몹시 절실한 필요성을 지니겠지요.
뭐 누구나 지닐법한 말초적 욕구의 영역은 쉬이 들추어낼 수 있겠죠. 다만 뻔한 자극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신뢰일 리는 없으니, 욕망의 영역을 파고드는 건 심층의 문제로 접어듭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는 공간은 그 측면에서도 몹시 절실한 필요성을 지니겠지요.
잊고 있을땐 괜찮은데 가끔 아 맞다 나 그렇게 안 좋은 일들을 겪었었지 그리고 또 그 일이 있어도 세상은 방관하겠지 떠오르면 몸이 딱딱히 굳고 과잉경계 상태가 돼요 (덕분에 스스로를 지키는 건 일류입니다만..) 또 그 일로 인해 변화한 감정상태로 무슨 일을 하든 이상하다고 비웃음 당하고 커서는 손절 당하던 일들. 나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감정과 사고회로가 남들에게는 뭘 해도 이상하고 눈길을 끌고 조롱거리라 필사적으로 남을 따라하던 시절들. 이렇듯 안전과 수용에 대한 욕구가 저는 있는 거 같지만 사실 있다고 인식한 거부터가 이미 많이 내딛은 걸 거예요. 트라우마가 정말 심하면 스스로 오히려 괜찮은 척하거든요.
굽은 등과 숙인 고개를 펴니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는건지 서있는 곳이 달라지면서 거기에 맞춰 내 자세도 변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삶이 참 드라마틱하게 변하지요.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하면서 내적 컨피던스함이 밖으로도 보여질테구요. 네거티브한 스토리를 나누는것은 어찌보면 남들에겐 그 무게를 같이 짊어지자는 선넘는 무례로 다가왔을겁니다. 나는 그다지 그럴 생각은 없는데 우리가 그정도 관계까진 아니지 않나 이친구는 왜? 라는게 그들의 생각이었겠지요. 입장바꿔 그런것까지 생각할 여유 배려를 잊게 만드는것이 내 현실이고 내 삶의 고통이지만요. 나중에야 알게된 건 나만 힘든게 아니였고 세상엔 상처받은채로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것. 나를 슬프게 만드는건 그들 모두가 나처럼 고슴도치처럼 살진 않았다는것. 지금 할 수 있는건 남을 탓하기보다 그럼에도 내 곁에 남아있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것뿐.
고민하다가 이 글을 마지막으로 댓글을 마칩니다. 저는 홍차넷에 와서야 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시작했고, 첫 글인 교수님과의 인연에 대한 글이 실은 제가 제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한 시작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상대가 내밀한 가정사, 정신병력 등의 이야기를 할 때 서로 비밀을 오픈하는 깊은 사이가 되자는 신호로 오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러워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음에도 서두만 땐 정도로도 타박을 받아왔고, 묵묵히 힘든 삶을 고요히 사는 사람들만큼 제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것인 것은 알겠지만 저는 그냥 ... 더 보기
고민하다가 이 글을 마지막으로 댓글을 마칩니다. 저는 홍차넷에 와서야 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시작했고, 첫 글인 교수님과의 인연에 대한 글이 실은 제가 제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진짜 삶을 살기 시작한 시작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상대가 내밀한 가정사, 정신병력 등의 이야기를 할 때 서로 비밀을 오픈하는 깊은 사이가 되자는 신호로 오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러워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음에도 서두만 땐 정도로도 타박을 받아왔고, 묵묵히 힘든 삶을 고요히 사는 사람들만큼 제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것인 것은 알겠지만 저는 그냥 쌍방향으로 모두와 소통해야 좀 살겠는 사람이란 점도 있습니다. ^^; 그 고요한 분들도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아하신다고 생각하고, 공동체서 호명되지 못하는 삶은 단순한 무례 이상의 형벌 같은 지점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제 서툰 글과 인생이 모자란 건 사실이고 다들 그 점을 말씀해주셔서 더 돌아보는 기회 돼서 감사합니다.
항상 생각합니다.
사람은 타인이 고귀한지 비천한지 모릅니다. 타인의 영혼이든 소중함이든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인이 강한지 약한지는 기가 막히게 압니다. 타인의 약점이든 만만함이든 귀신같이 알아채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타인의 소중함은 평생 모르지만 타인의 씹을 거리는 5초 안에 견적을 내죠.
그런 단계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영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판단 중지'가 행해지면서 비로소 상호의 내면에 ... 더 보기
사람은 타인이 고귀한지 비천한지 모릅니다. 타인의 영혼이든 소중함이든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인이 강한지 약한지는 기가 막히게 압니다. 타인의 약점이든 만만함이든 귀신같이 알아채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타인의 소중함은 평생 모르지만 타인의 씹을 거리는 5초 안에 견적을 내죠.
그런 단계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영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판단 중지'가 행해지면서 비로소 상호의 내면에 ... 더 보기
항상 생각합니다.
사람은 타인이 고귀한지 비천한지 모릅니다. 타인의 영혼이든 소중함이든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인이 강한지 약한지는 기가 막히게 압니다. 타인의 약점이든 만만함이든 귀신같이 알아채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타인의 소중함은 평생 모르지만 타인의 씹을 거리는 5초 안에 견적을 내죠.
그런 단계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영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판단 중지'가 행해지면서 비로소 상호의 내면에 눈을 뜨게 되는 듯하고요.
그래서 사고는 병이고 허깨비라 생각합니다. 솔직하고 뒤끝없는 '받아들임'만이 진짜일 뿐..
사람은 타인이 고귀한지 비천한지 모릅니다. 타인의 영혼이든 소중함이든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인이 강한지 약한지는 기가 막히게 압니다. 타인의 약점이든 만만함이든 귀신같이 알아채죠.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타인의 소중함은 평생 모르지만 타인의 씹을 거리는 5초 안에 견적을 내죠.
그런 단계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영 타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인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판단 중지'가 행해지면서 비로소 상호의 내면에 눈을 뜨게 되는 듯하고요.
그래서 사고는 병이고 허깨비라 생각합니다. 솔직하고 뒤끝없는 '받아들임'만이 진짜일 뿐..
보통 어려워 보이는 사람에게 고민 상담을 안하는데...그래도 들어줄 거 같은 사람에게 하죠. 골든햄스님이 어려운 성장배경을 가졌음에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는건 또다른 의미로 부내 같은 거보다 더 의미있는 재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상대방들은 자기의 물이 가득차서 들어줄 그릇의 여유가 없었던 건데, 골든햄스님은 그 여유가 '있어보였고' 실제 그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었으며', 듣다가 못참고 "그건 별 것도 아니다 나는 더 힘들었다" 이러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이건 대단한건데요?
이건 골... 더 보기
이건 골... 더 보기
보통 어려워 보이는 사람에게 고민 상담을 안하는데...그래도 들어줄 거 같은 사람에게 하죠. 골든햄스님이 어려운 성장배경을 가졌음에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는건 또다른 의미로 부내 같은 거보다 더 의미있는 재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상대방들은 자기의 물이 가득차서 들어줄 그릇의 여유가 없었던 건데, 골든햄스님은 그 여유가 '있어보였고' 실제 그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었으며', 듣다가 못참고 "그건 별 것도 아니다 나는 더 힘들었다" 이러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이건 대단한건데요?
이건 골든햄스님이 공부로 획득한 직업과 성취,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사람과의 결혼 같은 외적인 것보다 본래 골든햄스님이 타고난 무언가(탈렌트나 기프트..?)에 해당되는 것일지도 몰라요.
'들어줄 거 같은 사람'...귀한데...
이건 골든햄스님이 공부로 획득한 직업과 성취,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사람과의 결혼 같은 외적인 것보다 본래 골든햄스님이 타고난 무언가(탈렌트나 기프트..?)에 해당되는 것일지도 몰라요.
'들어줄 거 같은 사람'...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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