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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0/01 11:34:51
Name   하마소
Subject   매끈한 이상과 거친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모처럼 20년 지기 친구와 연락이 닿았는데" 로 시작한 친구의 말은 씁쓸함으로 끝나고, 이는 우리의 씁쓸한 대화로 이어지며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씁쓸히 파한 자리로 끝났다. 그러니까 모태신앙이던 친구와 그의 20년 지기 - 이하 A - 는 같은 교회의 신도였는데, 코로나 시기의 분리 정국과 주거지 이사 등으로 인해 예배를 함께하지 않은 지 수 년이 지난 상태였다고. 뜸해진 접점만큼 연락도 줄어, A가 새 주거지 인근의 부촌과 맞닿은 곳으로 교회를 옮긴 소식을 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섭섭한 일인데, 그것 뿐이었다면 이는 토로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리라.

친구와 A가 다니던 교회엔 일종의 집단 고백을 위시한 기도회가 있었고, 한 때는 둘 모두 이 소속이었다. 주 단위, 내지는 월 단위로 설교와 관련한 자기 고백의 시간이 돌아오는데 A는 꽤 오랜 시간동안 이를 마뜩치 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구성원들의 성장환경부터 폭넓어 고백 때마다 지난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는 동안 의아함을 걷어내려 애쓰다 보면, 그 의구심은 비교적 매끈한 흐름으로 일관해온 자신의 삶으로 향하는 듯한 기분을 지속하여 느꼈다는 것. 그러니 예기치 않은 단절은 주로 비극이지만, 누군가에겐 더 큰 괴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게 할 기회이기도 하겠지. 넉넉하고 여유로운, 느긋한 침묵 속에서 그 어떤 내밀함을 나누지 않아도 포근히 안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 안에서 A는 마치 내가 처음부터 자리했던 공간 마냥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를테면 - 이는 A의 말인지는 알 수 없는 그저 친구가 덧붙인 걸지도 모를 - 결코 시간이 해결해줄 수 없는 경계 바깥의 자의식이 드디어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과 어우러져 소속감이란 안락과 조우한 순간 마냥.

"그 놈의 아비투스!" 같은 뻔한 한마디를 내지르며 투덜대는 친구에게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보통의 양심이 유약한 자아와 충돌한 현장이란, 그러니까 그리 드물 리 없는 그럭저럭 흔한 광경이란 이야기들. 최소한 매끈함과 거친 단면의 차이를 감지하고 이를 편치 못하게 여기는 보통의 양심과, 이 불편함을 기꺼이 집어들지 못하여 피신처를 찾아나서야 하는 자아의 현실. 다만 그 고뇌의 순간 그 누구의 성가심도 없길 원하던 자그마한 바람이 이끈 조용한 이탈은 또한 그 보통의 양심이 지닌 하찮은 예우였으리라. 물론 수적/심리적 우위의 여부와 궤를 함께 하는 이야기겠지만, 그 성가심의 순간 자신의 불쾌를 정언화하기 위해 열위를 향한 공격적 배제를 망설이지 않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란 기표를 부여하며 실재를 박탈하려는 외압의 정체들도 이미 비근한 장면들 아니던가. 참혹한 사고에 울부짖는 이들을 향해, 코호트적으로 유리된 존재임을 확신한 이들이 우리의 슬픔이 아니니 광장을 떠나라는 조롱으로나 가능할 법한 메시지를 정돈하여 건네던 모습은 어째선지 익숙한 예시가 되어버렸고. 그러니 최소한, 내 감각을 내가 감수하겠다는 자세만으로도 우리는 이에 보통이라는 수식을 할 수 있으리란 이야기를 건넸다.

다만, 당연히 씁쓸한 이야기일 따름. 이탈이 단순한 행보가 아닌 월담 따위로 묘사되는 순간이란, 최소한 누군가에겐 틀림없이 존재했을 장벽을 입증하는 단서이니. 담 너머의, 애써 불편을 감수해야 할 공간에 내가 있다는 걸 감지하는 건 꽤 씁쓸한 일이다. 적당히 주절대고 나면 할 수 있는 건 위로 뿐이겠지.



하긴, 이러한 심리를 꼭 윤택한 삶의 소유자인 중산층 언저리의 전유물로 여길 이유는 없겠다. 이를테면 엄마, 그러니까 몰락한 지주 집안에 입적하여 흔들리는 가문이 물심양면으로 추락하는 현장을 몸소 체험하며, 그럼에도 자긍심이 되어버린 자존을 놓지 않으려 하시던 당신을 떠올려보자면. 그러니까 종종, 행색과 겸양으로 비롯되는 계층 간의 흐릿한 선을 선명히 하려는 시도를 하시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이는 몰락했지만 전락하지 않으리란 남모르는 투쟁의 현장이었으리라. 다만 내게는 이 처연한 모습이 때로는 위화감의 대상이기도 하여, 가끔 그 투쟁의 순간을 차분히 묘사하시는 자리에서 묘한 반감이 스미는 걸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는 짧은 순간 일어난 일이지만 분명해진 사건이 하나 있으니.

대학 입학 후 술자리에서 있던, 세기말 수렁을 경험하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은 동참할 법한 빈궁함의 체험에 대한 대결 현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 조금 떨어진 나를 향해 방금 전의 무대를 마치 장악한 마냥 의기양양하던 동기가 말을 건넸다. 너도 꽤 어려웠던 것 같은데 어땠냐며. 무슨 놈의 전시인지 싶다가도 취기가 이끈 호승심은 그 억제기를 이겨내고 적당한 윤색 - 은 그저 포르노에 가까운 적나라한 심상 전시를 회피하기 위함으로 - 을 곁들여 덤덤히 내뱉고 나니 순간 동기의 눈빛이 섬뜩해진다. '왜, 대입을 통한 고난 극복의 서사는 너의 전유물이어야 하는걸까' 따위의 의아함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려는 찰나, 냉기 서린 한 문장이 돌아오고 나는 쓴 웃음과 함께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야. 그정도면 너는 공대가 아니라 공고에 갔어야 하는거 아니냐?"

가끔, 우리가 애써 거부하며 우리의 영역으로부터 유리시키려던 무언가가, 꼭 그와 같은 양태가 아닐지라도 우리를 도려내는 도구마냥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이의 위협을 감지할 수 있다면, 이 위협에 취약한 이들은 아마도 그 명확하지 않은 경계선과 지근거리에 위치한 존재들인 것 또한 알 수 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을 박차려는 절박한 발버둥은 이 위협의 최전선에 우리를 위치시키곤 한다. 현실의 냉담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선 하나로 혼돈의 영역 너머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픈 위태로운 욕망은 우리를 넉넉한 안정감이 가득한 심층이 아닌 겨우 접경지의 변경자로 만드는 데에 그칠 뿐이니까. 다만 이를 알고 있다 해도, 구별짓기를 위한 욕망은 쉬이 꺾이지도, 꺾을 수 있지도 않는 무언가와 같다. 심지어 급작스러운 전락으로 내게서 멀리 있으리라 여겨온, 기꺼이 도외시해야 할 선 너머의 풍경이 부지불식 간에 현관문 안 광경이 되어버릴 때와 마주한다 한들 보통의 우리가 한탄하는 건 전락 그 자체일 따름. 외면을 택한 시선의 각도를 자탄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문득, 그러한 전락으로 인해 줄곧 부인하던 세상과 마주함을 계기로 유명을 달리한 몇몇 이들을, 그렇게 사그러져간 어떤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상상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다면, 그래서 바깥의 형상을 이세계가 아닌 현실로 가늠할 수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누군가에게 어딘가는, 심지어 소거까지 이끌어낼 자신과 이곳의 불가능한 공존을 함의하는 기표에 불과한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력이 닿는 한, 어떠한 세상이 필경 존재하며 이 또한 그저 무형의 객체가 아닌 생태계로 구성되고 있음을 실감하는 건 그저 미약한 내 생태를 지탱하기 위해서도 유효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 또한 챙겨본다. 물론 그러한 시야가 정체성으로 분리된, 그래서 온전한 유리를 장담할 세계를 향해 형성될 때 이따금 관측은 관음으로, 지탱이란 탈취한 인격의 소모로 이어지는 사태 또한 종종 발생하는 비극이지만, 그들이 편집해내 유희로 전시하는 참상이 그 자신의 세상에서 오롯이 재현될 수도 있음은 우려한 비극을 막아세우거나 혹은 댓가라도 치르게 만들 약간의 위안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격들에게 가장 큰 위기는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만 할 때 도래하고,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나 자신의 생애만이 내게서 끊기지 않고 재생되는 채널임을 직시해야할 때가 오니까. 그러니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보편에서 열위로서 먼, 그래서 의아함 가득한 세상을 타인의 영역으로 조우한다 해도 이를 그저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이길.



여러 행운들에 둘러싸여 생을 부지하는 동안 짐작해보는 가장 큰 행운은 아마도, 결코 나쁠 리 없는 친절한 사람들의 시선에 깃든 타자를 향한 생경함, 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 심지어 일말의 위협의 의사 없이도 - 나와 우리, 서로를 향해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인 듯 싶다. 그래서 제법 가깝다 여기는 이로부터의 몰이해와 이에서 파생되는 우려투성이의 문장도 그리 큰 화가 되지 않고, 이해의 불가능성에 부딪혀 책망할 곳을 헤메는 이들의 좌절감을 되짚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니까. 그럼에도 그저 발버둥으로 남긴 삶의 증거로 인해 직면해야 하는 몰이해의 장벽은, 심지어 그 장벽을 정당방위로 만들기 위해 삶에 실재를 허하지 않으려는 강인한 의지에 응전해야 하는 건 단지 비릿함 정도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구역감이 따른다. 그리고 그 구역감은 누군가에겐 고작 하루의 식이 정도를,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겐 삶의 의지 전반을 위협하는 단서이기도 하겠지. 그러니 가능하다면 그 저항감이 누구도 위협하지 못하는 안전한 완충지가 있기를, 하는 바람은 오늘도 마음 속 어딘가에 포장되어 있다.

나와 우리가 우선인 사람이기에 세상의 평정보다는 상승 욕구의 실현을 먼저 꿈꾸지만 혹여 그 실현이 일으킬 모순이 해소되기 위해 내가 알았던 어떠한 세상이 부정되거나 혹은 소거되어야 한다면, 모순을 안고 지내며 그게 종종 자극할 내적 수치심을 견디며 사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한다. 종종 하는 말이지만, 삼체 문제도 해결 못하는 박약한 지식으로도 인류는 대기와 우주를 가로지르고, 사람 셋만 모여도 세상을 응시하는 서로의 상이한 전제가 쉬이 일으키는 충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집단이 나름의 체계를 이루듯, 성긴 거스름은 숙명적 동행의 대상인 것. 매끈함을 위해 도려낸 단면은 진짜 매끈해졌을까.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어디까지 다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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