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1/19 17:24:49
Name   선비
Subject   [조각글 12주차] 공화주의
주제 _ 선정자 : 마스터충달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소개하는 글입니다.
픽션으로서 인물 소개를 해도 좋고,
논픽션으로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소개해도 좋고,
비평적으로 작품을 소개해도 좋습니다.

합평 방식
분량은 자유고 합평방식은 자유롭게 댓글에 달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맞춤법 검사기
http://speller.cs.pusan.ac.kr/PnuSpellerISAPI_201504/

합평 받고 싶은 부분
문장 위주로 까였으면...

하고싶은 말
예전에 타 커뮤니티에 쓴 글을 조금 수정해서 내놓습니다. 담배를 소개하는 글이라서 골랐어요.
조각글 모임 인원 모집중입니다. 정.말.재.미.있.어.요.

본문
---------------------------------------------------------------------------------------------------------------------

약속장소는 홍대 은하수 다방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걷다가 자동차 유리에 얼굴을 비쳐 보니 초췌한 얼굴에 수염이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전날 과음으로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었다. 반쯤 걸었을 때 인혜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카페에 도착하니 인혜의 친구 해원이 먼저 와있었다. 머리에 커다란 하늘색 리본 머리띠를 한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와는 벌써 몇 번 만났지만, 아직까진 말을 놓을 정도로 친숙한 사이는 아니다.

"먼저 와계셨네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약간 놀란 채로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해원의 맞은편에 앉으며 테이블에 재떨이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덮은 책의 제목을 힐끔 봤다. 'Night Flight'.
"생떽쥐빼리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조금......"
"그런데 원서를 다......"
"원서는 프랑스어로 쓰였을 걸요."
"요새 영어공부를 하느라고요." 그녀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미소가 인상적인 여자다.

나는 담배를 하나 빼어 담뱃갑에 살짝 두드렸다. 담배를 입에 가져가 대려는 순간 해원이 찡그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요."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피우셔도 괜찮아요.
"아뇨. 여자 친구가 알면 안 됩니다."
"참, 인혜는 알바가 아직 안 끝나서 늦는대요." 그녀가 말했다.
"네. 연락받았습니다."

해원에 대해 인혜로부터 들은 정보를 종합하자면 이렇다. 그녀는 얼마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남자친구의 흡연에 대해 다투었던 것이 이유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인혜가 생각하는 실제 이유는 이렇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사귈 때, 다른 남자와 몇 차례 잠을 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고백했는데, 그 후에도 남자친구와 몇 달 더 사귀다가 결국 헤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멍청한 일을 한다.

"그런데요……." 그녀가 내 생각을 깨우면서 말했다.
"인혜가 알면 안 된다면서 왜 담배를 피우세요?"
다른 여자들이 그렇듯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다.
"인혜는 담배를 피우는 대신에 자기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둘이 민주적으로 합의를 이뤘죠."
"민주적이긴 한데 공화적이진 않네요."
공화적이라고? 나는 간신히 그녀가 철학 전공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는데요."
"그걸 모르시니까 공화적인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습니까.”
"피우세요. 이번엔 비밀로 해드릴게요." 해원이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 괜찮은 거죠?"
"네. 대신 부탁이 있어요."

한 시간쯤 늦게 인혜가 오고 우리는 홍대입구역 7번 출구 앞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맥주 3,000cc 하나에 소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눠 마시고 해원과 헤어졌다. 인혜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 신촌역으로 갔다. 밤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인혜는 이미 취해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인파를 헤치며 모텔로 향했다.

어느 모텔에서건 항상 몇 편의 홍상수 영화를 찾을 수 있다. 아마 같은 곳에서 영화를 공급하기 때문일 테다. 나는 모텔에 갈 때마다 홍상수의 영화를 한 편씩 본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솜씨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틀었다. 벌써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상관은 없다.
나는 영화를 틀어놓고 인혜의 옷을 벗겼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혜는 언젠가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공화주의와 해원의 하늘색 머리띠, 그리고 그녀의 부탁에 대해 생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이기 때문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시선을 돌리니 인혜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인혜를 깨울까 하다가 가방에서 담배와 열쇠고리 대신 가지고 다니는 플래시 라이트를 꺼냈다. 냉장고에는 맥주가 있었다. 나는 맥주를 꺼낸 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직 어두컴컴한 길거리를 라이트로 비추고 놀며 시간을 보냈다.

인혜가 일어난 건 9시쯤이었다. "밤사이 추웠는지 너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자 인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인혜를 집으로 보내고 나서 나는 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한양대 앞에 있는 탐앤탐스에서 보기로 했다.

담배를 가르치는 건 수영을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다. 요령도 없고, 기술을 가르치고 말 것도 없다. 그냥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아드리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잠깐 생각했다. 어쨌든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것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 빠지고 다른 사람은 채식이나 명상, 운동을 한다. 흡연이나 음주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런 점에서 흡연은 하나의 사상이나 마찬가지다. 과세가 된다는 측면에서는 그녀가 말한 공화주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해원은 두 시쯤에 왔다. 어제와 같은 머리띠에 체크무늬 남방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웃었다. 어색한 웃음.
그녀가 핸드백에서 말보로 레드를 꺼냈다. 여자가 피우기엔 독한 담배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그녀가 물었다.
"왜 성냥으로 불을 붙여요?"
"솔직히 말해드려요?"
"네."
"드라마에서 김민종이 하는 걸 보니 멋있어 보이더군요."
그녀가 웃었다. 이번엔 자연스러운 웃음.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렸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그녀의 커진 눈을 쳐다보다가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호흡을 들이마시세요."
이번에는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런데 수영하신다는데 담배 같은 걸 피워도 돼요?"
"인혜가 그런 것도 말했어요?"
"말이 많은 애잖아요."
"그건 승우 씨가 말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나는 할 말이 없어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담배 피우면 키스하기도 불편하실 텐데......"
"아, 제가 어째서 눈곱만치도 그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요." 가시가 있는 말이다. 그녀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알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담배가 물려있었던 그녀의 입술을 마치 치과의사가 충치를 보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의 입술에 뭐가 묻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는 민트맛 캔디를 꺼내 해원에게 건넸다.
"이거 드세요. 흡연자의 필수품입니다."
"전 아직 흡연자가 아닌데요."
"저도 아직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죠."

나는 바람을 좀 쐰다고 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종종 멍청한 짓을 한다.
"공화주의 때문이야." 거울 속의 내가 말했다.
어쨌든 말보로 레드는 여자가 피우기에 독한 담배고, 나는 담배를 가르쳐주는 척할 수 있는 시간이 30분 정도는 있으리라.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해원의 하늘색 리본이 달린 머리띠가 멀리서도 보였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리필하기로 결정했다.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416 7
    14949 게임[LOL] 9월 29일 일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9 67 0
    14948 요리/음식팥양갱 만드는 이야기 9 + 나루 24/09/28 255 9
    14947 게임[LOL] 9월 28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106 0
    14946 게임[LOL] 9월 27일 금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146 0
    14945 일상/생각와이프한테 혼났습니다. 3 큐리스 24/09/26 688 0
    14944 게임[LOL] 9월 26일 목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154 0
    14943 게임[LOL] 9월 25일 수요일 오늘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111 0
    14942 일상/생각마무리를 통해 남기는 내 삶의 흔적 kaestro 24/09/25 538 2
    14941 기타2002년에도 홍명보는 지금과 같았다? 4 Groot 24/09/24 654 1
    14940 일상/생각 귤을 익혀 묵는 세가지 방법 11 발그레 아이네꼬 24/09/24 542 6
    14939 일상/생각문득 리더십에 대해 드는 생각 13 JJA 24/09/24 613 1
    14938 일상/생각딸내미가 그려준 가족툰(?) 입니다~~ 22 큐리스 24/09/24 577 14
    14937 오프모임아지트 멤버 모집등의 건 26 김비버 24/09/23 1214 21
    14936 문화/예술눈마새의 '다섯번째 선민종족'은 작중에 이미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6 당근매니아 24/09/22 571 0
    14935 육아/가정패밀리카에 대한 생각의 흐름(1)-국산차 중심 28 방사능홍차 24/09/21 900 0
    14934 도서/문학이영훈 『한국경제사 1,2』 서평 - 식근론과 뉴라이트 핵심 이영훈의 의의와 한계 6 카르스 24/09/19 822 15
    14932 일상/생각와이프한테 충격적인 멘트를 들었네요 ㅎㅎ 9 큐리스 24/09/19 1403 5
    14931 일상/생각추석 연휴를 마치며 쓰는 회고록 4 비사금 24/09/18 586 9
    14930 방송/연예(불판)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감상 나누기 68 호빵맨 24/09/18 1288 0
    14929 음악[팝송] 혼네 새 앨범 "OUCH" 김치찌개 24/09/18 185 1
    14928 일상/생각급발진 무서워요 1 후니112 24/09/17 557 0
    14927 일상/생각오늘은 다이어트를 1 후니112 24/09/16 353 0
    14926 게임세키로의 메트로배니아적 해석 - 나인 솔즈 kaestro 24/09/15 305 2
    14925 일상/생각힘이 되어 주는 에세이 후니112 24/09/15 342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