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7/14 17:00:16
Name   soul
Subject   가난했던 젊은날
저희집은 가난했습니다.
왜 가난했는지 모르겠지만.. 가난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는 그럭저럭 다녔습니다. 급식을 줬으니까요.
용돈은 한 달에 만원.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월드콘 내기를 하다가 지는 날이면
일주일동안 아무런 군것질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돈 한 푼이 부족해서 왕복 4시간 되는 거리까지 과외를 다녔습니다.
교통비를 따져보면 남는게 거의 없었지만
학교 다닐 교통비라도 벌기 위해서는 과외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저에게 돈이란 가장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돈이 있으면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돈이 있으면 힘든 과외를 하지 않아도 됐고
돈이 있으면  놀이공원에도 갈 수 있었습니다.

돈 = 행복.
저에게 돈의 가치란 그랬습니다.

대학입시때.
합격통보를 받고 저는 그 자리에서 울었습니다.
정말 힘들게 공부했는데 붙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머니께 전화 드리니 같이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전화 드리니 학비가 얼마냐고 하십니다.

"아빠 나 합격했어"
"그래.. 등록금이 얼마니. 융자내야겠다."

너무 슬퍼서... 합격한게 죄라서..... 전화를 끊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 중 한 곳에 합격했는데
아버지께는 합격보다 학비가. 돈이... 더 중요했습니다.


대학교 4학년때, 미국의 모 지방대에서 대학원 어드미션을 받았습니다.
조심스럽게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돈이 부담되지만 유학을 다녀오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학비가 얼마냐는 질문을 다시 듣고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꿈을 스스로 접어갔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 대학교 후배를 만났습니다.
유학을 간다고 합니다. 6개월정도 준비했고 합격해서 곧 떠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물어보니, 이러저러한 학원을 다니고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학비는 1년에 5천만원정도 들 것 같다고 하네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돈이 없어서 GRE를 독학했습니다.
남들 다 다니는 학원은 상담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책 몇 권으로 독학하고, 모르는 것은 구글 검색을 하고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가며 묻고 물어서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시험 볼 돈이 없어서 여러 번 응시도 못했고, 한 번의 시험에 모든걸 걸어야 했습니다.
피가 마르고 뼈가 바스러지는 경험을 매일 했습니다.

어렵게 어드미션을 받았지만
집에 돈이 없어서 유학을 포기했습니다.

그런 기억이 떠올라서,
후배 앞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후배는 '누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슬퍼하냐'고 저를 달랩니다..





유학을 포기한 뒤, 고시에 매달렸습니다.
거지같은 인생을 역전시키겠다는 마음으로 고시에 매달렸습니다.
정말로 돈 없이 공부했습니다.
정말로 독하게 공부했습니다.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곱게 자살하고 싶지는 않아서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공부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는게 느껴졌지만,
차라리 공부하다 죽자는 생각으로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초시계로 net 17시간씩 2년 반 공부했습니다.


서른이 될 때 까지 저는 노량진의 컵밥과 편의점의 삼각김밥밖에 먹질 못했습니다.
컵밥 그만 먹으라는 컵밥집 아저씨, 1000원짜리 사는데 통신사 할인받는 저를 비웃는 알바생...
그래도 저는 컵밥을 먹을 수 밖에 없었고, 천원짜리 삼각김밥 세트를 사면서도 통신사 할인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지내고 있지만
그때 유학을 갔더라면 제 생활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종종 생각이 듭니다.



몇 년이 흐르고, 돈에 대한 관점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행복을 찾고, 지금의 제 인생을 잘 가꾸는게 행복한 생활이라 생각합니다.

돈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대학생때 알았더라면,
제 부모님이 유독 돈에 민감하셨다는걸 그때 알았더라면,
이렇게 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인간관계가 먼저라는 것을 부모님께 배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직도 부모님께서는 사람을 믿지 마라는 말을 반복하실 뿐입니다.

이제는 부모님은 그런 분이시라는걸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학을 가는 후배가 당시 제 곁에 있었더라면
많은 힘이 되었을텐데, 많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축하해야하는 후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미안하고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19
  • 춫천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17 1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251 2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193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8 트린 25/12/03 433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542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927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38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498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24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34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690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890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679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14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40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61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46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07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67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06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36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63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69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05 2
15854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 육회한분석가 25/11/17 554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