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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1/04 11:08:02 |
Name | 제로스 |
Subject | 할아버지 이야기 -1- |
* 이 글은 2015. 6. 8. 작성했던 글입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ㅎㅎ) 개인사지만 시대를 엿볼 수 있어 카테고리를 역사라 적었습니다. (업적달성....때문은...아니지는 않을지도) ---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92세. 몇달전 쓰러지셨을 때는 의식도 회복하시고 잠시 오락가락하셨지만 우리도 다 알아보시고 아버지와 장기도 다시 두실 정도로 회복하셨었는데, 아무래도 심장발작이 재발할까 걱정되어 한 스텐트 수술이 고령의 할아버지께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할아버지 당신께서도 외과의사셨고 아들 셋이 전부 의사, 그 중 둘째아들이 교수로 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하셨건만.. 아 병원이나 담당의사탓을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연세가 연세시고 그런 의학적 판단에 대한 고려는 본인도, 식구들도 충분히 했을테니까. 다만.. 아무튼 결과론적으로는 조금 더 빨리, 조금더 고생하시게 할아버지를 보내게 된 손자로서 '그걸 안했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운 마음 정도는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셨다. 한반도 격동의 시대를 보낸 어느 어르신이든 이정도 이야기가 없겠냐마는, 안정된 사회를 살아온 우리 또래들, 이제는 그 이하 연배들에게는 사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이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어설픈 3류 소설마냥 지나치게 극적이며, 담백한 일상속의 개그나 감동 힐링물을 즐기는 우리에게는 사건의 과격함이 지나친 나머지 현실감이 떨어져 오히려 몰입이 어렵다. 공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특히 나처럼 세상 굴곡을 모르고 살아온 편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러나 '혈육의 이야기'라는 것이 나같은 온실속의 화초에게도 강제로 공감을 만들어낸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머리가 비상하고 약삭빠른 한량이셨다. 증조할아버지는 황해도 고향에서 주색잡기로 친척들과 사돈댁-할머니의 친정-에까지 민폐를 끼치고 야반도주해서 만주로 갔다. 그리고 일본인 학교에서 교무원으로 일하셨는데 일본인 교사들 봉급을 관리하다가 학교 월급날 전날 일본이 패전하면서 전부 도망가는 틈에 관리하던 학교돈을 몽땅 들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래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는 작은집 살림을 하고 흥청망청 노느라 본처인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그 동생 식구는 제대로 부양하지 않았고 할아버지가 가장역할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평생 용서하지 못하셨다. 증조할아버지가 그 해 보릿고개에 조금만 더 가족들을 신경썼다면 어머니(내게는 증조할머니)도, 동생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때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할아버지가 모시고 살던 그 분이 친증조할머니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 분은 증조할아버지의 첩이셨던 것이다. 어쩐지 집에서 아무도 피지 않는 담배를 피우고 어린 나에게 화투를 가르쳐주던 그 증조할머니가 무언가 조금 이질적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린 나는 그런 사정을 몰랐었다. 사실 나는 눈치가 없는 아이였고 지금도 눈치는 없다. 조금 나이를 먹은 뒤 생각해보니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가 살갑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할아버지로부터 증조할아버지가 작은집 살림을 하느라 어머니와 동생이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대체 할아버지는 어떤 기분으로 그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수십년을 모시고 사셨던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쁜 건 아버지지 그 분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6.25.전쟁통에 큰아버지들을 할아버지에게 맡겼었는데, 그 때의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셨던 걸까. 증조할아버지를 미워하신 반작용인지, 할아버지는 매우 금욕적이고 성실한 분이셨다. 사실 할아버지는 술도 잡기도 굉장히 좋아하셨다. 아마 '색'도 좋아하셨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괜히 '주색잡기'라고 묶여서 불리는 게 아니고, 아무래도 증조할아버지가 다 좋아하셨으니 아들도 그러기가 쉬웠겠지. 그러나 할아버지는 항상 가족에 충실하셨고, 여자가 나오는 술자리를 증오하셨다. 이런 성향은 우리 아버지에게도 이어져 술을 못하시는 아버지는 잡기만 좋아하셨고, 나는 다시 주/잡기를 좋아한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하셨고 본인이 어린 시절 일본인 학생들 틈에서 차별받으면서도 공부를 잘해서 실력으로 이긴 이야기를 자랑스레 하시곤 했는데, 머리가 굵어진 손자는 할아버지의 옛날 자랑을 들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곤 했다. 특히 소학교 시절 황국신민서사를 전교에서 가장 빨리 잘 암송하여 교장으로부터 당시로서는 엄청난 귀중품이던 회중시계를 상으로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 말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친일파셨던 걸까? 할아버지는 중국장춘에서 의대를 나오셨는데, 그래서 중국어를 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불안정한 당시의 시대상 속에서 생존에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하시고 러시아어와 영어도 익혀두셨다. 할아버지 세대가 일어를 네이티브로 하는 거야 두말 하면 잔소리고.. 손자인 나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할아버지는 5개국어를 하셨던 거다. 꺼삐딴리를 읽으면서 나는 할아버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만화 '쥐'를 읽으면서 주인공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던 폴란드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혼란하고 잔인한 시대에 생존하고자 했던 이 개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인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생존과 영달에 사용하였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고 결론내렸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변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지만, 손자인 나는 그렇게 변명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가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내린 위 결론이, 나의 정치적 견해와 개인의 삶과 국가적 위기에서 취해야할 행동에 대한 나의 사상이 할아버지의 삶이 달랐더라도 똑같았을까? 할아버지는 일제가 패망하고 고향 황해도로 내려왔다가, 공산당이 지주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처형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이남으로 내려오셨다. 당시에는 이미 이동이 통제되었었는데, 일련의 월남시도자들은 야밤에 나룻배를 타고 노를 저어 황해를 건너왔다. 당시 아이들이 울면 경계병들에게 들켜 총살당할 수 있기에 어린 아이와 아기들에게 독한 소주를 억지로 먹여 모두 곯아떨어지게 하고 월남했는데, 급성알콜중독으로 아기들이 사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었었는데, 할아버지 본인으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같이 월남했던 누구네 애기도 그렇게 죽었어' 라는 덤덤한 서술이 더더욱. 6.25. 전쟁중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북한군에 잡혔었다. 병원에서 진료를 하던 중에 간호사들과 함께 잡혀갔다는데, 당시 의사는 쓸모가 많았기에 죽이지 않고 끌고 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치료하던 환자들은 공산군이 모두 죽였다고 한다) 그때 트럭 뒤에 의사들과 간호사들을 싣고 어디론가 이동하던 중, 앞에서 소란이 났다고 한다. 아마 앞쪽 트럭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도망을 쳤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탄 트럭을 지키던 병사들도 그 쪽으로 정신이 팔렸고, 그 때 할아버지 옆에 있던 간호사가 '지금 다 같이 도망쳐야 한다,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도망칠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고 할아버지가 탄 트럭의 사람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뒤에서는 서라는 소리와 총소리가 들렸고 할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 얼마간은 옆에서 도망치자고 했던 간호사가 같이 뛰고 있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그 간호사가 생명의 은인인데 이후 평생 그 간호사를 다시 만나지 못한걸 보면 그때 거기서 다시 잡혀서 이북으로 끌려갔거나 죽었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계속 계속 뛰어서 한강나루터에 이르셨고, 거짓말같이 사공 혼자 타고 있는 나룻배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끌러주고 강을 건너달라고 부탁하셨고, 그렇게 할아버지는 강을 넘어 남쪽으로 가실 수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날은 이승만이 다리를 끊어버렸던 바로 그날일 수도 있고, 그 다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날 때마침 그 때에 그 나루터에 사공이 있는 나룻배 한척이 있었을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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