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19/01/21 22:20:55 |
Name | 메아리 |
Subject | 서평 - 「나무 위의 남작」 – 이탈로 칼비노 |
이탈로 칼비노는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쿠바 태생의 이탈리아인인 그는 이탈리아에서 주로 살았으며, 2차 대전 당시 반파시즘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었다. 한 때 공산주의자였으나, 소련의 폭압적 형태를 보고 탈당해 버린다. 유럽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견인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우리의 선조들(I nostri antenati)> 3부작 『반쪼가리 자작』,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 가장 유명한 『보이지 않는 도시들』가 있다. 코지모 디 론도는 12살에 달팽이 요리를 먹으라는 남작 부친의 강요를 거부하고 나무에 오른 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땅을 밟지 않는다. 사랑도 혁명도 모두 나무 위에서 맞이한 그는 땅위에 사는 모든 이에게 이단아였다. 늙어 죽기 직전에 죽음 대신에 강풍에 휘말린 기구의 끈을 잡고 하늘로 떠나버린 그는 나무 위 왕국의 왕이자, 땅을 내려다보는 이였다. 코지모는 나무 위로 올라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여타 다른 이들과는 다른 색채로 꾸민다. 땅에서 인간의 길로 걷는다는 것은 기존의 체제를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는 그러한 길을 거부하고 나무 위로 자신 만의 길을 만든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질서와 완전히 결별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에게서 검을 받는 것은 기존 질서와의 소통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그는 자신이 살던 옴브로사와 결별하지 않고 계속 연관되어 살아간다. 인간에게 가장 엄격한 금제(禁制)는 무엇일까? 법, 혹은 도덕인가? 아니면 관습? 코지모는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금제 중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나무 위에서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것은 누가 명령해서도 강제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었다. 이 소설은 자신의 선택이 법이나 도덕, 그 어떤 보편적 가치보다도 강력한 금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자기가 자신에게 가하는 금제의 허약함에 대해서도. 수많은 다짐과 맹세를 했지만 우리는 코지모처럼 하지 못하고 금새 무너지기 일쑤다. 담배도 끊지 못하고 술도 끊지 못하고 게임도 도박도 쉬이 끊지 못한다. 우리는 코지모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걸까? 코지모는 그 금제를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 버렸다. 나무 위에 산다는 것, 그것은 곧 코지모를 뜻한다. 코지모에게 그 선택은 곧 삶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때때로 하는 선택은 많은 경우 삶이 되지 못한다. 그 말은 그 선택을 의미 있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한 선택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두는 걸까? 결국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하는 자신, 혹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 자신이다. 문제는 그 선택을 통해 만들어 가는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는가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가라는 방향성 말이다. 푸코는 이 지점에서 ‘실존의 미학’을 말한다. 이 말은, 우리는 자신을 아름다운 예술작품처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코지모가 나무 위에서 공부를 계속 한 이유도 그것이 자신을 만들어 가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지모는 귀족 남작으로 자신을 한정짓지 않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프리메이슨이자 자코뱅당원이자 나폴레옹을 만났던 코지모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땅에 묻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 항상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을 관철시키려 한 코지모의 용기에 경의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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