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9/24 10:40:33
Name   Moleskin
Subject   『오직 한 사람의 차지』를 읽고
소설은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소설은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소설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말은 우정, 사랑 정도가 있겠지만 모든 인간 관계는 그런 명사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 그건 친한 관계일수록 더욱 그렇다. 아니, 가장 친밀한 관계는 어떤 감정의 단어들로도 표현할 수 있다. 사랑, 동정, 증오, 미움, 후회, 분노. 마음이라 부르는 모든게 뒤섞인채로 다가온다. 나의 아버지, 나의 자매, 나의 베프 보다는 멀고 아무도 아닌 사람보다는 가까운 그런 관계. 그러니까 가깝다는 말로 형용하기는 어려운데 확실히 멀진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떨까. 처음에는 단편적인 인상만 남아있던 상대에 대해 점차 입체적인 판단을 쌓아가는 상황. 우리는 그 순간 한 사람의 인생이 다가 오는 것을 본다.

김금희의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그 순간을 보여준다. 연락처의 번호로, 명함의 이름, 간접적 관계로만 기억되던 한 사람이 생생히 살아 숨쉬는 과정말이다. 소설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체스의 모든 것>에서 '나'는 선배와 국화의 연결고리인 체스를, 그리고 나를 그린다. 국화와 선배의 관계는 체스였지만 체스가 아닌, '결국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따질 필요도 없는 모든 것'이었다. 김금희의 시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문상>이다. 송은 부음을 듣고 재단이 지원하는 연극을 이끄는 희극배우를 만나러 대구로 내러간다. 일로서 맺어진 이 관계에서 벗어나 희극배우는 송을 대구 이곳저곳을 이끌고 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송형'은 그로부터 한 때 사랑했던 양주임의 유학 이야기를 듣고 조모상을 치뤘던 시간들을 기억해낸다. 오랜만에 송은 양에게 연락해 공허하고 무의미안 대화를 나누었고 생각보다 무르지도 달지도 않은 밤을 씹어 삼켰다. 반나절 남짓한 방문, 타의 가득한 여행과 대화로부터 송은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봤다.

나의 것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과 마주하는 일은 결국 또다른 나와 그리고 세상과 새롭게 마주하는 일이 된다. 설령 그 사람이 결국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더라도 말이다. '윤아'는 현경의 첫사랑을 마주하고 그렇게 나쁠 것도 좋을 것도 비극도 희극도 없는 얼굴로 노래하는, 그냥 흔한 어느 친구의 류라고 평가한다. 그런 류에게서부터도 그녀는 『천상의 만남』이라는 잡지의 한 구절, 신은 언제나 문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떠올린다.

작가의 말에서 김금희는 본인이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상하는 일을 두려워하며 물러서지 않고 모든 상태를 기록하려 노력했다는 점을 밝힌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붙드는 일, 삶에서 우리가 마음이 상해가며 할 일은 오직 그 뿐인 것이다.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기억을 곱씹는 과정 속에서 나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다시 태어난다.



5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229 1
    15926 일상/생각나를 위한 앱을 만들다가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큐리스 25/12/25 367 6
    15925 일상/생각환율, 부채, 물가가 만든 통화정책의 딜레마 9 다마고 25/12/24 538 11
    15924 창작또 다른 2025년 (14) 2 트린 25/12/24 134 1
    15923 사회연차유급휴가의 행사와 사용자의 시기변경권에 관한 판례 소개 3 dolmusa 25/12/24 469 9
    15922 일상/생각한립토이스의 '완업(完業)'을 보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1 퍼그 25/12/24 559 15
    15921 일상/생각아들한테 칭찬? 받았네요 ㅋㅋㅋ 3 큐리스 25/12/23 496 5
    15920 스포츠[MLB] 송성문 계약 4년 15M 김치찌개 25/12/23 205 1
    15919 스포츠[MLB] 무라카미 무네타카 2년 34M 화이트삭스행 김치찌개 25/12/23 129 0
    15918 창작또 다른 2025년 (13) 1 트린 25/12/22 178 2
    15917 일상/생각친없찐 4 흑마법사 25/12/22 590 1
    15916 게임리뷰] 101시간 박아서 끝낸 ‘어크 섀도우즈’ (Switch 2) 2 mathematicgirl 25/12/21 315 2
    15915 일상/생각(삼국지 전략판을 통하여 배운)리더의 자세 5 에메트셀크 25/12/21 423 8
    15914 창작또 다른 2025년 (12) 트린 25/12/20 220 4
    15913 정치2026년 트럼프 행정부 정치 일정과 미중갈등 전개 양상(3) 2 K-이안 브레머 25/12/20 339 6
    15912 게임스타1) 말하라 그대가 본 것이 무엇인가를 10 알료사 25/12/20 569 12
    15911 일상/생각만족하며 살자 또 다짐해본다. 4 whenyouinRome... 25/12/19 570 26
    15910 일상/생각8년 만난 사람과 이별하고 왔습니다. 17 런린이 25/12/19 907 21
    15909 정치 2026년 트럼프 행정부 정치 일정과 미중갈등 전개 양상(2)-하 4 K-이안 브레머 25/12/19 455 6
    15908 창작또 다른 2025년 (11) 2 트린 25/12/18 252 1
    15907 일상/생각페미니즘은 강한 이론이 될 수 있는가 6 알료사 25/12/18 644 7
    15906 기타요즘 보고 있는 예능(19) 김치찌개 25/12/18 371 0
    15905 일상/생각무좀연고에 관한 신기한 사실 5 홍마덕선생 25/12/18 591 3
    15904 일상/생각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더 반짝일 한아이의 1학년 생존기 10 쉬군 25/12/18 500 32
    15903 IT/컴퓨터잠자고 있는 구형 폰을 네트워크 플레이어로 활용하기 9 Beemo 25/12/17 718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