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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2/21 01:52:49
Name   celestine
File #1   一把青_(電視劇).jpg (17.5 KB), Download : 35
Subject   일파청 一把青 (그토록 푸르러) 上


항일전쟁에 승리하여 난징으로 환도한 그해 우리 부부는 널따란 인애동촌仁愛東村 중하급 공군 관사에 거처를 마련했다. 사방이 꽉 막힌 쓰촨에서 수년간 전란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일찍이 여섯 왕조의 수도요, 곳곳마다 유적이라, 제왕의 기상이 숨쉬는 고색창연한 도시는 우리 눈을 환하게 비추었다.

당시 남편 웨이청偉成 은 11대대 대대장이었다. 휘하의 두개 소대가 미국 훈련을 마치고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이 조종사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는 한편 임무로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긴급 시찰을 요하는 곳이면 남편은 늘 직접 부대를 인솔하여 출동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얼굴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웨이청은 시찰 때마다 제일 아끼는 부하 궈쩐郭軫 을 데리고 갔다. 궈쩐이 쓰촨 관현 항공학교 학생이던 시절부터 남편은 입이 마르도록 궈쩐 칭찬을 한 터였다. 궈쩐 그 녀석은 굉장히 우수하다고, 앞으로 크게 될 거라고. 과연 몇 년 되지 않아 궈쩐은 소대장으로 껑충 진급하여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궈쩐은 공군 유가족 출신이었다. 웨이청의 동기였던 부친은 비행 도중 격추당했고 모친도 곧이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궈쩐이 항공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리 부부는 명절마다 집에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 남편과 나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혈혈단신 궈쩐을 양아들삼아 돌보았다. 머리를 빡빡 깎고 황토색 교복을 입은 그 무렵 궈쩐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똑 부러졌지만 말투에선 아직 아이다운 천진함이 묻어나왔다. 궈쩐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곧바로 난징 우리집에 인사하러 왔다. 궈쩐은 날 보자마자 사모師娘  라고 깍듯이 부르고 군대식 경례를 절도 있게 올렸다. 모피 칼라가 달린 항공 점퍼에다 단단히 졸라맨 혁대에 달린 Rav-Ban 표 고글갑,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국식 공군 군복을 갖춰 입은 궈쩐 모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눈썹 위까지 챙이 오게끔 눌러쓴 군모 아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윤이 나게끔 머릿기름을 발라 날렵하게 귀 뒤로 빗어 넘겼다. 일이 년 새 이토록 늠름하고 훤칠하게 자랄 줄이야.

"어쩐 일인가, 총각. 보아하니 경사를 알리러 왔으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경사는요, 미국에서 몇 백 불 벌어왔을 뿐입니다" 궈쩐이 대답했다.
"그럼 이제 색시 얻어야겠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사모. 그렇지 않아도 찾는 중이랍니다 " 궈쩐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전후 난징은 우리네 젊은 조종사들 천하였다. 도시 어디든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아가씨를 팔짱에 끼고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는 젊은 공군 아해들 천지였다. 그렇다, 다들 연애중이었다. 미혼 조종사들 모두가 연애를 했다. 한달 새 나는 남편의 훈련생들이 보낸 청첩장 수통을 받았다. 하지만 궈쩐은 미국에서 돌아 온지 1년이 다 되 가도록 소식이 없었다. 신여성 아가씨를 우리집에 데려온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그때마다 나는 두반이어 豆瓣鯉魚 (잉어찜) 를 만들어 대접했다. 나중에 내가 처자랑 어찌 되가는지 물으면 궈쩐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모. 잠깐 재미삼아 본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궈쩐이 한달음에 달려와 말했다. 이번엔 진짜라고, 진링여고에 다니는 주칭朱青 이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사모" 궈쩐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보시면 아실 거예요, 조만간 주칭 데리고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사모, 저도 여자한테 이다지도 일편단심 될 줄 몰랐다니까요"

내가 아는 궈쩐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셌다. 어린 나이에 빠르게 진급해서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여자가 아니면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평소 내게 털어놓곤 했다. 이전에 데려온 아가씨들 모두 출중한 외모였지만 누구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궈쩐이 반할정도면 필시 대단한 미인이겠 거니 싶었다.

그런데 웬걸, 주칭의 생김새는 내 짐작과는 전연 딴판이었다. 그날 궈쩐은 우리집에 주칭을 데리고 와서 점심을 들었다. 주칭은 18,9살 먹은, 마른 체구에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아가씨였다. 초대받은 자리었지만 딱히 치장에 공들인 차림새는 아니었다. 반쯤 유행 지난 수수한 푸른색 치파오를 입고 소맷자락에 하얀 비단 숄을 겹쳤을 따름이었다. 머리도 인두로 매만진 티 없이 머릿기름을 발라 단정히 귀 뒤로 빗어 넘겼을 뿐이었다. 끈 달린 검은색 가죽구두에 발목까지 오는 흰 양말은 깔끔해 보이긴 했다. 쓱 봐도 몸매는 가냘프고 밋밋했고 얼굴엔 아직 푸르른 빛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양미간은 청초하고 수려한 인상이었다. 주칭은 나를 보더니 수줍게 고개를 반쯤 숙여 인사했다. 연약한 아기새처럼 귀엽고 보듬어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식사 내내 내가 이것저것 말을 시켜보았지만 주칭은 겁먹은 듯 모기만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한두마디 어물어물 대답했다. 반면 궈쩐은 주칭에게 요리를 담아준다, 차를 따라준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얘기를 하라고 채근했다.

"이 여자가 이리 붙임성이 없답니다" 궈쩐이 주칭을 가리키며 성급하게 말했다 "저랑은 말을 잘하는데 다른 사람 앞에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려요. 사모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 이러면 안되지"

궈쩐이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이자 주칭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됐다" 나는 괜히 무안해서 궈쩐이 말하는 도중 끼어들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가 어색할 수도 있지, 너무 재촉하지 말고. 다 먹었으면 현무 호숫가에 산책이라도 가보렴. 거기 연꽃이 활짝 피었다더라”

궈쩐은 아끼는 신형 스쿠터를 몰고 왔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가 궈쩐은 주칭을 부축해 뒷자리에 오르게 하고 목도리 둘러주었다. 그리곤 경쾌하게 시동을 걸고 득의양양하게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곤 유유히 떠났다. 뒷자리에서 궈쩐의 허리를 꼭 감싸 안은 주칭의 목도리가 머리 위로 높이 휘날렸다. 주칭을 바라보는 궈쩐의 다정다감한 눈빛에, 과연 이번엔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하루는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퇴근해 집에 들어오며 말했다. " 궈쩐 이놈 갈수록 말썽이야! 이런 놈일 줄 내 진작 알았다면!"
"무슨 일인데?"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남편이 궈쩐에 대해 험한 소리 하는 건 처음 들었다.
"당신 몰라서 물어? 그놈 진링여고 여학생 뒤꽁무니 쫒아다니는거 잘 알지 않은가? 이놈 연애한답시고 정신머리가 나가선! 툭하면 학교에 쳐들어가서 수업중이건 말건 여자애를 불러내고.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비행연습때 학교 위로 조종기를 몰고가서 한바탕 소란이었다지 뭔가. 수업 중에 여학생들이 죄다 목을 빼고 구경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고. 학교 교장이 사령부에 항의하러 오질 않나, 군 체통이 말이 아니야. 내 기필코 이놈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어!"

궈쩐은 근신 처분을 받고 소대장 직무도 박탈당했다. 나를 만난 자리에서 궈쩐은 변명조로 말을 늘어놓았다 .
"사모, 제가 설마하니 일부러 선생님 화를 돋우려고 사고 쳤겠습니까? 주칭이 제 마음을 가져가버렸으니 어쩝니까. 몸은 하늘을 날아도 마음은 땅에서 주칭이랑 함께 하고픈걸요. 주칭은 천성이 얌전하고 정숙한 아가씨에요, 낯가림 심하고 화통하지 못할 뿐이에요. 학교에선 퇴학당하고, 충칭에 계신 어머니는 얼른 돌아오라고 전보를 부치셨는데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집안이 뒤집어졌다지 뭡니까. 저랑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했다구요. 지금은 혼자 여관 단칸방에 머문답니다. 저 말곤 의지할 데가 없어요"

"철이 없구나" 나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토록 똑똑한 아이가 연애에 빠져 이렇게 사리분별도 못하게 될 줄이야. “기왕지사 이리 된 거 어서 식 올려야지"
"사모, 바로 그것 때문에 왔답니다. 선생님과 사모께서 우리 결혼식 주례를 서주십사 하고요." 궈쩐은 활짝 웃었다.

궈쩐과 주칭은 식을 올린 뒤 우리 부부가 사는 인애동촌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둘은 궈쩐이 결혼휴가 2주를 받아 항저우로 신혼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짐을 싸기도 전에  갑자기 나라 안에서 전쟁이 터졌다. 웨이청 대대는 둥베이 전선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떠나는날 아침, 어슴푸레 동틀 무렵 궈쩐이 우리집 부엌에 불쑥 들어왔다. 나는 마침 남편 아침밥을 안치는 참이었다. 궈쩐은 군용 외투를 대충 걸치고 머리는 온통 헝클어진 데다 눈에는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고 수염도 깍지 않아 덥수룩했다. 궈쩐은 내 손을 꼭 붙잡고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 무슨 일이 있어도 제발 꼭...."
"무슨 말인지 내 알지 " 나는 말을 잘랐다 "자네 떠나 있는 동안 자네 처는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사모-" 궈쩐은 계속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주칭은 아직 철부지라서요, 공군의 규율규범을 잘 몰라요. 딸이다 생각하시고 잘 좀 이끌어 주십시오"
"그럼 그럼, " 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사모가 네 스승한테 시집온지 십 수년, 공군에서 보고 겪지 않은 게 없어야. 내가 보살핀 공군 부인네들이 어디 한둘인가. 주칭은 바보도 아니니 걱정 말고 나한테 맡기렴"

웨이청과 궈쩐이 떠난 후 나는 집안을 치우고 주칭을 살피러 신혼집으로 향했다. 정부에서 분양 받은 좁다란 목재 단층집이었다. 이사오기 전 궈쩐이 사람을 불러 칠한 벽이며 문과 창문에 걸린 커튼이며 모두 정갈하고 산뜻했다. 안에 들어서자 거실의 신혼 장식이 그대로인게 눈에 띄었다. 탁자와 의자 위엔 청홍색 결혼 예물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어떤 것들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였다. 탁자 아래 빼곡한 꽃바구니엔 꽃망울 터진지 얼마 안된 싱싱한 장미와 붓꽃 그리고 벽옥색 봉미초가 담겨있었다. 벽 여기저기 붉은색 기쁠 희 喜 장식이 붙어있었고 한가운데엔 궈쩐의 동기가 선물한, 오동나무 재질에 금박으로 < 백년해로 白頭偕老> 가 쓰인 편액이 걸려있었다.

주칭은 내가 방에 들어오는 기척을 못들었는지 얼굴을 이불에 파묻고 침대 위에 엎드려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화려한 신혼 예복을 입었지만 정성들인 신부머리는 헝클어져 끄트머리가 잔가지처럼 삐죽삐죽했다. 오색원앙이 수놓아진 이불자락은 주칭이 구겨 트려 주름투성이에 얼굴 자국이 난 곳마다 눈물로 함빡 젖어 있었다. 주칭은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지만 울음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사모"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얼굴빛은 칙칙했고 눈은 퉁퉁 붓고 몸은 그새 더 수척해졌다. 나는 주칭에게 다가가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뜨거운 물수건을 건넸다. 주칭은 손을 내밀다 말고 얼굴을 감싸며 다시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바깥에선 트럭과 지프차에 짐을 싣느라 쨍쨍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가 쉴새없이 울려 퍼졌다. 거기에 동네 군인들이 한명 한명 전장으로 떠날 때마다 여자들의 절규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까지 한데 섞여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주칭이 겨우 울음을 그치자 나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랬다.

“처음엔 다 그래. 갑자기 가버렸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다.  오늘은 밥 하지 말고 우리집에 와서 같이 저녁 들자꾸나”

웨이청과 궈쩐이 가버리고 나선 우린 그들이 어디쯤 있는지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은 화베이에 배치되었단 말이 들려왔다가 또 어느 날은 화중으로 날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몇달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 무렵 주칭은 늘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때그때 요리며, 뜨개질이며, 심지어 마작 노는 법까지 가르쳤다.

"이게 만병통치약이지"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일단 앉아서 패를 섞다 보면 근심걱정이 스르르 사라진다니까"

주칭은 결혼한 후 전보다는 꽤 활달 해졌지만 여전히 낯가림이 심해 나 말고는 동네 사람들과 좀체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나는 동네 사람들 개개인 속사정을 거진 다 꿰고 있었기에 기회 될 때마다 주칭에게 조금씩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칭이 서서히 이 동네에 녹아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오해는 말고 들어보렴" 내가 말했다. "저 여인네들, 다들 인생에 곡절 하나 둘 없는 이가 없단다. 네 뒷집에 사는 쪼우부인, 그이는 결혼을 자그마치 네번이나 했어. 지금 남편이랑 전 남편 셋 모두 한 소대 사람들인데 남편이 전사할 때마다 차례로 개가한거지. 다들 돈독했던 사인데 과부된 그이를 모른 채 할 수 있나. 그리고 맞은편 사는 쉬부인 지금 남편, 원래는 시동생이었대. 형제 둘 다 13대대에서 복무했는데 형이 죽고나서 동생이 형수랑 결혼한게지. 전 남편 소생 아이들은 조카이자 자식인데 삼촌이라 부를지 아버지라 부를지 한참이나 옥신각신 했다더라고.”
"그치만 저분들 행복한 거 같은데요. 웃고 떠드는 거 보면" 주칭은 못믿겠다는 눈치였다.
"이 아가씨야" 나는 빙그레 웃었다 "웃지않음, 그럼 어쩌누? 눈물만 짜다가 인생 다 보내게? "

궈쩐이 떠난뒤 주칭은 멀리 외출하는 법 없이 왠종일 동네 안에만 머물렀다. 동네 여인네들끼리 공자묘에 경극을 보러 갈 적에도 따라오지 않았다. 행여나 밖에 나간 사이 사령부에서 궈쩐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못 받을까 겁을 먹은 탓이었다. 어느 날 밤, 사령부에서 웨이청 부대가 상하이를 지날 때 하루쯤 머무를 예정이라 아마 난징에도 잠시나마 들를 짬이 날 거란 소식을 전했다. 다음날 주칭은 이른 아침부터 수선을 피우며 장바구니 두개를 바리바리 채워 장을 봤다. 오후에 주칭네 앞을 지나는 김에 들여다보니 주칭은 푸른색 윗도리와 바지를 입고 낡은 머릿수건을 동여맨 채 등받이 없는 걸상에 올라가 열심히 창문을 닦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왜소하여 까치발을 해도 간신히 닿을까 말까 한데 커다란 걸레를 손에 들고 숫제 온 힘을 다해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주칭, 궈쩐 눈에 그 꼭대기 먼지까지 보이겠니" 나는 웃으며 주칭을 불렀다.
주칭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쑥스러운지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몇 달 사이에 집이 낡아버렸는지, 닦고 닦아도 깨끗해지지가 않네요"

그날 저녁, 주칭은 내게 동네 입구에 위치한 군용전화방에 같이 가자고 청했다. 사령부 사람이 6,7시쯤 우리에게 전화해주기로 언질을 받아놨다. 주칭은 머리를 감고 살구색 모슬린 치파오로 갈아입고서 사과색 머리띠를 두르고 입술연지를 발랐다. 한결 산뜻하고 명랑해 보였다. 처음 얼마간 주칭은 기분이 무척 들떠서 나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6시 종이 치자 주칭은 조금씩 긴장한 기색을 드러냈다. 굳은 얼굴에 입을 다물고 뜨개질 바늘을 놀리면서 계속해서 곁눈질로 탁자 위 전화기를 흘끔거렸다. 이제나 저제나 하염없이 기다린 끝에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전화벨이 울렸다. 주칭이 펄쩍 뛰듯이 일어나면서 무릎 위 뜨개실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황급히 전화기 앞으로 달려간 주칭은 그러나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전화 왔어요"

내가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사령부 사람이 말했다. 웨이청 부대는 상하이에서 딱 두시간 머물고 5시에 이미 쑤베이로 갔다고. 주칭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는 울음을 억지로 참는듯 파르르 떨었다.

"돌아가자꾸나" 내가 말했다.

주칭은 내 뒤를 따라 동네 안으로 걸어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 문가에 다 와서 내가 말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말렴. 우리네 일이 그래,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단다."

주칭은 고개를 돌리고 소맷자락으로눈물을 훔치더니 목이 메여 간신히 말했다.

"하, 하루종일 기다렸는데..."

나는 주칭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주칭, 이 사모가 몇마디 해도 될까? 조종사 부인 노릇은 참말 쉽지 않아요. 하루 24시간 마음이 붕 떠서 눈이 시리도록 하늘만 쳐다본 들 그 사람은 알 길이 없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니는 새를 억지로 붙잡으려 해봐야 말짱 헛일 아니겠니. 주칭, 기왕에 여기로 시집온 거 행여나 내가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여기진 말고 마음 굳게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음에 더 힘든 일이 닥쳐도 버티지”

주칭은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아는듯 모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칭의 턱을 들어올리곤 살포시 웃고 한숨 섞어 말했다.
"집에 가서 오늘은 일찌감치 자렴"

민국 37년 (1948년) 겨울, 우리 군은 곳곳에서 패배를 거듭하여 북쪽 전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우리 동네에도 잇따라 비보가 전해졌다. 동네 사람들은 매일같이 삼삼오오 절과 사당에 가서 참배를 올리고 점괘를 읽고 관상을 보았다. 길흉화복 같은건 믿지 않는 나는 웨이청에게서 소식이 뜸하자 이웃집에서 밤새 마작에 열중하는 것으로 곤두선 신경을 다스렸다. 어느 날 저녁, 이웃 몇몇과 한창 패를 돌리던 중이었는데 주칭네 맞은편에 사는 쉬부인이 뛰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쉬 부인이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이, 사령부에서 방금 연락이 왔는데 궈쩐이 쉬저우에서 참변을 당했다고, 비행기고 사람이고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었다. 허겁지겁 주칭네로 가니 집안은 술렁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의자에 주저앉은 주칭 양옆에선 여인들이 팔을 붙들고 있었다. 주칭 이마에 감긴 붕대엔 손바닥만한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저마다 한마디씩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 아까 소식 전해 듣자 마자 궈쩐 군복을 꺼내 품에 안고선 오열하며 뛰쳐나가더라,  붙잡는 사람들 다 뿌리치고 한달음에 동네를 가로질러 입구 전신주에 기어코 이마를 찧었다우, 겨우 겨우 데리고 들어왔는데 아직 넋이 나간 것 같으이.

나는 생강탕을 건네받아 주칭에게 다가가 구리 수저로 입을 벌리고 탕약을 조금씩 주칭 입 안으로 흘려넣었다. 주칭 얼굴은 마치 속을 가른 물고기처럼 군데군데 피멍자국이 울긋불긋했다. 눈을 크게 떴지만 초점이 없었다. 울진 않았지만 파란 입술이 계속 달싹거렸고 목 깊숙한 곳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사람 발에 밟힌 눈먼 쥐가 죽어가며 내는 무참한 신음 같았다. 생강탕을 다 떠먹이고 나니 주칭의 눈빛에 서서히 생기가 비치고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주칭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다. 나는 주칭을 우리집으로 옮겨와 주야로 곁을 지켰다. 마작도 주칭을 볼 수 있는 곳에서 했다. 잠시라도 눈을 떼는 사이 또다시 어리석은 마음을 품을까 몹시 걱정되서 였다. 주칭은 종일 입을 다문채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매일 내가 억지로 떠먹이는 국 말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자 주칭은 피골만 앙상하게 남을 만치 여위었다.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잿빛에 두 눈은 퀭하게 파였다. 어느날엔가, 국을 다 떠먹인 다음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주칭에게 말했다.

"주칭, 궈쩐을 생각해서라도 몸 추슬러야지. 궈쩐이 알면 저승에서 눈 못 감을라"

주칭은 내 말을 듣더니 별안간 없는 기운을 짜내다시피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곤 내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디찬 미소를 띄고 말했다.

"그이가 뭘 아나요? 온 몸이 산산조각 나버렸는데 느끼고 자시고 할 게 있나요? 전요, 차라리 그이가 부러워요. 저처럼 살아서 죽느니만 못한 거보다 낫죠!"

주칭의 얼굴은 우는지 웃는지 모르게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주칭을 보살핀지 한달이 넘어갈 즈음, 나도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행히 때마침 주칭의 친정어머니가 충칭에서 오셨다. 부인은 주칭을 보시곤 말문을 열지 못하시더니 가슴을 치며 탄식하셨다

"이것아! 이것아! 공군한테 시집가는거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해도 듣질 않더니 기어코 이 지경이 되서는!"

온통 산발이 된 머리에 시커먼 송장같은 얼굴로 주칭은 이불 째 짐차에 실려 가버렸다. 주칭이 가고 몇일 지나지 않아 동네사람들 모두 한꺼번에 난징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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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작가 바이셴융 (白先勇, 1937~) 이 본인이 주도적으로 창간한 잡지 <현대문학> 에 1966년 발표한 단편입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잡지에 실린 단편 14편 모아  <台北人 타이베이 사람들> 을 출판했고요. 참고로 제가 읽은 원문은 여기에 →  https://b111.net/novel/46/46800/4260015.html 그런데 구글링 해보니 한국에 번역 출판된 적 있네요. 80년대 초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국편에 아큐정전, 반하류사회랑 같이 수록되어있음. 글구 번역하신 분이 중국어번역 네임드 셨...외대 허세욱 교수님이세요. 혹시나 작품에 관심 생기시면 꼭 도서관에서 빌려보시길. 저도 구해볼 수 있음 진작에 한국어판 읽고 말았을텐데 원문 조금씩 읽다가 왠지 영업 하고 싶어진 나머지 (...)

* <台北人 타이베이 사람들> 의 단편들 대다수가 영화랑 드라마로 만들어졌어요. 일파청은 한편에 60분씩 무려 31부작 드라마로 찍었네요. 당연히 원작을 엄청나게 부풀렸겠지만 제가 드라마 본게 아니라 뭐라 말은 못하겠어요. 유툽에서 조각 영상 몇개 찾아본게 다인데 다른건 그렇다쳐도 주변부 인물인 남자들 비중을 확 키운거 같아요. 남녀로맨스씬을 대책없이 늘인거 같고 -_-;; 공중전 씬도 꽤나 스펙터클하게 돈들여 팍팍 넣은 티가 나고요. 국공내전뿐 아니라 그 전 중일전쟁도 많이 보여 주는거 같은데 (파일럿이 日本鬼子/쪽바리놈들 외치면서 와다다다 폭격;;) 그럼 저 무매력 남조 나이대가 맞지 않는데....흠흠.  

https://youtu.be/XqCu-t8YWr4

주제가 뮤비입니다. 처음 봤을땐 감정 과잉같아 맘에 썩 들지 않았는데 뭐 듣다보니 나쁘지 않다 싶어요. 풍성한 시대고증 보는 맛도 괜찮을 거 같고. 드라마 볼까말까...그런데 31편이라니 너무 길어...집중력이 따라줄까나 ㅠㅠ 

* 나머지 절반 下 편 배경은 타이베이입니다. <台北人 타이베이 사람들> 이니까요. 단편 주인공들 모두 대륙 곳곳에서 사연안고 타이완에 온 사람들이죠. 

60년대 타이베이에 살면서  <지금 여기 > 가 아닌 <과거 어느곳> 을 맘 한켠에 간직하고 살았던 사람들의 <지금 여기> 도 지금은 또다시 <과거 어느곳> 이 되어버렸어요. 본문의 인애동촌, 제가 <동네> 라고 번역한 권속구 眷屬區 는 권촌眷村 이란 명칭이 더 널리 쓰이는데요, 중화민국군 = 국민당 소속 군인들이랑 가족들 살라고 만든 다세대주택가입니다. 대륙 시절 그대로 당연히 대만에 와서도 일단 살집부터 마련해 줘야 하니까 빨리빨리 대규모로 지었대요. 옛날에 첨 들었을땐 호오, 특권층 전용 거주 구역이구만 ? 라고 오해했는데 그럴리가 ㅋㅋㅋ 물론 고급장교 숙소는 좋았을지 몰라도 대부분 일반 병들 대상 집은 우리로치면 판자촌보다 조금 더 낫달까. 권촌 대부분은 90년대를 마지막으로 재개발로 사라지고 지금은 유적처럼 <과거 어느곳> 으로 흔적만 남았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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