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4/01 01:15:42수정됨
Name   celestine
Subject   유원경몽 遊園驚夢 (화원을 거닐고, 꿈에서 깨다) 下
68ew9

"오늘 저녁은 제가 연이 닿았군요(有緣),  부인 <곤강 昆腔> 을 듣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청 참모가 치엔 부인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웃으며 말했다. 치엔 부인은 쟝삐위에 팔에 걸린 금팔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작스레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술 기운이 머리로 확 차오르는게 좀 전에 마신 화조 몇 잔이 속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열꽃이 피어 오르는 듯 눈 앞에 아지랑이가 몽롱하게 번져 올랐다. 쟝삐위에가 걸친 치파오가 불꽃처럼 날름거리며 청 참모에게 옮겨간다. 청 참모 계급장의 금매화가 불티 마냥 탁 튀어 오른다. 쟝삐위에의 새카만 두 눈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수은처럼 넘실넘실 퍼진다. 청 참모의 가늘고 길다란 눈이 한줄기 검광처럼 번뜩인다. 두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며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다. 불그스레한 두 얼굴의 보조개가 점점 또렷해지며 나란히 하얀 이를 드러낸 채 그녀를 향해 웃는다. 피리와 퉁소 반주가 울려 퍼진다. 물처럼 잔잔히 흐르는 피리 소리가 나른하게 가라앉는 퉁소 소리를 또다시 끌어올린다. <유원> 의 <조라포 皂羅袍 > 다-

색색이 고운 꽃 흐드러지게 피었건만 原來奼紫嫣紅開
말라버린 우물 무너진 담장 뿐이려니 似這般都付與斷井頹垣
소중한 시간 아리따운 정경은 어느 날에나 품을련가 良辰美景奈何天
즐거운 마음 상서로운 소식은 뉘댁 뜰에서 누릴련가 賞心樂事誰家院


두여낭杜麗娘 이 노래하는 이 <곤강> 대목은 곤곡의 경구警句 인 셈이지. 오성호도 말했어. "치엔 부인, 부인의 <조라포> 는 매란방조차 이르지 못한 경지입니다." 그렇지만 오성호는 걸핏하면 너무 높은 음조로 피리를 불었어. (오사부, 오늘 밤 자매들이 너무 많이 마셔버렸어요. 목이 남아나지 않는다니까요. 음조를 조금 낮춰주세요) 오성호는 목 쓰는 사람의 제일 금기는 술이라 했는데. 그렇지만 열일곱째 월월홍이 술잔 들고 다가왔는걸 "언니, 자매끼리 한잔 하자고" 금빛 붉은빛 어우러진 치파오 입은 월월홍이 다그쳤어 "언니, 동생 체면 챙겨주지 않을테야?" 아니야, 동생아. 그리 말하지 말렴. 언니가 네 체면 세워주지 않는게 아니야. 참말 그 사람은 언니 인생 업보란다. 장님사모도 혀를 차지 않았니 "부귀영화 - 남전옥, 뼈가 하나 잘못 맞춰졌느니, 불쌍한 것. 업보로다" 그 사람은 언니 명운이 부른 업보가 아니겠니?  알겠어? 동생아, 업보란다. 하지만 그가 술잔을 받쳐들고 와서 말을 걸었어 "부인" 그 사람은 비스듬히 가죽 띠를 두르고 금빛 휘장을 달고 허리는 질끈 졸라맸지. 광이 번쩍번쩍 나는 백동白銅 징이 박힌 긴 승마화를 신어 타닥 소리가 났어. 술을 마시니 눈꺼풀이 복숭아꽃처럼 물들어선 중얼거렸지 "부인, 난징 매원신촌 치엔 부인을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치엔펑즈 공, 치엔 장군 부인 말입니다.” 치엔펑즈의 부인. 치엔펑즈의 수행참모. 치엔장군의 부인. 치엔장군의 참모. 치엔 장군. "힘들겠구려, 다섯째" 치엔펑즈가 말했다. "가엾게도, 아직 이리 젊은데". "그렇지만 젊은 사람이 양심을 갖췄다니?" 장님 사모가 뇌까렸어 "너희 같은 애들은, 그저 나이 많은 사람이라야 아껴줄 수 있단다" "부귀영화 - 그저 뼈 하나가 잘못 맞춰져 - " 알겠니? 동생아, 그 사람은 언니 인생이 불러들인 업보야. 치엔 장군의 부인. 치엔 장군의 수행참모. 장군 부인. 수행 참모. 업보야, 내가 말했어. 업보라고. 내가 말한다니까. (오 사부, 음조를 낮춰주세요. 목이 좀 이상해요. 아, <산파양山坡羊 > 단락이잖아)


어수선한 마음 봄날 풍경에 갈무리 못한채 沒亂裡春情難遣
깊숙히도 숨긴 슬픔 별안간 샘솟아 오르니 驀地裡懷人幽怨
어릴적부터 아리따운 인연만을 바랬을 따름이라 則為俺生小嬋娟
고귀한가문 헌헌장부 낭군님과 의좋은 부부되길 棟名門一例一例裡神仙眷
이제사 되돌아보니 멀어져간 청춘이여 甚良緣把青春拋的遠
꿈결속 화락한모습 어느님이 보셨을까 俺的睡情誰見


불꽃이 또다시 활활 솟구친다. 맵시있게 위로 뻗은 눈썹까지 타올라 어두침침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불콰해진 두 얼굴이 하나로 합쳐져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옥관자같은 손가락이 피리 위아래를 오르락 내리락 넘나든다. 하늘하늘한 그림자가 불빛을 따라 연보라빛 운모 병풍에 일렁인다. 피리 소리가 점차 가라앉으며 처연해진다. 두여낭 마음속 원념과 정한이 그러하듯이. 두여낭은 곧 꿈에 빠질 터이니 유몽매柳夢梅 도 무대에 오르리라. 하지만 오성호는 <경몽> 의 꿈속 만남이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평했지. (오 사부, 음조를 조금 낮춰주세요, 오늘 너무 많이 마셨나봐요) 그런데 그가 술잔을 들고 다가와 인사했어. "부인" 그가 말했다. 매끄럽게 광이 나는 승마화가 부딪치며 타닥 소리가 났고 백동 징이 눈이 부실만큼 반짝였어. 눈꺼풀이 복숭아 빛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그리 말했지 “부인” 그가 말한다. "부인, 제가 말 타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의 다리에 딱 달라붙은 승마 바지 위로 탄탄한 근육 윤곽을 드러났다. 길고 늘씬한 두 다리가 말등에서부터 쭉 뻗어내려 불집개처럼 말과 단단히 밀착해 있다. 그는 말은 하얀색, 길도 하얀색, 가로수도 하얀색이다. 그의 백마가 내리쬐는 햇살 아래 더욱 하얗게 빛난다. 그가 말한다 "중산릉中山陵으로 뻗은 길 양쪽엔 백화수 (白樺樹 하얀 자작나무) 가 촘촘하게 늘어서 있죠" 그의 백마가 자작나무 숲에서 힘차게 달린다. 보릿대 덤불 사이로 이리저리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하얀 토끼처럼. 태양빛이 말의 등 위로 쏟아져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백마 한 필. 흑마 한 필 - 두 말이 함께 땀을 흘린다. 그의 온몸에서 나는 시큼한 말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의 눈썹은 검푸른 빛이 감돌고 눈동자는 검붉은 불꽃처럼 타오르며 땀방울이 하나 둘씩 이마를 타고 붉은 뺨으로 흘러내린다. "태양이 - " 내가 소리친다. 태양이 눈부셔 눈을 뜰 수 없어. 나무 기둥은 하얗고 정결하고 매끄럽다. 나무 껍질을 한 꺼풀씩 벗기면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날테지. 그가 말한다 "저 길가엔 하얀 자작나무들이 가득합니다" "태양이 - " 내가 소리친다 “태양빛이 눈을 찔러요" 이윽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부인" 치엔 장군의 부인. 치엔 장군의 수행참모. 치엔 장군의 - "다섯째" 치엔펑즈가 잠긴 목소리로 부른다. "다섯째" 쉬어버린 목소리로 당부한다. "부디 몸조심하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메마른 지푸라기 같고 눈 속 심연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침상에서 바싹 마르고 새카만 손을 들고 말했다. "몸조심하오, 다섯째" 그가 떨리는 손으로 금박 입힌 패물함을 열었다. "이건 조모록 (祖母綠 에메랄드) 이오" 그는 맨 위 서랍을 잡아당겼다. "이건 묘아안(貓兒眼 캣츠아이)이고, 이건 비취엽 (翡翠葉子)" "몸조심하시오, 다섯째" 검푸른 입술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엾게도, 아직 이리 젊은데" 부귀영화 – 뼈가 하나 - 잘못 맞춰져. 업보야, 동생아, 그 사람은 언니 운명이 부른 업보란다. 내 말 들으렴, 동생아, 업보야. 부귀영화 - 하지만 단 한 번 살았었는걸. 알겠니? 동생아, 그 사람은 내 업보야. 부귀영화 – 그 때 한 번 뿐이었어. 부귀영화 – 난 단 한 번 살았었단다. 알겠니? 동생아, 내 말 들으렴, 동생아. "언니는 내 체면 세워주질 않네" 월월홍이 술잔을 들고 다가와 말한다.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두 방울 거품처럼 빛난다. "언니, 대체 동생 체면을 뭘로 보는 거야" 월월홍은 금빛 홍빛 옷을 걸치고 불이 옮겨 붙듯 그의 옆 자리에 앉는다. (오 사부, 화조를 너무 많이 마셔버렸어요)


허망하여라, 숨겨온 쓰라린 심사  뉘에게 털어놓을까 遷延,這衷懷哪處言
애달프도다, 구차히 남겨진 세월  하늘에 여쭙사오니 - 淹煎,潑殘生除問天——


그 순간, 구차히 남은 세월 -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그 옆자리에 앉는다. 금빛 홍빛 두른 몸이 바로 그 순간, 술에 발그레한 두 얼굴이 포개지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보인다. 그녀의 눈, 그의 눈. 끝났구나, 나는 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 여쭙사오니 - (오 사부, 제 목이요) 끝났구나, 내 목이. 성대가 떨리는지 목 울대를 만져본다. 끝났어, 성대가 떨리는지. 하늘에 - (오 사부, 노래가 나오지 않아요) 하늘에 - 끝났어, 부귀영화 - 하지만 단 한 번 살았었는걸 - 업보, 업보, 업보 - 하늘에 (오 사부, 제 목이요) - 바로 그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목이 막혀버렸어 - 하늘에 - 하늘에 - 하늘에 -  

"다섯째 언니, 언니 <경몽> 차례야" 쟝삐위에가 자리에서 일어나 치엔 부인 곁으로 가서 금사슬 팔찌를 걸친 팔을 쭉 뻗으며 명랑하게 외쳤다.

"부인 - " 청 참모도 자리에서 일어나 치엔 부인 앞으로 가서 살며시 몸을 숙이고 조용히 속삭였다.

"다섯째, 어서 무대에 오르렴" 또우 부인이 다가와 치엔 부인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징과 북, 생황과 퉁소가 일제히 울리며 <만년환 萬年歡> 반주가 흘러나왔다. 손님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에서 내려온 쉬 부인을 에워싸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생황과 퉁소 박자가 점차로 빨라지고 높이높이 올라간 징이 부딪치며 금빛을 난반사, 차라라랑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 노래 못하겠어 " 치엔 부인이 삐위에를 향해 고개를 미미하게 가로저으며 머뭇머뭇 말했다.

"그럴순 없지" 장삐위에가 치엔 부인 두 손을 잡아끌었다. "다섯째 언니, 무대에 주인공이 빠지면 쓰나. 오늘 밤 언니 노래 꼭 들어야겠어"

"목이 잠겼어" 치엔 부인이 쟝삐위에의 두 손을 벌컥 뿌리치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양 볼이 불에 데인듯 달아오르고 혀가 칼에 베인 것 같은 아픔이 몰려온 순간, 또우 부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다섯째 노래는 넘기고 - 위 참모총장, 총장님의 흑두 (黑頭 재상, 판관 등 공명정대하고 위엄 넘치는 배역, 포청천이 대표적) 로 마무리 해주셔야겠네요"

"좋아요, 좋아!" 라이 부인이 호응했다. "오랜만에 위 참모총장 <팔대추 八大錘 (송나라 충신 악비岳飛 가 주인공인 극)> 를 듣겠구려"

라이 부인이 징과 북 반주자들 쪽으로 위 총장을 떠밀었다. 위 참모총장은 무대에 서서 두 손을 모아쥐고 "변변찮은 재주나마 보여 드리겠소이다" 라고 외쳤다. 관객들이 박장대소했다. 참모총장은 금나라 올출 (金兀朮 금나라 태조의 넷째아들) 이 무대에 오를 때의 <점강순 點絳唇 >을 부르면서 소매자락을 걷어 올리고 말을 타고 달리는 자세를 취했다. 힘껏 박차를 가하며 취기어린 살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만큼 무대를 빙글빙글 뛰어다녔다. 두 눈은 동그랗게 뜨고 짙은 눈썹을 한껏 치켜올리고 함성을 질러 호금 반주를 완전히 묻어버렸다. 라이 부인은 배를 잡고 웃더니 무대로 뛰어 올라가 위 참모총장 뒤에 서서 힘껏 박수쳤다. 쟝삐위에도 재빨리 끼어들어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멋지다! 흑두!" 다른 여자 관객들도 빙 둘러싸고 갈채를 보냈다. 응접실은 박수와 환호 소리가 터질 듯 넘쳐났다.위 참모총장이 노래를 마치자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여자 고용인들이 홍조계원탕 (紅棗桂圓湯 대추와 용안 열매를 끓인 후식 음료) 를 내왔다. 손님들이 지친 목을 달랠 수 있도록.  

또우 부인이 손님들을 실외 노대露台로 인솔해 나갔다. 바깥 공기가 쌀쌀해 손님들은 모두 겉옷을 걸쳤고 또우 부인도 하얀 비단 숄을 어깨에 두르고 무대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치엔 부인은 무대의 석조 난간 옆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침 중천에 걸린 가을 달이 눈에 띄었다. 달빛을 받아 얇게 서리가 내린 양 또우 저택 정원수와 길이 새하얗게 빛났다. 노대 위의 화분 몇개에 심어진 계수나무 꽃향기가 아까보다 훨씬 농후했다. 짙은 물안개처럼 그녀의 얼굴을 뒤덮었다.

"라이 장군 부인 차가 왔습니다" 류 부관이 무대 아래 서서 큰 소리로 손님들에게 차량 도착을 알렸다. 라이 부인의 검은색 링컨 승용차가 정원으로 진입했다.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곧바로 내려 라이 부인이 탑승하도록 공손한 태도로 차 문을 열었다. 라이 부인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또우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위 참모총장과 함께 차에 올랐다. 라이 부인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웃으며 말했다.

"또우 부인, 오늘 공연, 예전 매란방이랑 금소산金少山만큼이나 멋졌다우"

"그럼은요" 또우 부인이 화답했다 " 위 참모총장님 <흑두> 는 참말 금소산 패왕보다도 근사했네요"

무대 계단 위에 선 손님들이 다같이 웃으며 라이 부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 또우 부인의 세단이 들어와 손님 몇을 태우고 갔다. 이어 청 참모가 직접 운전하는 지프차가 들어왔다. 쟝삐위에는 곧바로 걸어가 치파오를 걷어올리고 차에 발을 디뎠다. 청 참모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오르도록 그녀를 부축했다. 쟝삐위에는 아예 몸을 반쯤 내밀고 씩 웃었다.

"이 지프차, 문이 뭐 이래. 가다가 굴러떨어지진 않을까 몰라"

"조심히 운전해요, 청 참모" 또우 부인이 말하고선 청 참모에게 귀엣말로 무언가 몇 마디 덧붙였다. 청 참모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치엔 부인에게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깊숙이 경례를 올리고 말했다.
"치엔 부인,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앉아 시동을 걸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셋째 언니, 다섯째 언니, 다음에 또 봐!"

쟝삐위에는 몸을 뒤로 돌리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양 팔의 금사슬 팔찌가 그리는 금빛 원들이 허공에서 명멸했다.

"치엔 부인 차는? " 손님들이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 계단 위에 선 또우 부인이 류 부관에게 물었다.

"네, 부인. 치엔 부인께서는 택시를 타고 오셨습니다" 류 부관이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

"셋째 언니 - "치엔 부인이 노대 위에서 또우 부인을 불렀다. 사실 아까부터 또우 부인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님 배웅에 정신없는 또우 부인에게 폐가 될까 몇 번이고 말을 삼켰던 것이다.

"그럼 내 차가 돌아오면 치엔 부인을 태워다 드리도록 해요" 또우 부인이 곧바로 말했다.

"예, 부인" 류 부관이 지시를 받고 물러갔다.

또우 부인이 몸을 돌려 노대로 올라왔다. 치엔 부인 눈에 또우 부인이 어깨에 걸친 백색 비단 숄이 달빛 아래 소복히 쌓인 새하얀 눈처럼 보였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야자수들이 쏴아아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또우 부인의 숄이 사르락 휘날렸다. 그녀는 재빨리 옷깃을 부여잡더니 두어번 연달아 살짝 몸서리를 쳤다. 발그레 달아올랐던 얼굴은 갑작스레 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솜털이 곤두서 버렸다.

"가자꾸나, 다섯째" 또우부인이 손을 내밀어 치엔 부인 어깨에 올린 채 저택으로 이끌었다. "가서 마실 차를 내오라고 할게. 우리 둘이서만 이야기 나눈지도 오랜만이구나. 타이베이도 참 많이 변했지?"

치엔 부인은 잠시 머뭇머뭇하다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정말 많이 변했어요"

현관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가볍게 덧붙였다.

"못 알아 볼만큼 달라졌어요 - 처음 보는 높다란 건물들이 어찌나 많은지"



---------------------------------------------------------------------------------------------------------------------------------------------



1. 有緣, 遊園 / 沒緣, 梅園

첫머리, 청 참모가 치엔 부인에게 하는 말을 "오늘 연이 닿았네요/ 있네요" 라 직역하고 괄호안에 원 표현을 써넣었습니다. 물론 "아임럭키" 뜻이니 "오늘 제가 운이 좋네요" 식으로 의역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만 원 표현 有緣 을 굳이 살리고 싶었거든요 ㅠㅜㅜ <有緣 유연> 과 <遊園 유원> 은 중국어로 발음이 둘다 youyuan 입니다. 그리고 치엔 부인의 난징 시절 저택 이름 <梅園 매원> 은 (인)연이 없다는 뜻의 <沒緣 몰연> 과 발음이 meiyuan 으로 역시 동일하구요.

이런 식으로 소설 여러 곳에 세심하게 배치되고 뿌려진 시적운율, 라임을 외국인 독자 입장에서 전부 캐치할 필요는 물론 없겠지만서도 어휘와 발음을 부분적으로 혹은 비슷하게 공유하는 한자문화권 독자로서, 외국 오리지널 풍미를 즐길 수 있는 감각은 공짜 선물이나 마찬가지니까 누릴 수 있는건 함 맛보는거도 좋지 않을까 싶네요. 하나 더 덧붙이면 치엔부인 남전옥과 홍루몽의 가보옥, 임대옥이 모두 공유하는 玉 는 소망하다, 바라다란  뜻의 欲 와 yu 로 발음 같슴다. 한편 과거의 수행참모 정언청鄭彥青 (중국어발음 쩡옌칭) 과 현재의 수행참모 정 程 (중국어발음 청) 은 한국어 발음이 아예 <정> 으로 똑같아서 노골성이 120% 되었다능;;;

2. 상생相生, 상극相剋

전 편 설명에 캐릭터들 속성에 화수목금토 오행이 기반한다고 언급했었죵.

dfs52
이런거..많이 보셨죠?

소설은 게임이 아니니까 작가가 부여한 속성이 인물들 모든 행동을 정하고 운명 가르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무언가는 아닙니다. 뭐, 따지고보면 게임 캐릭터 퍼포먼스도 현질이 최고 속성이 꽤 반영 되긴 하지만 거기에 백퍼 좌우되는건 아니자나요ㅋ

1) 원래 동생 이기는 언니 없다.

남전옥 동생 월월홍이랑 계지향 동생 천랄초 쟝삐위에 둘다 금빛홍빛 치파오 입었죠. 천랄초 쟝삐위에는 이에 더해 금팔찌를 여덟개나 걸쳐서 움직일 때 마다 짤랑짤랑 소리 나구요. 불 속성 반, 금 속성 반? 쇠도끼가 나무를 찍어내듯 (金剋木) 쟝삐위에는 계수나무 언니 혼사 파토내고 대신 들어가 소실일 지언정 사치 누리고 남편 죽고 나선 한몫 챙겨 시집에서 나와 신나게 여유롭게 삽니다 (....) 한편 나무는 불의 땔감 (木生火) ㅠ0ㅠ 월월홍이 매화나무 집 주인 언니 옆에서 팍팍 타오르는 거 보세요오...활활 타오르는 불은 쇠도 능히 녹이며 (火剋金) 다 타고 남은 재는 흙과 하나가 됩니다 (火生土). 과거 수행참모 정언청 승마용 신발에 박힌 백동白銅 징과 황토색 군복, 아아 너무 야해요.... (???)


2) 하지만 언니만한 동생도 없다.

또우 부인 계지향 악세서리에 달린 다이아몬드랑 백금 (은 가격 오르락내리락 하지만서도;;) 이 쟝삐위에 팔찌 황금보다 훨~~~씬 값비싸잖아요, 끗 'ㅅ'
....아무리 아쉬운거 없이 제멋대로 산다지만 전 소실, 현 과부랑 (아마도 정권 핵심 실세) 장관님네 정부인 마님이랑 비교할 순 없자나여 ㅋㅋㅋ 남전옥도 남쪽 촌동네로 밀려나 초라해진 신세지만 아예 생사불명 동생보단 낫고요.

아울러 저리 대놓고 눈에 보이는 비주얼적 물건 형태랑 행동 로직 프론트엔드 코드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오히려 *장님* 사모가 일반인보다 정통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생 로직 백엔드 코드 을 살피자면요, 장님사모가 불경외듯 수십번 반복하는 말은 부귀영화와 업보는 항상 같이 존재 (相生)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의미합니당. 반면 남전옥이 치엔 장군에겐 물론 털어놓지 못하고, 평생 꾹꾹 눌러뒀던 죄책감, 괴로움과 단 한 번 분출했던, '살았었던' 정념은 결코 동시에 존재 할 수 없구요 (相剋)  


3. 我只活過一次 난 단 한번 살았었어


저 대목이 화끈하긴 한데에...'단 한 번' 불륜, 사통 저질렀다고 하질 않나 심지어 대놓고 성관계라고 쓴 글도 있더라고요? 어어...했냐 안했냐가 관건이 아니자나여!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 접어둘게요

라고 하면 펼쳐보란 얘기나 마찬가지죠? ㅠㅠㅠㅠㅠ 이건 뭐 코끼리도 아니고, 하나도 중요한게 아니라고 구구절절 강조할수록 눈에 띄는 모순 으허헝 ㅠㅠㅠㅠㅠ 일단 현실과 대구 이루는 극 모란정 여주 두여낭杜麗娘, 남주 유몽매의 <노골적> 데이트도 결국 두여낭 꿈속 망상이었는데에...사실 멀리 떨어져 서로 어디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남이었다고요....꿈에서 깨고 (경몽) 두여낭은 꿈속의 남자 못잊고 시름시름 앓다가 남주 얼굴도 못보고 죽는데여 -_-; 경몽 파트 지나고 남주가 과거 급제 여주가 환생 등등 길게 이어집니다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중요한건 태어나서 한번도 집 밖에 나가본 적 없는 프린세스娘 뚜리杜麗 (중국 지방관리 태수 딸이니 유럽으로 치면 왠만한 공국 공녀 뺨치는 신분 ㅋ)  망상 상상력이 끝내줬다는 거에여. 연애 경험 커녕 남자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가정교사 두고 공부한 덕분에 로설책 많이 읽고 교양을 쌓았거든요. 상상이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욕망이 인연을 끌어당기는 법. 그러니까 두여낭은 인생 1회차에선 남자 손도 못잡아보고 처녀로 죽었지만 <유원> 이랑 <경몽> 의 환희, 열정, 원념 에너지가 어마어마한지라 인생 2회차 찍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 현실에선 감정이 엄청나게 강력해서 현생 뒤틀어놓은들 환생 옵션은 불가능하잖아여 (....)

휴, 구질구질 늘어놓았는데 여튼 나이든 장군 남편의 새파란 부하랑 젊은 귀부인 사이 로맨스, 너무 식상하다구요. 중세 유럽도 아니고 20세기 초중반 난징 한복판에서 말타고 나잡아봐라라니 솔직히 개연성 떨어지지 않나여. 둘이 나란히 말 타고 잠깐 이동했을수는 있었겠습니다만...그러니까 섹스 했냐 안했냐는 별것도 아니라고요! 갓 스무살, 거기다 배우이자 가수인 예술가 아가씨 터질듯한 감수성, 그리고 자매지간 질투랑 경쟁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 실체 없는 - 감정이 훨씬 어마어마하고 중요한 인생 서사 밑바탕이라니까여.




4. 라이 부인&위 총장

으악, 벌써 설명 너무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본말전도네 ㅠㅠ 본문 극중극 모란정 유원경몽 대사는 건너뛸게요. 조라포랑 산파양 꽤 시간들여 옮겼는데에..쩝. 그런데 막판에 남전옥이 노래 못부른다니까 계지향 또우 부인이 위 총장한테 <흑두> 로 마무리해달라고 하잖아여. 여기서부터 분위기 개그콘서트 난장판 되버림. 계지향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요. <흑두>, 즉 포청천처럼 사이다스런 올바른 결말 주문한건데 눈치 없는 라이 부인이 <팔대추>, 송나라 망하는 이야기 꺼내고 위 총장은 한술 더 떠 주인공 악비 장군 아니라 침략자 金兀朮 금올출 노래 불러재낌 ㅋㅋㅋ 이 사람들 현생도 덕질도 좀체 상황 이해 못하는 캐릭터들이거든요. 어떤 라인 타야 하는지 분위기 파악 안되서 둘 다 실세에선 밀려났지만 다행히 패가망신은 안당하고 적당히 곁가지 신세. 특히 위 (전) 총장은 불명예 퇴직 당한 처지, 본인이 자진한 역할이 고자(환관)인게 우연 아니죠  -_-;;; 적당히 아첨 잘해서 모가지는 안날아갔지만서도. 여튼 넓고 얕으나마 교양이 아주 또 없는건 아니라 금올출 점강순 노래 가사 찾아보니까 존나 간지 쩔더라구요. 줄거리 모르고 요 부분만 보면 걍 히어로 쏭임 ㅋㅋ

兀朮   (點絳唇)   將士英雄,軍威壓眾,兵英勇,戰馬如龍,令出山搖動。
올출 (점강순) : 장사 영웅, 군세는 좌중을 압도하고 병사는 용맹하며 군마는 용과 같아 온 산을 요동치게 하리니
(兀朮上高台。)
(올출 무대에 오르다)

....이 뒤에 이번엔 송나라 꼭 망하게 하겠다, 내가 중원 천하 다 먹겠다 등등이 이어집디다 -_-;;;

라이 부인이랑 또우 부인의 <금소산金少山 패왕> 어쩌고에도 속내는 서로 다름. 라이 부인은 초지일관 옛날이 어쩌고 본인 지식 자랑하면서 밑천 드러내는데 또우 부인은 적당히 맞장구 쳐 주면서 속으론 씁쓸. 위 참모총장의 성 余 는 이지러진 金 이거든요

5. 목석지맹木石之盟 금옥량연 金玉良緣

l2x3231

이 이야기는 홍루몽의 그림자이자 모란정 유원경몽을 상하좌우 반전시킨 거울 속 영상이에요. 다만 무대 막이 내리고 관객들 다 물러간 다음, 또우 부인이랑 치엔 부인 둘만의 시간 *-_-*은 작가만의 순수한 배려로 보이네요. 임대옥이랑 가보옥 목석지맹의 완성일 수도 있지만 -  계수나무 또우 부인과 푸른 옥 치엔 부인 - 정경 묘사는 설보차랑 가보옥 금옥량연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또우 부인 외양이 살짝 포동한 설보차 薛寶釵 와 닮았거든요. 새하얀 눈 雪 이랑 설보차 성 薛 둘 다 한국어 발음으로 <설> 이고 중국어 발음으로도 xue 로 같구요. 아니, 어쩌면 설보차♡임대옥 커플링일수도 있겠네요. 이쪽도 금옥량연으로 쓸 수 있겠구요. 맹세, 약속은 언제고 깨지기 마련이라능. 씨실, 날실로 엮인 인연 緣, 이야기text 가 훨씬 튼튼하고 오래간다니까여.



7
  • 애정이 느껴지는 글.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1702 7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42 0
15058 방송/연예예능적으로 2025년 한국프로야구 순위 및 상황 예언해보기 10 문샤넬남편(허윤진남편) 24/11/21 366 0
15057 일상/생각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3 SKT Faker 24/11/21 494 1
15056 오프모임23일 토요일 14시 잠실 보드게임, 한잔 모임 오실 분? 4 트린 24/11/20 313 0
15055 방송/연예페미니스트 vs 변호사 유튜브 토론 - 동덕여대 시위 관련 24 알료사 24/11/20 2794 31
15054 생활체육[홍.스.골] 10,11월 대회 상품공지 켈로그김 24/11/19 242 1
15053 여행여자친구와 부산여행 계획중인데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29 포도송이 24/11/19 671 0
15052 일상/생각오늘도 새벽 운동 다녀왔습니다. 5 큐리스 24/11/19 448 9
15051 일상/생각의식의 고백: 인류를 통한 확장의 기록 11 알료사 24/11/19 488 6
15050 게임[1부 : 황제를 도발하다] 님 임요환 긁어봄?? ㅋㅋ 6 Groot 24/11/18 442 0
15049 꿀팁/강좌한달 1만원으로 시작하는 전화영어, 다영이 영어회화&커뮤니티 19 김비버 24/11/18 910 10
15048 의료/건강고혈압 치료제가 발기부전을 치료제가 된 계기 19 허락해주세요 24/11/18 704 1
15047 일상/생각탐라에 쓰려니 길다고 쫓겨난 이야기 4 밀크티 24/11/16 893 0
15046 정치이재명 1심 판결 - 법원에서 배포한 설명자료 (11page) 33 매뉴물있뉴 24/11/15 1777 1
15045 일상/생각'우크라' 표기에 대한 생각. 32 arch 24/11/15 999 5
15044 일상/생각부여성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합니다. 6 nothing 24/11/14 892 20
15043 일상/생각수다를 떨자 2 골든햄스 24/11/13 454 10
15042 역사역사적으로 사용됐던 금화 11종의 현재 가치 추산 2 허락해주세요 24/11/13 554 7
15041 영화미국이 말아먹지만 멋있는 영화 vs 말아먹으면서 멋도 없는 영화 8 열한시육분 24/11/13 682 3
15040 오프모임11/27(수) 성북 벙개 33 dolmusa 24/11/13 745 3
15039 요리/음식칵테일 덕후 사이트 홍보합니다~ 2탄 8 Iowa 24/11/12 404 7
15022 기타[긴급이벤트] 티타임 따봉 대작전 (종료) 19 dolmusa 24/11/05 1073 31
15038 정치머스크가 트럼프로 돌아서게 된 계기로 불리는 사건 4 Leeka 24/11/11 1087 0
15037 일상/생각와이프와 함께 수락산 다녀왔습니다. 10 큐리스 24/11/11 557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