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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3/27 01:28:51수정됨
Name   cele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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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유원경몽 遊園驚夢 (화원을 거닐고, 꿈에서 깨다) 中


고용인 한 명이 응접실과 식당 사이를 나눈, +자 문양 구멍이 송송 뚫린 도화심목桃花心木  문을 밀어 열었다. 또우 부인은 아까부터 식당에서 나와 있었다. 식당은 눈처럼 새하얗고 반짝이는 장식으로 가득했다. 식당 양쪽에 배치된 커다란 식탁 두 채 위에 덮인 식탁보만 선홍색이었을 뿐, 식탁 위 그릇과 접시는 모두 은제였다. 식당에 들어선 손님들은 서로 양보만 하면서 좀체 상석에 먼저 앉으려 하지 않았다.  

" 그럼 내가 먼저 앉겠네. 이렇게 서 있기만 하면 식사를 어찌 내오겠나? 주인장 성의를 생각해야지"

라이 부인이 첫 번째 식탁 주빈석에 앉고서 위 참모총장을 불렀다.

"위 총장, 여기 제 옆자리에 앉으세요. 아까 매란방 공연 이야기 마저 하십시다" 위 총장이 두 손을 모으고 흔쾌히 응했다 "존명遵命" 손님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두 번째 식탁에 이르자 손님들은 또다시 서로 먼저 앉으시라 권하기 시작했다. 라이 부인은 식탁 너머 치엔 부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치엔 부인, 날 따라 먼저 앉으시우" 또우 부인이 마침 치엔 부인에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두 번째 식탁 주빈석 앞에 데려가선 귓가에 소곤거렸다.

"다섯째 동생, 어서 여기 앉아. 네가 먼저 앉지 않음 다른 분들이 계속 서 계셔야 할 걸"

치엔 부인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두 번째 식탁 주변에 서 있는 손님들 모두 살짝살짝 웃으며 그녀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황망히 두어 마디 사양하는 말을 어물어물 하고 겨우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더니 얼굴까지 살짝 빨개졌다. 옛날엔 이런 연회는 수도 없이 참석했었건만, 하도 오랜만이라 이젠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 치엔펑즈가 건재하던 시절엔 어떤 연회든 십중팔구 그녀가 주빈석에 먼저 가서 앉았었다. 치엔펑즈 부인 자리는 당연히 상석, 그녀는 사양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난징의 모든 귀부인 가운데 그녀보다 격이 높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어찌 그네들 고관대작 소실들과 비견할 수 있을까, 그녀는 치엔펑즈가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처란 말이다. 가엾은 계지향은 그 시절 당당하게 연회를 주재할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어. 생일 연회조차 그녀가 계지향을 위해 열어주었다니까. 계지향은 대만에 온 연후에야 이리 입신양명한 몸. 한편 그 시절 갓 스물 나이의 무대 가수였던 남전옥은 하룻밤 새 장군의 부인이 되었다.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아가씨는 고만고만한 사내에게 시집 갈 적에도 으레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늘, 하물며 그리 어마어마한 대갓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녀의 친동생 열 일곱째 월월홍조차 쌀쌀맞게 꼬집었다. "언니, 그 댕기머리도 잘라야 하지 않겠어? 내일이라도 치엔 장군이랑 언니랑 같이 길거리에 나가면 다들 할아버지랑 손녀 인줄 오해한다고!" 치엔펑즈는 그녀와 결혼한 해 이미 육십 줄에 들어선 나이였다. 하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정당한 신분의 후실 부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신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했기에 자긍심을 가졌다. 치엔펑즈와 함께한 십 몇년간 어떤 연회나 회합에서든 그녀는 예의범절에 단 한 번도 실수 없이 품위 있게 처신했다. 손님 사이사이로 화려하게 사뿐사뿐 나는듯 걸어다니는 그녀를 보며 누가 감히 본디 진회하 (秦淮河: 난징과 양쯔강을 잇는 운하)의 무대 가수 남전옥이었다고 트집잡을 수 있을까.


"힘들겠구려, 다섯째" 치엔펑즈는 늘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감히 그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냉가슴만 앓았다. 치엔펑즈를 원망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그녀 자신이 달게 선택한 길인걸. 치엔펑즈는 그녀를 맞아들일 때 솔직하게 분명히 말했다. 그녀가 노래하는 <유원경몽> 을 듣고 그녀를 만년의 반려로 삼고 싶어졌다고. 그렇지만 친동생 월월홍은 뭐라고 말했던가. “치엔펑즈는 언니 할아버지 뻘인데, 언닌 뭘 더 바라고 자시고 한담?”  극단 스승의 부인, 늘 이치에 맞는 말만 하는 장님 사모도 거들었다. “다섯째 아가씨, 너희들은 그저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서 딸처럼 귀염 받으면 그만이야. 젊은 것들은 뭘 믿고 의지하겠남?” 하지만 장님 사모는 때때로 그녀 손을 부여잡고 안광이 형형한 백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탄식했다. “남전옥, 넌 부귀영화를 다 누릴 팔자인데, 그만 뼈 하나가 잘못 맞춰졌구나. 네 전생의 업이로다! 전생의 업보가 아니면 뭐겠니?" 치엔펑즈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하늘에 걸린 달만 빼곤 가져다 주지 못할 게 없었다. 그녀에게 건넨 온갖 금은보화에 치엔펑즈의 간절하고도 씁쓸한 마음이 느껴졌다. 치엔펑즈는 그녀에게 미천한 출신 때문에 위축되지 말라고, 고관대작과 귀인들 앞에서 항상 자세를 꼿꼿이 하고 당당하게 처신하라고 강조하곤 했다. 매원신촌 치엔 부인이 주재하는 연회에 관한 풍문은 온 난징성을 뒤집어 놓기 충분했다. 치엔 가에선 주연을 열때마다 원대두(袁大頭 : 원세개가 새겨진 북양정부 은화) 를 물쓰듯 쓴다더라. 계지향의 생일 연회만 해도 매원신촌 저택에 놓인 식탁 수만 열 채였다지. 주연 내내 피리를 분 악사는 선예사(仙霓社: 1921년 쑤저우에서 설립된 곤곡 극단이자 배우 및 연주자 양성소.) 소속으로 강남, 강북 통틀어 최고의 연주자로 이름난 오성호吳聲豪 였고, 잔치 음식을 책임진 이는 은자 열 냥을 주고 도엽도桃葉渡 의 녹류거綠柳居 (1912년에 문을 연 난징의 유서 깊은 식당. 현재도 영업중) 에서 하루 데려온 주방장이었다고.  


"또우 부인, 주방장이 어디 사람이에요? 대만에 온 후로 이렇게 훌륭한 샥스핀(魚翅) 은 처음 맛보네요" 라이 부인이 감탄했다. "원랜 황침黃欽, 황부장님이 상하이 시절 거느렸던 사람인데 대만에 와선 저희 집에서 일한답니다 "또우 부인이 대답했다.

"과연" 위 참모총장이 말을 받았다. "황침공은 미식가로 유명하시죠"

"언제 하루쯤 우리집에 불러다 샥스핀 요리 좀 해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손님 대접에 그만이겠는걸" 라이 부인이 청했다. "어려울 게 있나요? 기꺼이 공짜로 빌려드리죠! " 또우 부인이 말하자 손님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치엔 부인, 어서 드시죠" 청 참모가 접시에 붉은 샥스핀 한조각을 담아 식초를 살짝 뿌려 치엔 부인 앞에 내려놓고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 저택에서 제일 평이 자자한 요리랍니다"

치엔 부인이 샥스핀을 맛보기도 전에 또우 부인이 맞은 편 식탁에서 이쪽으로 와 술잔을 돌렸다. 청 참모에게 치엔 부인 술잔을 가득 채우라 시키고 치엔 부인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빙그레 웃었다.

"다섯째, 우리 같이 술 마신 지도 오랜만이구나"

말을 마치곤 치엔 부인과 건배하더니 단숨에 잔을 비웠다. 치엔 부인 역시 천천히 술을 마셨다. 또우 부인이 자리를 떠나며 다시금 청 참모에게 당부했다.

"청 참모, 나 대신 치엔 부인 술 떨어지지 않게 신경 써요. 장관이 안 계시니 청 참모가 이 자리 주인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청 참모가 일어서서 은제 술병을 집어 들고 몸을 돌려 함박웃음을 지으며 치엔 부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치엔 부인은 급히 그를 만류했다 "청 참모, 다른 분 잔을 채워드려요. 전 술을 잘 못 마셔요"

청 참모는 선 채로 부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 부인, 화조 (花彫 : 저쟝성 샤오싱紹興이 원조인 최고급 황주黃酒,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담가 묵혀 두었다가 시집갈 때 축하주로 쓰여 女兒紅여아홍이라고도 부름) 는 다른 술보다 훨씬 부드럽게 넘어간답니다. 이따가 목을 쓰신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따뜻하게 데운 술 조금 드신다고 성대가 상하진 않을 겁니다"

"치엔 부인 주량 엄청 세요. 봐주지 마요!" 치엔 부인 맞은편 자리 쟝삐위에가 성큼성큼 걸어와 제손으로 술잔을 채우더니 치엔 부인 얼굴 앞에 내밀었다.

"다섯째 언니, 나도 언니랑 참말 오랜만에 마시네"

치엔 부인은 쟝삐위에 손을 밀어내고 가볍게 주의를 줬다.

"삐위에, 그렇게 마시다가 취하겠어"

"동생 체면도 생각 안해주다니. 그럼 내가 두 잔 다 마셔버리지 뭐. 취하면 어때, 여기 손님들이 도와줄텐데"

쟝삐위에가 고개를 꺾다시피 뒤로 젖혀 술을 마셔버리자 청 참모가 재빨리 술을 따랐다. 쟝삐위에는 두번째 잔도 단숨에 비우고서 치엔 부인 얼굴 앞에 빈 술잔을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이 광경에 주위 손님들 모두 박수 치며 환호했다.

"쟝 소저가 오늘 흥이 넘치누나!"

치엔 부인은 어쩔 도리가 없어 잔을 들고 조금씩 화조를 마셨다. 따뜻하게 데워진 술이 한 모금 넘어가자마자 온 몸에 열이 확 올랐다. 그렇지만 대만의 화조는 대륙에서 빚은 술에 비해 깊은 맛이 떨어지고 목넘김이 깔끔하지 못하지. 화조가 부드러운 술이라곤 하지만 급하게 마셨다간 숙취가 심하단 말야. 샤오싱에서 빚은 진년(陳年: 오랫동안 숙성시켰음을 의미) 화조가 그리 독할 줄이야. 그날 밤 그 애들 모두 그 맛에 반해버렸지 뭐야! 그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화조 몇 잔 마신다고 목이 상하겠어?” 계지향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어렵게 한 자리에 모인 자매들은 다음에  또 언제 함께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주인이 아직 잔을 들지도 않았는데 손님들이 어디 마음 놓고 마실 수 있으랴? 열 일곱째 월월홍조차 손님들 틈에 끼어들어 소리쳤다. "언니, 우리도 기분 좋게 건배하자고! " 금색과 홍색이 대담하게 어우러진 월월홍의 치파오는 앵무새 깃털처럼 선명했고 뭐든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눈은 매를 닮았다. “언니는 체면 세워줄 줄도 모른담.” 그녀가 꼬집었다. “언니, 동생 체면도 생각해야지” 그녀가 말했다. 오만하게 콧대 세우며 호시탐탐 잇속 챙기려 들고 말투는 빈정대듯 쌀쌀맞기 그지없다. 계지향이 한숨 쉬며 말한 것도 당연하지. "친동생이 노상 친언니 발등을 찍으려 들다니." 월월홍은 -  아직 철 들 나이가 아니라 쳐도 정언청鄭彥青 그 사람까지 같이 농짓거리를 해선 안되지. 그도 술잔을 가득 채워선 눈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권했다. "부인, 저도 부인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술을 마신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고 눈동자는 어두침침했다. 징이 박힌 승마화를 신어 걸음걸이마다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렸다. "부인-"

" 그럼 이제 제 차례군요, 부인" 청 참모가 일어나 양손으로 술잔을 받쳐들고 웃으며 말했다.

"폐를 끼쳐 미안해요, 청 참모"  치엔 부인이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제가 먼저 세 잔 마시겠습니다. 부인께서는 부디 편하신 대로 천천히 드십시오" 청 참모는 연달아 세 잔을 마시더니 술기운에 홍조가 어렸다. 이마는 빛이 반짝반짝 했고 코끝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치엔 부인은 잔을 들어 입술을 살짝 축였다. 청 참모는 치엔 부인 접시 위에 귀비계(貴妃雞: 상하이 명물, 술에 익힌 닭요리. 술에 취한 양귀비를 소재로 한 가극 귀비취주貴妃醉酒 에서 연유) 의 날개를 덜었고 자신도 닭 머리를 집어 술에 곁들였다.

" 아이야아, 무슨 술 따른거에요?"

맞은편 쟝삐위에가 일어나 머리를 쓱 내밀어 위 참모총장이 들고 있는 술의 향을 맡더니 째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위 참모총장은 독특한 금색 계항배雞缸杯 에 술을 따라 쟝삐위에에게 건넸다.

"쟝 소저, 이건 <통소주(通宵酒:밤샘술)> 요  " 위 참모총장이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본디 검붉은 그의 낯빛이 술이 더해지자 돼지 간 비슷한 색이 되어버렸다. "에이잇, 누가 너희들과 밤을 새겠느냐" 쟝삐위에가 손을 휙 내저으며 방백을 읊었다.

"쟝 소저, 백화정(百花亭: <귀비취주>의 주요 무대) 준비가 아직 덜 되었으니 먼저 <취주醉酒> 하시구려"  라이 부인이 식탁 너머에서 농을 던지자 손님들이 또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또우 부인이 일어나 손님들에게 말했다. "곧 무대가 마련됩니다. 모두들 응접실에 모여주세요" 손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 부인을 선두로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 손님 몇이 병풍 앞 홍목 의자에 앉아 악기 음을 조율했다. 호금胡琴 을 맡은 사람 한 명, 얼후二胡 켜는 이 한 명, 월금月琴 연주자 한 명, 소고小鼓 두드리는 이 한 명 그리고 일어선 채로 각각 요발鐃鈸 과 동라銅鑼 (둘 다 징의 일종) 을 손에 든 이들까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부인, 저기 양 선생은 호금도 잘 켜지만 사실 피리야말로 대만에서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평입니다. 이따 연주 들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청 참모는 호금 연주자를 가르키며 치엔 부인에게 귀엣말을 했다. 치엔 부인은 일 인용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살며시 몸을 기댔고 청 참모는 그녀 옆자리, 등받이 없는 둥그런 가죽 간이 소파에 자리잡았다. 그는 치엔 부인을 위해 자스민 차 한잔을 새로 우렸다. 치엔 부인은 차 향을 음미하며 청 참모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려 호금 연주자 양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대략 오십 전후로 보였고 고동색 바탕에 꽃 한아름이 수놓아진 명주 장삼을 입었다. 얼굴은 무척 야위었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백옥처럼 새하얬다. 그는 호금을 악기주머니에서 꺼내 푸른 헝겊을 미리 깔아둔 무릎 위에 얹고서 활을 쥐고 이리저리 가볍게 켜면서 음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슬그머니 머리를 똑바로 들더니 손바람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호금 선율이 솟구치듯 퍼져나왔다. <야심침夜深沉> 의 곡조는 맑고 청초했다. 연주가 끝나자 위 참모총장이 튕기듯 일어나 "멋진 연주요!" 라고 외쳤다. 다른 손님들도 호응하여 박수를 보냈다. 이에 뒤따르듯 북과 징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며 <장군령將軍令> 무대를 예고했다.  또우 부인이 손님들에게 무대에 오르길 청했다. 손님들이 서로 먼저 노래를 들려주십사고 사양하는 와중에 위 참모총장이 삐위에를 호위하며 호금 연주자 쪽으로 걸어가 축강(丑腔: 광대, 환관 등의 우스꽝스런 배역 목소리) 으로 대사를 읊었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이곳은 백화정이옵니다" 쟝삐위에는 양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몸을 하느작거리며 웃었다. 양 팔에 걸친 금팔찌들이 차라라랑 부딪치는 소리가 메아리 쳤다. 관객들의 갈채에 이어 <귀비취주>의 사평조四平調  호금 반주가 시작되었다. 쟝삐위에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관객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절정에 이를 무렵, 금빛 닭이 그려진 찻잔과 주홍색 잔 받침을 소매자락 위에 받쳐든 위 참모총장이 쟝삐위에 앞에 반쯤 무릎 꿇고서 고력사高力士의 대사를 읊조렸다.

"귀비께 이 노비가 술을 올리겠나이다" 쟝삐위에는 술에 취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이쪽 저쪽으로 휘청휘청대다 바닥에 주저앉아 허리를 뒤로 꺾고 고개도 젖히고 입으로 술잔을 물었다. 그러다 잠시 후 술잔을 댕그랑 소리가 나도록 집어 던지더니 두어 곡조를 불렀다.

"인생 하룻밤 봄날 꿈이려니 人生在世如春夢
그저 술로서 심사 풀지어다 且自開懷飲幾盅"

관객들이 하나되어 박수치고 폭소를 터뜨렸다. 또우 부인은 숨이 넘어가도록 웃다가 옆자리 라이 부인에게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리 삐위에, 오늘밤 제대로 취해버렸네요! "

라이 부인은 웃다가 흘린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닦아내고서 큰 소리로 외쳤다.

"쟝 소저, 너무 급하게 마시진 말아요, 양귀비처럼 식초 항아리를 술로 착각할라 "

흥에 한껏 오른 관객들은 웅성거리며 쟝삐위에의 노래가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쟝삐위에는 무대 아래로 비틀비틀 내려가 쉬徐 부인을 무대로 데리고 올라와 관객들에게 외쳤다.

" <상심락사> 주역, 쉬 부인께서 먼저<유원遊園> 을 불러드릴겁니다. 이어서 곤곡의 여왕이자 매파梅派의 계승자, 치엔 부인께서 <경몽驚夢> 을 선사할거구요."

치엔 부인은 움찔하여 고개를 들고 손에 든 차를 왼쪽 협탁에 내려놓았다. 치엔 부인 눈에 이미 병풍 앞에 선 쉬 부인이 보였다. 쉬 부인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한 손을 생황과 퉁소가 올려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색 벨벳 치파오를 걸치고 머리는 정갈하게 뒤로 모아 틀어올렸다. 비취색 귀걸이와 새하얀 귓불이 위아래로 산뜻하게 어울렸다. 무대에 설치된 나팔 모양 조명에서 불빛이 쏘아져 쉬 부인의 그림자가 운모 병풍위에 요요하게 일렁였다.

"다섯째 언니, 잘 들어봐. 쉬 부인 <유원> 이랑 언니 노래랑 비교해 보자고"

쟝삐위에가 와서 청 참모 옆에 털썩 앉더니 몸을 쭉 뻗어 치엔 부인 어깨 위에 손을 얹고선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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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부분으로 나누어 올리게 되네요. 전에 썼다시피 원본은 한 덩어리인데 제가 임의로 나눴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복잡할거 하나 없는데- 중년 덕후 아줌마 아저씨들이 오랜만에 오프 모임 갖구 겸사겸사 먹고 마시고 덕질하는 이야기(??) - 사람, 물건, 극중극에 이중, 삼중으로 담긴 상징이랑 은유, 비유가 어마어마. 그치만 뭐, 온갖 레퍼런스 알면 도움되지만 몰라도 큰 문제는 없지 않나요. 경극 본적 없어도, 심지어 항우랑 우희 스토리 몰라도 장국영옵빠 <패왕별희> 재밋게 볼 수 있자나여 ㅋㅋ 과유불급이라, 지나친 주석은 자유로운 감상에 방해된다 생각하기에 나무위키는 참고로만 봅시다 포인트만 딱딱 집고 싶지만서도 싯구 하나만 해도 안에 담긴 심상들이 위키 하이퍼링크마냥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엮였단 말이죠...그러니 이 밑에서부턴 그냥 안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2. 남전옥藍田玉 치엔 부인 캐릭터 쏭 - 당나라 이상은李商隱 의 시 <금슬錦瑟>

錦瑟無端五十絃 금슬(거문고) 는 어찌 오십 현인고
一絃一柱思華年 현 한줄, 기둥 하나에 화려한 옛 시절 떠올리네
莊生曉夢迷蝴蝶 장자는 새벽 꿈속 나비에 미혹되었고
望帝春心託杜鵑 초나라 망제는 두견새에 봄 마음을 의탁했지
滄海月明珠有淚 푸른 바다에 달빛 비추니 눈물방울 샘솟는 진주
藍田日暖玉生煙 푸른 옥밭(藍田)에 햇살 내리쬐니 아지랑이 피우는 옥돌
此情可待成回憶 정념은 언제고 추억되길 기다리겠지만
只是當時已惘然 그 시절 망연자실한 인연은 어찌할거나

3. 계지향桂枝香 또우 부인 캐릭터 쏭 -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사 <계지향桂枝香: 금릉회고 金陵懷古>

登臨送目, 正故國晩秋, 天氣初肅 높은 곳 올라 멀리 바라보니 옛 도읍은 마침 늦가을 서늘한 날이로구나
千里澄江似練, 翠峰如簇 천리길 맑은 강은 비단결 비취색 봉우리는 화살촉
歸帆去棹斜陽里, 背西風, 酒旗斜矗 오고가는 돛단배 석양이 아우르고 서풍을 등진 주막 깃발 휘날린다
彩舟云淡, 星河鷺起, 畵圖難足 색색의 배들 하이얀 구름 백로가 날아오르는 은하수 화폭에 담을 수 없어라
念往昔, 繁華竟逐, 嘆門外樓斗, 非恨相續 옛날옛적 돌아보매 번영과 화려함을 겨루었건만 성문 밖 탄식 누대의 전투 슬픔과 한스러움이 연이었도다
千古凭高, 對此漫嗟榮辱 천고의 세월 끝에 높은 곳에 올라 눈앞의 정경에 영광과 치욕의 역사 떠올리며 길게 한숨짓노라
六朝舊事如流水, 但寒烟衰草凝綠 여섯 왕조의 과거는 물처럼 흘러가버렸건만 차가운 안개가 시든 수풀에 푸르게 엉겨있네
至今商女, 時時猶唱《後庭》遺曲 오늘날 상점 여인은 시시때때로 옛 노래 <후정後庭> 을 부르나니

+ 商女 를 기녀, 기생으로 옮긴 번역 많던데 글자 그대로 비즈니스우먼으로 보면 안될까나요. 기루의 연예인일 수도, 밥집/주막 경영자일 수도 있죵. 걍 종업원/웨이트리스일수도 있공 ㅋ 마지막 행이 당나라 시 <夜泊秦淮 진회에서 하룻밤 묵어가다>의 구절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 노래하는 여인은 망국의 한 모르고 강 저편에서 <후정화>를 부르누나>에서 따온건데, 후정화 노래는 당나라 이전, 수나라한테 먹힌 진나라 왕이 나라가 어찌되건 말건 흥청망청 놀면서 비빈들한테 부르라 한 노래라 합디다. 가사가 좀 야했다나요. 뭐, 중요한건  당나라부터 송나라를 거쳐 중화민국까지 (그리고 지금도) 난징 진회하 秦淮河 는 열심히 일하는 여자들 노랫소리가 항시 들릴만치 1500년 가까이 상업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나 잘 나가는 동네라는거?

++당나라 오리지날 시는 망국지한을 직접 언급했으니 <가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부르면서 자기네들 장사에만 여념없는 무식한 여자들 ㅉㅉ > 식의 비판 의도가 선명한데 송나라 리버전 사에선 딱히 그런 느낌이 들진 않네요. 작자 왕안석이야 일인지하 만인지상 재상이었으니 공부 열심히 했을 터이고 역사 빠삭한거 당연하고 난징에 와서 감개에 차오를 만도 하죠. 근데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현지 일반인들은 그런 감상 젖을 시간 없다능 ㅋ 여튼 이 사의 작자 왕안석은 본인 감정 토로랑 쓸데없는 꼰대질 비판이랑 헷갈리지 않는 사람 같네요 ㅎ

4. 월월홍月月紅 & 천랄초天辣椒  쟝삐위에蔣碧月

남전옥 친동생 & 계지향 친동생. 캐릭터 쏭 없음다. 얘네들은 고상하게 시나 사로 돌려서 표현할 필요가 없으니까여. 숨은 속내, 과거 따윈 없음. 아주그냥 오늘만 사는 여자들, 심지어 내일조차 없음ㅋㅋㅋ 월월홍月月紅은 매달 피는 꽃이라는 뜻, 흔해서 별 가치가 없다나요. 천랄초天辣椒 는 글자 그대로 매운 고추, 중식당의 고추 기름 원료 -_-;; 언니들은 닉네임도 옥玉 이니 계수나무桂 니 우아하고 고귀한데 얘네들은 정반대로 경박하고 값싸고 성질머리 더러움 -_-;; 머리랑 입이 다이렉트로 연결된 돌직구 캐릭터.

언니들 입장에선 왠수같은 동생년들입니다만 ㅋㅋ 직접 이해관계 없는 제3자 입장에선 이런 사람들이 옆에서 구경하긴 재미있죠;;; 라이 부인, 위 총장 같은 관객들이 쟝삐위에 퍼포먼스에 눈을 떼지 못하잖아요.

사실 얘네들이야말로 타고난 연예인. 노래나 연기 실력 언니들보다 좀 떨어지면 어때요. 스테이지 오르기도 전에 <귀비취주> 대사 자연스럽게 읆는 쟝삐위에, 요즘같음 하루종일 지치지도 않고 브이로그 찍어서 올릴듯요. 인생이 연기고 연기가 인생 ㅋ 언니들은 현실과 연극, 현재랑 과거, 속내랑 표정간 괴리에 힘들어하는데 얘네들은 스트레스 따위 없으니 어찌보면 제일 행복함 ㅋ 월월홍은 현재 시점에 나오지 않으니 무슨 곡절이 있나 싶기도 한데 - 미처 대만에 못오고 대륙에 남았다 끔살당했다던가 ㄷㄷ - 화끈하게 한방에 죽거나 아님 무슨 수작을 써서라도 강하게 살아남던가 둘중에 하나지 처연하게 울고불고 할 인물은 절대 아니죠.

글고 철 덜 들었다고 욕먹을 지언정 하고싶은거 다 내지르고 살아서인지 얼굴에 세월 흔적 하나 없다는 설정, 헤라나 아프로디테랑도 통하는 면이 있네요. 매달 (새로) 피는 꽃, 월월홍은 값싸고 흔함을 의미한다고 위에 썼지만서도, 한편으론 매일 젊음의 샘에서 목욕하는 여신들 연상되지 않나요 ㅎㅎ 뭐, 희랍 신화는 곁다리고 캐릭터 속성은 중국 전통 오행설 - 화수목금토 - 에 기반합니다만, 이건 다음 편에 이어서 쓰겠슴다.


5. 귀비취주貴妃醉酒, 와어臥魚

쟝삐위에가 펼치는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술 주정 자세랑 동작, 꿈틀대는 물고기랑 비슷하다고 경극 용어로 와어臥魚 라 한다네요. 장국영 옵빠 버전으로 봅시당

https://youtu.be/aeniWFzUTmo

"마마, 이 고력사가 술을 올리옵니다" "무슨 술을 올리는 게냐" "<통소주通宵酒> 이옵니다" .네, 영상이랑 본문이랑 동일한 장면입니다. 음, 장국영 옵빠 본체는 아름답지만 동작이랑 자세는 솔직히 잘 모르겠.....아, 허리 완전히 뒤로 젖히고 버티면서 고음으로 노래까지 부르려면 탄탄한 복근 없음 안된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_-;; 영화는 축약한데다 막판에 제자리서 빙글빙글 돌기는 정식 동작도 아닌거 같아요. 으으 취한다아 뱅뱅 도는구나 @_@;;;; 이런 느낌 형상화인거 같은데 무대 공연 실황 영상엔 안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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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세 (?)

6. 계항배 雞缸杯

명나라 청나라 로열 & 노블레스 패밀리들이 쓰던 최고급 명품 도자기. 닭, 병아리, 꽃, 바위가 그려진 찻잔과 술잔. 유럽 왕족 귀족들도 금값주고 주문했다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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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400억짜리 술잔 ㄷㄷ

본문에서 동일한 술잔을 식탁에 둘러앉아 실제 술 따라서 마실땐 <계항배雞缸杯>, 당나라 시대 배경인 귀비취주 공연 무대에 소품으로 쓸 땐 <계결배雞缺杯> 라고 구분했더라구요. <계결배> 는 실제론 없는 단어라 <금빛 닭이 그려진 술잔> 이라 걍 풀어 옮겼습니다.


7. 뼈 하나가 잘못 맞춰져 你長錯了一根骨頭

극단 스승 부인 (사모) 의 한탄 "넌 부귀영화 약속된 팔자인데, 뼈 하나가 잘못 맞춰져서" 이거 자연스럽게 옮기기 쉽지 않네요. 주인공 남전옥은 미모며 노래며 연기며 다 타고났지만서도 아주 작지만 치명적인 무언가가 삐끗한 바람에 팔자가 뒤틀렸단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전생의 업보라 이번 생에서 뭔 노력을 해도 교정 불가능이구요;;;; 감정이 내 맘대로 되나요 ㅜㅠ 좋은 걸 어째요 ㅠㅠㅜ   작고도 치명적인 약점이란 점에선 발 뒷꿈치 깜빡한 아킬레우스랑 쪼금 비슷...은 무슨, 성별은 그렇다 쳐도 외모 성격 완전 반대구만;; 완벽할 수도 있었던 인생이 어떤 실수 혹은 오해 땜에 평생 한을 짊어지고 사는건 홍루몽 남주 가보옥이랑 마찬가지구요. 가보옥의 전생 통령보옥은 아예 출생 자체가 여신의 계산 착오였고 하늘 구멍에 맞지 않은 존재였죠.



9
  • 본문도 주석글도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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