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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3/12 15:06:23 |
| Name | 바보왕 |
| File #1 | patrick_johnson_pillars_ruined_throne_render_3.jpg (122.7 KB), Download : 0 |
| File #2 | Raziel_vs__Kain_by_Raziel45.jpg (161.6 KB), Download : 0 |
| Subject | 고전 게임 <레거시 오브 케인> 소회 : 라지엘의 복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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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쪽 그림 : 노스고스의 옛 기둥 폐허. 지금은 제국의 옥좌가 되었습니다. * 아래쪽 그림 : 라지엘과 케인의 결투 장면...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소울 리버>에서는 양쪽이 모두 칼을 들고 싸운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게시물에 이어 <레거시 오브 케인 : 소울 리버> 1편의 줄거리 전반을 간략하게 써보겠습니다. 2편까지 몰아서 적으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간단하다 보니까 역설적으로 쳐낼 게 별로 없네요. 2편은 요 다음에 개속. 앞서 지난 이야기를 요약하면, <소울 리버>의 주인공 라지엘은 원래 케인이 세운 흡혈귀 제국의 2인자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이자, 왕이자, 신인 케인을 앞질러 등에 날개가 자라는 진화를 이룩하자, 라지엘은 케인으로부터 갑작스러운 배신과 습격을 당하고 수장당합니다. 육체를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한 라지엘은 고대 신의 힘을 통해 영혼을 죽이는 사냥꾼이 되어, 흡혈귀 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흡혈귀 제국의 구 영토에 본격적으로 걸음을 내민 라지엘은, 곧 자신이 본 광경에 연이은 충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라지엘이 처음 기대했던 것은 자신의 시체를 등지고 번영하는 기만자들의 제국이었지... 흡혈귀라고도 할 수 없는 좀비들의 천국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넵, ‘좀비들의 천국.’ 되돌아온 라지엘이 목도한, 흡혈귀 제국의 변화였습니다. 신경 쓸 것도 없을 만큼 시시한 조무래기들 사이로, 시체를 뜯어먹는 시커먼 괴물과 점액질 신체를 끌고 다니는 ‘물체’들이 걷거나 뛰어다녔습니다. 영계로 돌아오면, 인간 혹은 흡혈귀였다는 것마저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된 ‘것’들이 공중을 떠다니며, ‘지느러미로 헤엄을 치고’ ‘갈고리 팔로 타인의 영혼을 갈취하며’ ‘채워지지 못할 허기를 채우느라 잡아먹는 시늉을 하지만’ ‘그나마도 하지 못해 허덕이는’ 끔찍하고 허탈한 광경이 라지엘의 앞을 끊임없이 가로막았습니다. 충격을 받은 라지엘의 마음 속으로 고대 신이 낄낄거리며 질문했습니다. “겉모양이 조금 변했기로서니, 과거의 동족도 알아보기가 그렇게 힘들던가?” 비로소 이들이 과거의 흡혈귀였다는 것을 안 라지엘은 주변의 풍경이 기억하던 것보다 더 풍화되어 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습니다. 라지엘 입장에서는 죽을 뻔하다가 되돌아온 것이 찰나의 순간이었을지 몰라도, 노스고스에서는 라지엘이 ‘심판당한’ 후 다시 수백 년의 시간이 더 흘러가 버린 거였죠. 조무래기 흡혈귀나, 아직도 어떻게 된 건지 용케 버티는 ‘인간’들은 너무 어리거나, 하찮아서 변질조차 하지 못한 경우였던 것뿐이고, 오랜 시간 이어진 흡혈귀의 ‘변신’은 라지엘이 모르는 사이에 타락과 몰락으로 귀결된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도끼 자루 썩은 나무꾼 신세가 된 라지엘은 복수도 복수지만 다급하게 옛날 자기가 상급 기사로서 다스렸던 부하와, 흡혈귀의 피를 이은 자손들을 살피러 갑니다. 그리고는 찾아간 옛 자기 영토에서 한층 절망스러운 소식만을 얻습니다. 라지엘이 바다에 팽개쳐진 후, 케인이 친히 나서서 라지엘의 후예들을 모조리 도륙했다는 겁니다. 분노에 꼭지가 돌아버린 라지엘은 원래 제안 받은 고대 신의 계약이고 뭐고 당장 케인부터 찾아 죽이기 위해, 이제는 케인의 옥좌가 된 옛 노스고스의 성소로 달려갑니다. 당연히 영토의 중심부를 제국이 무방비로 비워두진 않았습니다. 제국의 침투가 돌파로 바뀌면서, 결국 라지엘은 길 중간마다 옛 형제였던 상급 기사 흡혈귀들을 하나씩 마주칩니다. 이들 역시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끝에 각자의 방식으로 괴이한 변신의 말로를 맞이했습니다. 근육몬마냥 비대해진 팔을 다리처럼 놀리며 벌레처럼 기는 자, 싸움을 즐기다 파괴된 ‘시체’를 지키며 안개 귀신이 된 자, 팔다리가 퇴화해 거대한 뱀으로 변신한 자, 심지어는 흡혈귀라더니 물에서 살고 물 밖에 나오면 죽는 수생생물로 탈바꿈을 한 자마저 있었습니다. 높은 신분에, 제국 안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상급 기사조차, 그러니까 같이 변신을 추구하던 라지엘의 형제마저 추하게 일그러진 괴물로 영락한 몰골에, 라지엘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충격을 받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만나는 형제마다 따져 묻는 라지엘에게, 케인의 기사들은 자신들도 진실을 알고 싶었다며, 각자가 생각하는 제 나름의 대답을 돌려줍니다. 맨 처음 만난 형제는 변이가 곧 아무도 원하지 않은 잘못된 시대의 필연일 것이라고 했지만, 라지엘은 그의 말을 웃어넘깁니다. 그가 막내뻘 되는, 가장 허약한 형제였기 때문이지요. 그가 겪은 변이는 그냥 케인의 흡혈귀 능력을 막내의 육체가 버티지 못해서 그런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귀신이 된 형제는 강해지기 위해 그런 것이었다며, 지금은 육체가 없는 자신이 케인보다도 강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라지엘은 그의 영혼을 ‘잡아먹으며’ 누가 틀렸는지 증명했습니다. 물고기 흡혈귀는 제국을 너 같은 배신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우리가 선택받았다고 했고, 라지엘은 격분하며 누가 누구를 배신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겨우 한 명’만을 막으려고 이 많은 제국이 남김없이 ‘선택을 받았고’ ‘내 후예가 멸족을 당했느냐’는 질문에, 물고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뱀 흡혈귀가 라지엘에게 질문을 되돌렸을 때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것이 아버지, 케인의 의도가 맞기는 할까?” 라지엘도 그의 되물음에 대답하진 못했습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의 책임을 져야 할 존재로서, 케인을 용서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도륙했습니다. 근육몬 벌레는 맷돌에 넣고 갈아버렸고, 귀신은 ‘영혼 강탈자’로서 잡아먹었고, 물고기는 수장시켰고, 뱀은 폭발로 영영 보내버렸습니다. 괴물의 삶에서 해방되어 기뻐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쿨하게 패배하여 무로 성불하는 자가 있었고, 제국의 적이 된 라지엘에게 끝까지 저항한 충성스러운 형제와, 역설적으로 이제는 제국의 죽지 않은 흡혈귀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된(!)’ 라지엘에게 죽는 끝까지 질투하다(!!) 간 천하의 미친 변태도 있었습니다. 라지엘은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석연찮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맞서 싸운 여러 케인의 기사 중에, 마지막 한 명이 더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케인의 기사 중에서는 두 번째로 강한, 라지엘과도 평소에 막역한 사이여서 바깥에서는 ‘케인의 팔’로 알려진 자, ‘투렐’이라는 흡혈귀지요. 정작 가장 강력한 집행자를 보이지 않고 숨긴 것에 의문을 느끼며, 라지엘은 케인의 옥좌로 향해 나아갔습니다. 노스고스의 무너진 기둥 폐허, 구 시대의 성소, 케인의 옥좌... 그곳에 라지엘이 도착했을 때 이미 케인은 오래 전부터 옥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케인은 다가오는 라지엘의 몰골을 보며, 마치 수백 년 전 라지엘이 그랬던 것처럼 툭 한 마디 던졌습니다. “심연이 편안하진 않았군, 라지엘.” 그 한 마디에 간신히 참고 참은 라지엘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라지엘은 케인에게 자신의 자손을 배신한 이유부터, 라지엘의 후예를 손수 멸족시킨 이유까지 하나씩 따져 물었습니다. 케인은 거만하게 으스대며, 상투적인 악당처럼 제국의 모든 것이 자신의 창조물이므로 곧 자신이 파괴할 권리도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덧붙였습니다. “보아라, 이 무너지고 실패한 제국을. 끔찍한 짐승으로 떨어진, 부패한 자들이 노스고스 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이제, 제국은 쓸모가 없다. 옥좌도 마찬가지고, 너 또한 그랬다.” 어이가 없어진 라지엘이 역시 “신도 아닌 놈이, 무슨 권리로 감히 그러느냐? 너도 인간이었으면서, 이제는 남은 양심마저 없느냐?” 같은 케케묵은 정론까지 꺼내 들며 케인을 비난하자, 케인은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보란 듯이 격노하여 일갈합니다. “네가 감히 양심을 논하느냐? 내가 2천 년 전 흡혈귀로 변하고 나서부터, 무엇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는 있었느냐? 너는 아직 그럴 자격이 없다.” 고함에 이어 싸늘한 비판을 마친 케인이 어깨 뒤로 손을 가져갔을 때, 라지엘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분노한 케인이 그의 칼, 소울 리버를 손에 쥐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흡혈귀라 한들, 이제 그는 죽은 셈이다.” 케인의 흉악함은 전설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막상 손에 든 칼은 쓰지도 않은 채, 안개 변신과 마법 화살만을 쓰는 케인에게조차 라지엘은 겨우 주먹질 몇 번을 날려 보고는 그대로 얻어터졌습니다. 철저하게 농락당해 탈진한 채 무릎 꿇은 라지엘의 머리 위로, 케인은 자신의 힘과 이름을 대변하는 소울 리버를 내려찍었고 그 결과, [소울 리버가 산산조각났습니다.] 두 번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라지엘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멍해졌고, 케인은 선언했습니다. “드디어 칼이 부러졌다. 갇혔던 자가 풀려나고, 우리도 본래의 운명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는 껄껄거리며 안개로 변신해 모습을 감추고,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케인의 목소리와 사라지기 직전에 ‘득의에 찬 만족’을 얼굴에 비쳤다는 사실에, 라지엘은 복수에 눈이 멀어 앞뒤 없이 덤빈 탓에 오히려 자기가 케인의 – 무엇인지도 모르는 – 끔찍한 계획을 도와준 꼴이 됐다는 결론만은 어렵잖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사라진 케인이 남긴 영혼 흔적을 찾으러 – 그리고 부상당한 몸을 재구성하기 위해 – 영계로 돌아온 라지엘의 눈에, 부서졌을 소울 리버의 형상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라지엘이 소울 리버에 손을 댄 순간, 칼에 깃들었던 에너지가 라지엘의 몸, 그러니까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소울 리버의 영체를 소환해 무기로 쓸 수 있게 된 라지엘의 진화를 보며, 공간 너머에서 지켜보던 고대 신 또한 평가를 내립니다. 마귀 씐 칼 소울 리버(Soul Reaver)와 영혼 사냥꾼(reaver of soul)이 이제 하나의 존재가 되었으니, 그 앞을 막아설 존재는 없을 거라고 말이죠. 의도치 않게 오히려 강해져버린 라지엘의 앞에, 영계의 옥좌 뒤에서 한 인간의 유령이 나타납니다. 생전 처음 보는, 더구나 형상이 온전한 인간의 유령에 라지엘이 거부감을 느끼며 경계하자, 유령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노스고스의 기둥이 아직 무너지기 전, 마지막 균형의 수호자였던 아리엘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유령은, 케인이 세계를 타락시킨 후 제국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안 안식에 들지도 못한 채 기둥을 떠돌며 세계의 몰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라지엘에게 협력을 약속합니다. 케인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한 라지엘은 아리엘의 조언에도 힘입어 빠르게 도망한 배신자의 뒤를 쫓아갑니다. 제국의 남은 전력이 라지엘의 앞을 막으려 했지만, 원래도 상대가 되지 않은 적들 입장에서 케인의 무기까지 흡수한, 의미 그대로 ‘소울 리버’가 된 복수귀를 막아세운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추격을 계속하던 라지엘은 어느덧 제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옥좌와는 또 다른 장소의 알려지지 않은 폐허로 들어갑니다. 라지엘의 조언자들은 이곳이 옛날 인간이 번영했던 곳이며, 세계가 타락하기 전에는 작은 왕국이 있었고, 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용기 있는 인간들이 모여 흡혈귀와 싸우며 기사단을 조직한 장소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라판,] 과거 성기사 말렉이라는 용사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던 곳에서, 잊혀진 인간의 폐허를 헤집으며, 라지엘은 점점 자신이 알지 못했던 이질적인 옛 기술을 쓰는 인간의 유산과, 가축이라고만 여겼던 인간의 원혼이 가진 저력에 고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가장 이상한 것과 마주칩니다. 친구 투렐을 만나진 못했지만, 대신 그 투렐의 후예들을 사라판의 폐허 안과 밖에서 만난 것이지요. 그들의 말로는 정말로 끔찍했습니다. 가장 추악한 몰골에, 가장 비대해진, 혹은 위험해진 능력에, 최소한의 이지조차 남지 못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자기들끼리도 잡아먹을 정도의 처참한 흉물로 전락한 것이었습니다. 아리엘은 강한 존재일수록, 타락의 대가 역시 끔찍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더불어 지금까지는 가장 추악한 폭군 케인이 제국을 억압했기에 가장 역겨운 괴물들 역시 음산한 폐허에 가둬질 수 있었던 것뿐이라고 했지요. 케인이 모습을 감춘 지금, 폐허의 ‘괴물’들이 밖으로 나가면 남아 있는 그나마 한 줌의 어린 흡혈귀, 그리고 변이하지 ‘못한’ 인간들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습니다. 라지엘은 이를 악물고 인간의 원혼 사이에 섞인, 흡혈귀가 타락하여 만들어진 최악의 괴물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자타 공인으로 제국의 2인자임을 내세웠던 바로 자신의 후예 또한 만약에 타락을 피하지 못했더라면, 도대체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의문을 품으며 몸서리칩니다.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책임을 물어야 할 존재인 케인을 심판하고 복수하기 위해, 라지엘은 걸음을 더욱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케인의 흔적이 점점 가까워질 무렵, 폐허의 괴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가 라지엘을 막아섭니다. 폐허가 번영했던 시대의 소산이라고 하는 유적의 수문장은, 시간 속에서도 잊혀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지킨다고 하는 바위 거인이었습니다. 하다하다 이제는 살덩어리도 아닌 돌덩어리와 칼질을 주고받은 끝에 라지엘은 바위 거인을 쓰러뜨리고, 거인이 지키던 것들을 목격하며 마지막 충격에 빠집니다. 노스고스의 다른 성소로 가는 비밀 입구와 더불어, 인간이 이룩한 가장 소박한 것부터, 가장 위대한 것까지,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유산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켠 봉인된 석실에, 사라판 기사단에 헌신했던 기사와 사제들의 유해와 유물이 그곳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기억이 유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치된 석관과 그 주인을 기린 초상화 사이에서, 라지엘은 잘 아는 형상 역시 발견합니다. 모를 수가 없지요. 흡혈귀 때보다는 소박한 얼굴이지만, 다름 아닌 자기 얼굴이었으니까요. 형제 흡혈귀들의 얼굴도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상화 아래 석관은,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어이를 잃은 라지엘에게 고대 신이 진실을 확인시킵니다. 케인이, 사라판의 가장 헌신적인 사제들을 흡혈귀로 일으켜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의 제국을 이끌게 했다고요. 눈이 뒤집힌 라지엘이 케인을 찾아냈을 때, 케인은 바로 사라판 유적에서 이어진, 비밀스러운 기계 장치로 가득한 방에 있었습니다. 다짜고짜 자기 탄생의 진실을 들이밀며 따지는 라지엘에게, 케인은 다시 한 번 상투적인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친구를 가까이, 적을 더 가까이 두라던 말이 있지 않은가?” 속이 뒤집힌 라지엘이 말문이 막힌 사이, 케인은 두 사람이 선 장소의 내력을 늘어놓고 설명했습니다. 케인은 이곳이 시간을 지배하여, 원하는 시간으로 갈 수 있게 하는 역사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옛날, 바로 이 방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케인이 말하는 그 중대하다는 임무가 정확히 무엇인지 라지엘은 듣지 못했지만, 케인은 임무보다는 그 교훈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꼭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정작 역사의 결말이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이 케인이 받은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앞뒤 사건에 대한 지식이 얕았고, 왜 그렇게 됐는지를 짐작하고 배려할 수 있는 인과 이해와 배려심이 없었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케인이 이 숨겨진 장소에 대한 지배력을 원래 주인으로부터 빼앗았을 때, 케인은 방의 힘을 마구잡이로 쓰지 않고, 반드시 적절한 순간에만 쓰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케인은 노스고스의 남겨진 전승과 예언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고, 파멸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더 나은 것으로 고쳐 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며... 손으로는 방에 널린 기계 장치들을 이리저리 조작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장치를 움직이는 걸 봐서 케인이 말하는 ‘적절한 순간’이 지금을 의미한다는 것만은 분명했기에, 라지엘은 이번에야말로 케인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마검의 영체까지 꺼내 들며 케인을 몰아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막상 돌아온 건 칼도 없는 맨손의 케인에게 다시 한번 죽어라 얻어터지기만 한다는 결말이었습니다. 공격은 빗나가고, 칼날은 흩어지고, 겨우 돌려차기 한 방에 어설픈 그래플링이라도 해봤더니 호탄핵으로 반격당해 벽이 박살날 만큼 처박히고 꼼짝도 못 하게 된 라지엘을 흘겨보며, 케인은 비웃었습니다. “넌 날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네놈에게 새로운 운명을 주도록 하마.” 케인이 라지엘에게 마지막 말을 남길 때, 역사의 방에는 이미 마법으로 만들어진 빛의 통로가 열려 있었고, 케인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라지엘 역시 눈에서 독기를 불태우며, 손에는 마검 소울 리버의 영체를 피워든 채 빛의 통로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처음 겪는, 이번에는 자신만 빼고 모든 것이 부서지는 듯한 이질감에 라지엘이 정신을 거의 잃을 때쯤, 발이 땅에 닿으며 새롭고 낯선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정갈한 건물 내부, 그리고 조용히 불타는 등불 아래 라지엘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로의 빛무리가 사라진 목적지에, 케인은 어느 새인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혼란에 빠져 멍하게 선 라지엘의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습니다. “라지엘.” 놀란 라지엘이 돌아섰을 때, 한 낯선 사람이, 인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드를 썼지만 대머리임을 알 수 있는 행색이었고, 나이가 들어 눈빛이 흐렸지만 내면의 심지가 굳은 사람 특유의 흔들림 없는 눈초리를 하고 있었으며, 입에는 아주 작지만 온화한 미소를 띄운, 인자한 인상의 인간 할아버지였습니다. “구원자이면서, 파괴자.” 노인이 말을 이었습니다. “졸개였지만 구세주가 될 이여, 환영하오. 시간을 돌아온 영혼이여...” 라지엘은 노인의 말을 잠자코 들으며, 과거에 분명 들었던 전승의 한 구절을 가까스로 떠올렸습니다. [“환영하오, 그대의 진정한 운명에 오신 것을.”] 모비어스, 시간의 관개유수(Moebius, the Time Streamer)라고도 불리는 이였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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