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6/14 14:08:46
Name   이젠늙었어
Subject   연장자 공포증
저는 군대를 못갔습니다.

사지는 멀쩡합니다만, 그 당시엔 지원해도 갈 수 없는 신분이였습니다. 그래서 군대가야만 알 수 있는 위아래사람 다루는 지식도 없었고 군대가야만 될 수 있다는 사람도 되지 못한채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이전에 중소 소프트웨어 개발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비어있는 PC에서 4학년 2학기 그래픽스 과목 리포트용 3차원 그래픽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는데 그걸 이사님이 보시곤 이것저것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곤 정부 모처에 프로젝트가 있는데 막판에 도망간 대리 하나를 대신하여 땜빵을 하라는 것입니다. FORTRAN으로 모 수치해석 해서 그래픽으로 상황실 화면에 출력하는 일이었습니다. 아, 이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죠... 여튼 입사 동기들이 교육을 받는 동안 혼자 과천 정부청사로 약 3개월간 출퇴근 했다는 겁니다.

땜빵일이 끝나고서 회사로 돌아오니 자연스레 왕따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자 동기들은 군 제대후 저보다 연상이고 여 동기들과 같이 RMCOBOL이라는 걸로 일을 돕고 있었는데 저는 프로젝트 하느라 아직 못배웠거든요. 동기들과도 서먹하고 선배들과도 얼굴을 못트고 항상 불편했는데 프로젝트 땜빵을 잘했는지 어떤지 이사님과 사장님이 저를 이뻐해 주시니 전사적으로 좀 미운털이 박혔던듯 합니다.

직급이 없는 회사 선배에게 '아무개씨' 하고 불렀다가 회사 건물 뒤로 불려가서 혼났습니다. 또 한번은 사장님이 회사 회식에서 양주를 사주셨는데 제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이야, 양주로 취하는게 소원이었는데, 신난다...' 했습니다. 다음날 숙취속에서 출근하자마자 또다시 건물 뒤로 불려가서 혼났어요. 어디 감히 사장님 및 여러 어르신 앞에서 주접이냐... 하면서요. 이때부터 저는 연장자 공포가 좀 생겼습니다. 사회나와서 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분들이 겁이 났던 거죠. 얼마 후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니 연장자 스트레스가 없어져서 정말 날아갈듯이 가벼워지더군요.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엔 저도 관록이 붙어서 직장선배들과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 대충 해쳐나갈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모 대기업 연구서에서 일할 때, 이른 나이에 승진을 하고 그룹차원의 내부 프로젝트의 PM을 맡게 되었습니다. 외주 SW 및 HW를 검토하고 내부 개발 범위를 정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바쁘게 움직일때였죠. 어느날 비교 검토중의 한 HW 공급사의 사장님과 연구소장님이 불시에 방문하셨습니다. 두 분 다 비슷한 연배셨는데 귀밑머리가 하얀 중년분들이셨죠. 식사자리에서 그 두 분이 제게 극존칭을 하며 자사의 제품을 선택해 달라며 청탁을 해오는데 이건 새로운 종류의 공포였습니다. 그간 제가 모셔야할 연장자를 상대하는건 어느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분들은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이상한 방식으로 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오히려 더 무섭더군요. 끈질긴 연장자 포비아였습니다.

서른 초반에 저도 조그마한 솔루션 회사를 하나 차렸습니다. 개발한 제품을 가지고 여러 대기업이나 인터넷 기업, 언론사 등에 영업을 하러 다니는게 제 주요한 업무가 되었죠. 문제는 여러 해가 지나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서 제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점점 예전에 저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사장님과 연구소장님의 얼굴이 제 얼굴에 겹쳐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저는 연장자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겁이 덜컥 났죠. 예전 그분들처럼 나도 지금 현재 만나고 돌아다니는 젊은 분들을 무섭게 하고 있는건 아닐까?

귀밑머리가 밀가루를 뒤집어 쓰기 시작할 때부터 염색을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선배들, 거래처들을 거쳐서 이젠 제 자신이 연장자 포비아의 대상입니다. 늙어간다는건 서글프네요.

그래도 대머리는 아니니까 다행입니다. 휴~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토비 15/06/19 35596 1
    16002 생활체육AI 도움받아 운동 프로그램 짜기 오르카 26/02/06 167 0
    16000 일상/생각우리 부부는 오래살거에요 ㅋㅋ 1 큐리스 26/02/04 783 7
    15999 여행갑자기 써보는 벳부 여행 후기 17 쉬군 26/02/03 666 9
    15998 일상/생각아파트와 빌라에서 아이 키우기 17 하얀 26/02/03 1013 22
    15997 일상/생각소유의 종말: 구독 경제와 경험의 휘발성 2 사슴도치 26/02/02 758 16
    15996 오프모임참가하면 남친여친이 생겨 버리는 2월 7일 토요일 14시 사당 또는 이수 커피 모임 74 트린 26/02/02 1594 4
    15995 일상/생각팀장으로 보낸 첫달에 대한 소고 6 kaestro 26/02/01 738 6
    15994 일상/생각와이프란 무엇일까? 2 큐리스 26/01/31 707 10
    15993 영화영화 비평이란 무엇인가 - 랑시에르, 들뢰즈, 아도르노 3 줄리 26/01/31 486 5
    15992 IT/컴퓨터[리뷰] 코드를 읽지 않는 개발 시대의 서막: Moltbot(Clawdbot) 사용기 24 nm막장 26/01/31 833 1
    15991 일상/생각결혼준비부터 신혼여행까지 (3/청첩장 및 본식 전, 신혼여행) 5 danielbard 26/01/30 471 4
    15990 정치중국몽, 셰셰, 코스피, 그리고 슈카 15 meson 26/01/29 1221 7
    15989 IT/컴퓨터램 헤는 밤. 28 joel 26/01/29 900 27
    15988 문화/예술[사진]의 생명력, ‘안정’을 넘어 ‘긴장’으로 8 사슴도치 26/01/28 492 22
    15987 IT/컴퓨터문법 클리닉 만들었습니다. 7 큐리스 26/01/27 638 16
    15986 게임엔드필드 간단 감상 2 당근매니아 26/01/26 617 0
    15983 스포츠2026년 월드컵 우승국//대한민국 예상 순위(라운드) 맞추기 관련 글 6 Mandarin 26/01/26 408 0
    15982 오프모임2월 14일 신년회+설맞이 낮술모임 (마감 + 추가모집 있나?없나?) 18 Groot 26/01/26 781 3
    15981 정치이재명에게 실망(?)했습니다. 8 닭장군 26/01/25 1090 0
    15980 IT/컴퓨터타롯 감성의 스피킹 연습사이트를 만들었어요 ㅎㅎ 4 큐리스 26/01/25 499 0
    15979 정치민주당-조국당 합당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14 Picard 26/01/23 951 0
    15978 오프모임1/23 (금) 용산 또는 서울역 저녁 모임 8 kaestro 26/01/23 749 1
    15977 스포츠[MLB] 코디 벨린저 5년 162.5M 양키스행 김치찌개 26/01/22 383 0
    15976 정치한덕수 4천자 양형 사유 AI 시각화 11 명동의밤 26/01/21 1240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