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8/12 08:12:31
Name   이젠늙었어
File #1   traveled.jpg (308.9 KB), Download : 7
Subject   이 모든 기억이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제가 사춘기를 좀 심하게 넘겼습니다. 죽고 싶어서 수면제도 모아서 먹어보고 그랬었어요. 그런데 중년의 위기를 또 이렇게 심하게 넘기네요.

재작년에 개인적으로 좀 시련도 있었고 건강상의 문제도 생겨서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는게 낳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여튼 우울증도 좀 오고 갑자기 사는게 너무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뒤돌아보니 제 삶이 그렇게 썩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연애도 많이 해봤고, 부자는 아니었지만 돈 없어서 먹고 싶은거 못먹은 것 같지도 않고, 설렁설렁 일했는데 조직에서 인정도 받아 봤고, 세상 여기저기 구경도 해봤고, 결정적으로 꿈속에서나 만날 것 같은 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고, 그리고 아직도 아내를 보면 제 심장이 콩닥콩닥 하고, 뭐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당장 모든걸 놔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유혹이 오더군요.

더 이상 아무 곳에도 열정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고 있는 것도 재미가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걸 정리하고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냥 세상 구경이나 실컷 하다가 나중엔 닥쳐오는 상황에 따라 댄스나 추며 남은 삶을 맞이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언제나 제 치어리더인 아내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같이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참 대책 없는 커플입니다.

먼저 아시아 여행을 했구요, 최근엔 캐나다와 미국 중서부를 돌았습니다.

산길을 달리고 들길을 날리고 사막을 달렸습니다. 산 위를 끙끙거리며 올라갔고 무서운 내리막을 저속기어로 엔진의 굉음 속에 내려왔고 꼬불꼬불 고갯길을 곡예 하듯 운전했고 끝없는 지평선 속에 쭉 뻗은 도로에서 꾸벅거리며 달렸습니다. 강렬한 햇살을 뚫고 달렸고 폭풍우 속에 쩔쩔매며 달렸고 지평선 위에 우뚝 솟은 무서운 구름 속으로 돌진했고 산불로 자욱한 연기 속을 소방관의 지시속에 가다서다 하기도 했습니다. 길에서 많은 마을을 스쳐 지났고 경찰한테 붙잡혔고 검문을 당했고 키를 차 안에 두고 내려서 쩔쩔매기도 했고요.

끝없는 백사장에 서서 태평양을 바라봤고 아름다운 정원을 봤고 가슴이 시리도록 파란 호수를 봤고 엄청난 계곡들을 봤고 끝 간데 없이 동굴 속을 들어가 봤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간헐천들을 봤고 수 천 년간 살아있는 거대한 나무를 봤고 빽빽한 우림 속을 거닐었습니다. 열풍 속의 황무지를 봤고 바람에 휘날리는 초원을 봤고 회오리 바람을 옆에 두고 나란히 달렸고 인적 없는 계곡을 달렸고 모래로만 이뤄진 산에 올랐습니다.

바다표범과 사슴과 산 염소와 프레어리 도그와 마못과 큰 뿔 산양과 엘크와 무스를 봤고 버펄로떼가 길을 가로막기도 했고 산속에서 무서운 곰과 마주쳐 눈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행은 참 좋습니다. 아름다운 지구 표면을 거닐면서 무미건조했던 삶이 갑자기 재미있어졌습니다. 캠핑카를 몰며 여행하는 늙은 백인 부부들을 보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계획이 서기 시작했습니다.

- 앞으로 10년간 열심히 일해 돈 모아서 근사한 캠핑카를 사서 여행을 다니며 이 근사한 세상을 좀 더 구경하기

타고 다니던 15년된 고물차가 굉음을 내기 시작해서 일단 집으로 돌아왔는데요, 이제 또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이번에는 대서양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상 제가 경험한 남성 갱년기 증상 극복 사례를 마칩니다.


사족 : 영화 블레이드 러너중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a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난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봐 왔어.
오리온의 어깨에서 불타오르는 강습함들.
탄호이저 기지의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C-beam들.
그 모든 기억이 곧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아아 소름돋도록 멋지고 슬퍼...



8
  • 질투와 부러움을 담아서 추천.


Beer Inside
멋진 말이지요.

원작소설에는 없는....
와 멋있어요
까페레인
용감하시고 멋지세요.
레이드
크.. 멋집니다.
대학교때 세쿼이아 팍에서 만난 한 노부부가 생각나네요.
캠핑카에 미국 지도를 붙이고 다녔는데, 한 주 당 몇달간 머무르며 그 주의 가봐야 할 만한 곳들은 다 다니고 색칠을 한 뒤 다른 주로 옮겨가시곤 하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은 그 캠핑카마저 정리하고 하와이에 가서 여생을 마무리할거라고...

삶이란 결국 살아가느냐, 살아지느냐의 차이인거 같은데, 살아지는 삶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하셨군요.
건강히 지내시고 소원 성취하시길 응원합니다.
와 제가 딱 어제 블레이드 러너를 다시 봤는데 ㄷㄷ
April_fool
제목의 저 대사가 사실은 애드립이었다죠?
모레 옐로우스톤으로 떠날 예정이라서 반갑네요. RV라고 부르는 캠핑카를 보면 부럽기 그지 없습니다.
이젠늙었어
개인적으론 가이저와 거대한 호수가 어우러진 웨스트썸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자전거 없으시면 론 스타 가이저는 스킵하세요. 접근성도 나쁘고 주기도 세 시간이라서... 저흰 가다가 무스와 조우해서 나쁘진 않았씁니다만...
캐년빌리지 전후로 드라이브는 꼭 하세요. 가끔 버펄로떼가 진로를 방해하지만 경치가 정말 끝내줘요. 저절로 막 신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쌍안경이나 좋은 망원렌즈 있으시면 꼭 챙기세요. 사람들 가끔 길가에 차세워놓고 강건너 무스니 늑대니 구경하고 있는데 맨눈으로 잘 안보이니 서러웠습니다.
좋은 추천 감사드립니다. 일정을 여유있게 잡아서 저도 기대가 되네요. old faithful inn을 못잡긴 했지만 뭐 그러려니 합니다. 쌍안경은 알래스카 갔을때도 아쉬웠는데 진작 하나 살 걸 그랬네요.
김덕배
멋지시네요. 곰과 아이컨택까지...
그리고 Nothing lasts forever, even cold november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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