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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5/07/27 04:32:50 |
Name | 눈부심 |
Subject | 보수, 진보, 도덕, 공리주의 |
책이나 기사를 읽으면 지루하고 귀찮은데 누가 또렷하게 설명해주면 귀에 쏙쏙 들어와요. 아래 강의를 정말 재미있게 들었어요. 도덕은 법리적 해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인간의 직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에 따라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도덕을 논리적으로 정의하려고 노력하는 분야가 철학이에요. 보통 도덕적 가치관은 크게 어떤 사람의 성향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요. 이제 강의이야기를 해 봅시다. 구글 본사에서 강의하는 주인공은 하버드 대학 심리학교수인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입니다. 그는 'Moral Tribes' 라는 저서의 작가이기도 한데요. 자신의 책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간략버전의 책 하나 뚝딱 읽게 되는.. 크킁 미국의 공화당진영 대통령후보로 자주 거론되었던 론 폴이 CNN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어요. 당시 토론주제는 미국의 국민의료보험제도인 오바마케어였어요. 한 건강한 젊은이가 있는데 자신은 건강하니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겠다며 보험을 거부했어요. 그러다 사고가 생겨 반 년동안 코마상태에 빠집니다. 진행자의 질문은 누가 그 젊은이를 돌보아야 하냐였어요. 론 폴은 직답을 회피하고 처음에는 (사보험이든 아니든) 의료보험에 가입했어야 했다라고 대답을 해요. 진행자는 끈기있게 '그래 그래 그건 아는데 보험가입을 안 했어.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젊은이가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졌죠. 순간 보수진영의 론 폴에게는 까다로운 질문이었을 수 있겠죠. 방청석에서는 보수인 듯한 사람이 '죽게 내버려 둬!'라고 외치고 있구요. 폴로선 그 방청객에 동의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대답을 합니다. 그의 대답은 젊은이를 죽게 내버려 두란 것도 아니었고 정부가 보살펴 줘야한다도 아니었어요. 젊은이의 가족이나 친구, 다니는 교회 같은 작은 커뮤니티가 그를 도와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의 대답은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잘 반영해 주는데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미로서는 개인주의적(individualism)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족주의(tribalism)라고나 할까 약갼의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 더 큰 커뮤니티나 정부라는 커다란 개념으로는 발전하지 않구요. 한편, 진보진영의 아이콘인 엘리자베스 워렌이 당시 연설로 열광적인 주목을 받았는데요. 보수는, 개인은 사유재산권을 가지고 있고 정부가 그 권리를 억압, 통제할 수는 없는 거라고 말하지만 엘리자베스 워렌은 이렇게 반박을 합니다. '누군가가 공장을 짓고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면 그 혜택을 마땅히 누려야 하겠지만 그 사람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세금으로 지은 공공도로를 이용해 물류를 운반했고, 그의 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우리 세금으로 교육시킨 인재들이었으며 그의 사업장이 안전한 건 경찰이나 소방서가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간접적인 혜택을 잊어서는 안되며 이는 곧 사회와 우리 다음 세대에 환원해야 할 이유가 된다.' 이 두 가지 예가 보수와 진보를 상당히 적절하게 표현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그린은 말해요. 그린 왈 도덕이란 협력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협력은 이타주의의 문제고요. 이타주의란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인데 내 희생이 타인이 받는 혜택에 비해 미미하다면 우리 모두 약간의 희생을 감당했을 땐 결과적으로 전체가 더 나은 혜택을 누리게 되니까 매우 이롭죠. 협력의 문제를 가장 잘 표현한 논문이 바로 Garret Hardin의 'The Tragedy of the Commons' 그럼 이제 이런 목동들의 커뮤니티 외에 다른 숲에 사는 다른 목동 커뮤니티들에게까지 시야를 넓히고 그 보다 더 큰 집단에까지 눈을 돌리면 협력은 더더욱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각자의 커뮤니티 내에서는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있을 지 모르나 커뮤니티 간에는 상극의 가치관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어떤 커뮤니티는 성차별이 보편적이면서 나름의 협력을 이루고 살 수도 있고 어떤 커뮤니티는 동성애를 금지하면서도 나름의 협력을 이루고 살기도 하구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커뮤니티도 있을 수 있고요.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커뮤니티에선 공공재산은 없을 지라도 서로의 사유재산을 철저히 존중하는 협력정신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날 수 있을 거고요. 종교로도 커뮤니티가 나뉘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 나름의 도덕가치관이나 협력정신을 이루고 살고 있는 커뮤니티들이 한 데 모인다면... 여성이 양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목동은 여성이 양을 소유해선 안된다고 믿는 목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상대방 목동은 여성이 양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마땅하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목동들의 조합이 바로 우리 현대의 모습이기도 한데요. 따라서 현대의 도덕은 단순히 '나'와 '우리' 간의 문제 또는 이기심과 도덕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저들'의 문제입니다. '나의 가치관'과 '우리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과 '저들의 가치관'의 문제인 것이죠. 현대의 문제를 그린씨는 '상식의 비극'이라고 칭하고자 하는데요. 상식은 그 자체로 보편성을 띄지만 그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벗어나면 상식이 아닌 경우가 많아요. 러시아에선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미국 외 다른 몇몇 나라들은 동성결혼을 허용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상식은 미국에선 차별이고 증오범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저들'을 뛰어 넘는 보편타당성을 적용해야 합니다. 도덕적인 판단을 하려면 심사숙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직관적인 판단이 더 도덕적인 경우도 많다는군요. 두 가지를 적절하게 혼용하여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인간의 빠른 직관이 더 도덕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은 실험에 의해 증명이 되었어요.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10불씩 나누어 줍니다. 그 중 자기가 취하고 싶은 만큼 취하고 그룹에 기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기부를 합니다. 기부한 돈은 모두 모아 실험자가 두 배로 불려주어 모든 구성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아무도 기부를 하지 않으면 모두 10불씩 가지는 것이 되지만 모두 전 금액을 기부하면 그 돈이 두 배로 불어나 자신에게 돌아오므로 20불을 거머쥘 수 있어요. 만약 구성원이 다섯 명이고 어떤 사람이 7불을 기부하고 3불만 가진 상태에서 전체 기부금이 10불 이어서 그 두 배인 20불의 배당금을 전체가 골고루 나눴다면 3+5=8불이 되겠죠. 이 선택은 애초에 10불을 손에 다 쥐고 있는 것보다는 적고요. 이 실험에 시간제약을 둡니다. 촉박한 시간 내에서 사람들은 보통 이기적인 선택을 할까요 아니면 기부를 더 많이 할까요? 실험 결과 시간적 압박이 가해졌을 때 사람들은 기부를 더 많이 하더라는군요. 반면에 10초 간 판단할 시간을 주니 이기적인 선택을 더 많이 했다고 합니다. 실험을 여러 번 거쳤는데 결과는 한결 같이 시간적 제약을 가할 때 우리는 보통 '나' 보다는 '우리'를 더 고려하는 사회도덕적 본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명 '공공재 게임'을 여러 나라에서 해 보았어요. 이번 게임은 내용이 조금 다른데 일단 각자 원하는만큼 개인취득을 할 수도 공공기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대신 이 게임을 반복해서 여러번 하는데 개인취득을 했거나 공공기부를 한 사람을 두고 어떤 기준을 정해 자기네들끼리 상 주거나 벌하는 것이 가능했어요. 예를 들면 너는 어느 정도까지 기부를 했으니 1불을 더 받아 가고 너는 기부를 너무 안 했으니 3불을 손해봐야 한다는 규칙같은 것으로요. 그 반대도 가능하고요. 코펜하겐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 공공재 게임을 시켰더니 처음부터 기부를 많이들 해서 그것이 반복되자 결과적으로 모두가 상당한 이익을 챙겨갔습니다. 호주와 중국 같은 경우, 처음엔 적절하게 기부하는 정도에서 기부가 적다 싶으면 서로 벌점을 줌으로써 기부금을 늘려 반복실험결과 결국 코펜하겐 같은 비율높은 기부를 이루어냈다고 하고요. 웃긴 건...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기부를 안 하더랍니다. 그런데 반복실험을 해도 계속 기부를 안 하더랍니다. 아테네사람들은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기부를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액의 기부자들을 비난하는 풍경을 연출했다고 해요. 그래서 게임이 끝난 후 왜 그랬냐고 물어봤대요. 그랬더니 그냥 그 게임이 짜증나고 싫었답니다 하하하하. 이 사람들 다 누구냐. 이런 게임 짜증나게 왜 하냐... 그린씨는 그들에겐 협력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족적인 개념이지 않았나 그런 얘길 해요. 쉽게 말하면 내 가족, 친척의 문제에 한해선 협력이 상식이지만 이방인과 협력을 통해 기부금을 늘이는 일은 생소하고 불편한 일이었던 거예요. (이 부족개념이 우리나라의 학연, 지연 개념과 뭔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코펜하겐은 이방인에 대한 직관적인 신뢰도가 높았고 아테네는 그렇지 않았던 거죠. 도덕을 이야기할 때 직관적인 면뿐 아니라 이성적인 면도 잘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철학자 피터 싱어가 잘 이야기해주고 있어요. 명품으로 잘 차려입은 신사가 연못을 지나가는데 어린 아이가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걸 보았다고 합시다. 비싼 옷과 구두를 망칠까봐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면 비난을 면치 못하겠죠. 한편 유니세프에서 편지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액의 기부를 통해 아이를 기아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새 신발 한 켤레 덜 사면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기부를 않고 새 신발을 한 켤레 더 사 신는다고 해서 이 사람이 도덕적 비난을 면치 못할까요? 보통 이럴 땐 연못에 빠진 아이를 구하지 않는 신사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굳이 내가 기부하지 않아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런 논리대로라면 만약 여러 명의 신사들이 연못에 빠진 아이를 보고도 구하지 않으면 도덕적 비난을 피해갈 수 있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궁색해 집니다. 이런 도덕적 판단의 괴리는 다른 예를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요. 못사는 개발도상국의 근사한 해변휴양지에 관광을 갔는데 마침 태풍이 몰아닥쳐 내 눈앞에서 많은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재앙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할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내 친구이면 조금 다릅니다. 내 친구가 태풍피해상황을 전화로 실시간중계를 해주면 내가 나서서 기부를 해야하냐는 질문에는 사람들은 전자의 상황보다 마땅함을 덜 느낍니다. 이렇듯 지리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소원할수록 협력의 개념도 희박해지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날의 우리는 지리학적, 생물학적 장애물을 고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윤택한 삶을 누립니다(미국 입장에서). 현대(미국)의 넘치는 부는 우리에게 멀리서도 사람들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커다란 기회를 자동으로 부여해 줍니다. 그런데 인간사고의 특징 중 이런 것이 있어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수백, 수천명의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더 크게 다가옵니다. (온라인 상에서 특이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아이는 굶어 죽어가는 수천명의 아프리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자는 호소보다 더욱 센세이셔널하게 다가와서 수만 불의 기부금이 순식간에 모이기도 하듯이요). 이런 Insensitivity to quantity의 특성이 인간의 뇌에서 본능과도 감지된다고 합니다. 동물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되는 특성이라고 해요. 이를테면, 쥐가 먹이를 확보하고 있어 봤자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니니 먹을 것이 많다고 해서 그에 대한 가치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고 '다량'에 무감각해지는 거죠. 쥐에게 다량의 음식에 대한 가치상승이 머릿속에서 진화하지 않았듯이 인간에게도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일에 대한 가치상승이 진화적으로 각인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직관적으로야 그렇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면 도덕적으로 좋은 거예요. 이 때 바로 우리는 직관적인 도덕판단보다는 시간을 할애하여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꾀하는 것이 더 도덕적일 수 있다고 그린씨는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장점이 더 크니 이런 도덕적 판단을 consequentialism(이게 우리말로는 뭔가요..?)이라고도 하고 다른 말로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라고도 합니다. 그린씨는 공리주의야말로 넓은 의미의 도덕문제, 즉 '상식의 비극'을 극복하는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린씨는 utilitarianism이란 용어에 불만이 많군요. 마치 세속주의란 말이 단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의미할 뿐인데 꼭 세속적이란 뜻처럼 들리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요). 그린씨의 주장에 의하면 지구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덕개념은 공리주의가 가장 적절하다고 합니다. 이 공리주의의 창시자는 Jeremy Bentham이에요. 제레미는 동성애권리를 처음으로 주창한 사람이기도 한데요. 당시가 18세기였어요. 동성애는 죽음으로 벌하던 시대였죠. 제레미는 아무리 생각해도 동성애를 차별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생각이 안 났대요. 제레미는 그 효용성을 따져봤을 때 동성애를 차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가 적용한 공리주의에 의하면 우리가 최대 다수의 최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도덕의 실현인데 동성애를 차별하면 동성애자들이 불행한만큼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되거든요. 공리주의에 의하면 나, 내 가족, 내 친척들의 안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똑같은 정도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요. 그럼 그 행복은 어떻게 측정이 되느냐. 결과적으로 개인의 경험이 질적으로 행복하면 되는 것이라고 벤담은 말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궁극적인 답에 도달할 때까지 질문을 던지면 된대요. 왜 직장에 가느냐 -> 직장이 좋다 -> 왜 좋냐 -> 일이 재밌고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좋다 -> 돈이 왜 좋냐 -> 살 곳이 필요하고..-> 왜 살 곳이 필요하냐 -> 집 없으면 겨울에 춥고.. -> 추운게 어때서 -> 추우면 불행해 -> 불행한 게 어때서? -> 이렇게 할말이 없어질 때까지 질문을 하다보면 결국 다 '그래서 내가 좋더라'거든요. 그런 경험이 좋더라란 의미죠. 벤담은 질적으로 좋은 경험을 최대한으로 실현시키는 것 또는 최대다수의 행복이 도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구요. 벤담이 이런 논리전개를 따르다 보니 동성애자라고 해서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더란 거죠. 벤담의 철학을 계승한 사람이 존 스튜어트 밀이고 이런 공리주의자들이 노예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언론의 자유, 자유주의 시장을 주장하기도 했어요. 이런 사고는 모두 직관적 도덕이 아닌 slow thinking에 의한 도덕판단에 속합니다. 그린씨는 이 공리주의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반박이 트롤리 문제예요. 트롤리트랙에 다섯명이 묶여 있고 다리 위에 뚱뚱한 남자가 있어서 그 남자를 아래로 밀어버리면 기차가 다섯명을 치기 전에 멈출 것이라고 해서 뚱뚱한 남자를 밀어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가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면 공리주의가 마냥 답이 될 순 없어요. 그에 대한 그린씨의 반응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는 자체는 우리가 도덕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은 왜 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까지가 제가 들은 내용입니다. 저의 협소한 인터넷 경험에 의하면 어떤 서구인텔리들은 공리주의를 최고의 도덕철학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리주의는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못산다고 무조건 퍼주는 건 지양해요. 실효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즉 단지 give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give well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give하는 것의 결과가 형편없으면 제 아무리 불행에 처한 이들이라도 give를 고려하는 데 더 뜸을 들인다고나 할까요. 저도 공리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더 공부해봐야 알 것 같아요. 서구사상이 그러니 우리도 그리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에요. 그네들의 어떤 담론에서 동양을 상대로 서구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목격하기도 해서 불편하기도 했던지라. 이 동영상은 듣고 배운 점이 많았어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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