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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4/21 22:11:21
Name   멍청똑똑이
Subject   하늘색과 진청색 사이의 일요일

얼마 남지 않은 자격증 공부를 하며 주말의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거실에서 익숙한 음악소리가 들렸다. 중학교 졸업할 때 쯤 처음 들었던 J-POP이었다. 궁금해서 방을 나서니 동생이 옛날 애니메이션의 오프닝을 부르는 유투브를 보고 있었다. 냉수를 두어모금 꿀꺽 마시며, 새삼스레 그 어린 시절이 무척 가깝게 느껴졌다.

컵을 수돗물로 씻으며, 물줄기가 컵 안의 여기저기로 방울방울 튕겨나가다 이내 넘쳐 손을 적신다. 적당히 흔들어 물기를 털어내자 싱크대 여기저기에 물방울이 맺힌다. 스테인레스의 미끄러운 벽을 타고 모인 작은 물방울들이 서서히 배수구로 흘러 내려간다. 오래 전 들었던 J-POP의 음악은 끝나고, 익숙한 리그오브레전드의 배경음으로 바뀐다. 찰나의 시간에 주마등같은 추억 몇 가지가 단편처럼 흘러간다. 어쩐지 기분이 휘청이는 탓에, 바람을 쐴 요랑으로 아파트 복도에 나섰다.


난간 바깥으로는 벌써 꽃은 다 지고, 따사로운 햇볕이 푸른 잎사귀 위로 떨어진다. 아직 채 뜨거워 지려면 멀었을 오후 두 시의 봄 날. 하늘은 가을처럼 높았고, 녹색으로 번져가는 길가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걷는다. 봄의 끝자락을 밟고, 여름의 소매를 손 끝으로 툭, 건드는 듯한 바람이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흔든다. 피지도 않는 담배 한 개피를 물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대라도 물까. 갑자기 목구멍에서 손이 튀어나올 것 처럼 차가운 커피 한 잔이 당겼다. 추례한 반바지에 슬리퍼를 찍찍대었지만, 집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에서도 시원한 커피를 살 수 있다는 것은 무척 편리한 일이었다.


손이 시릴만큼 차가운 얼음컵에 아메리카노를 부어서 빨대를 입에 문다. 쓴 맛에 꼬릿한 향을 남기는 커피가 꿀꺽, 하고 한 모금 들어가자 비로소 타던 속도, 휘청이던 기분도 차분해진다. 꿀떡이며 기지개를 켜듯 하늘을 본다. 나뭇잎 사이로 익숙한 색이 번져나간다. 노인처럼 느릿한 걸음걸이가 보도블럭을 한 발자국씩 줄여나가노라면, 기억은 제 멋대로 어느 날의 익숙한 풍경을 덧칠한다.


하늘색과 진청색 사이를 오가는 하늘, 서늘하게 식은 공기.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사이의 여느 바다색깔의. 시원한 바람으로 땀방울이 식어가는 나무색 거리들. 익히 알려진 공원의 샛길을 돌고, 삐걱이는 나무 다리를 밟고, 시원한 숨결 사이로 시종일관 웃음이 새어나왔던 것 같은.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 찬 어색함은 없고 그저 걷는 것 외엔 아무 특별할 일 없었던 평범한 산책로의 기억이 방울져 미끄러진다. 성질 급한 연두색의 잎사귀가 잔바람에 툭 떨어지는 모양새로 느긋하게 펄럭이며 잊혀진 풍경이 스러져가면,자연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쓰고 꼬릿한 커피를 잔뜩 빨아 한 웅큼 머금는다.


언젠가는 분명 큰 사고 한번 터질것처럼 늘 덜컹이는 오래된 엘레베이터를 타고 집에 돌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방에는 전에 없던 즐거운 것들이 가득이다. 아직 채 조립하지 못한 건담 프라모델과, 커다란 모니터와 최신형 게임기. 새 책장에 잔뜩 꽃아둔 좋아하는 책들. 새 가방. 새 필기구. 그새 녹아 물이 똑똑 떨어지는 아이스 커피를 그들 사이에 적당히 세워두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헤아린다. 어릴때부터 나의 나쁜 마음은, 갖고 싶은걸 늘 제 주제보다 더욱 탐하였고, 없음을 견디지 못했으며, 무척이나 참을성 없었고, 그래서 잃고 사라지는 것들을 견디기 싫어했음을.


쓸데없는 궁상을 더 떨기가 싫어 책을 펼쳤다. 어른이 되면서 내가 가장 빨리 배워야 했던 것은, 원하는 것을 얻고, 꽉 쥐고, 잔뜩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놓고, 포기하며, 잊거나 보내는 것들이 하나의 순리임을 이해하고 한 소끔 불을 끄고 식혀내듯 마음 역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무두질로 때리고 부수고 끓여 쇳물처럼 흐르다 온갖 엉뚱한 것들로 울퉁불퉁해지고, 잔뜩 사이가 벌어진 틈 사이를 맞지 않는 것들로 메꾸려 애쓰는 것 만큼이나 정갈하게 타오르고, 차분히 식어가야 하는 것임을.


부디 관짝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씩이라도 배움에 익숙해 지기를 바라며, 펜을 쥐고 월요일을 기다린다. 지난 어느 날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정신 없을 월요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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