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6/13 21:09:43
Name   치리아
Subject   불운한 재상 자파르
 풀네임은 '자파르 이븐 야흐야 이븐 할리드 알 바르마크'. 우리말로 풀어 쓰자면 '바르마크 가문의 할리드의 아들인 야흐야의 아들 자파르'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바스 왕조' 또는 '압바스 왕조'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젊은 나이에 재상을 지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정식명칭은 '알 킬라파흐 알 아바시야'인데, 앞으로는 그냥 제국이라고 쓰겠습니다.
 바르마크 가문은 제국의 개국공신 '할리드 이븐 바르마크'의 후손입니다. 바르마크 가문은 자파르가 재상이 된 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렸는데, 역사가 이븐 할둔이 서술한 바르마크 가문의 권세 및 행세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1.자파르의 아버지인 '야흐야 이븐 할리드 알 바르마크'는 당대 칼리프에게 '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2.군부와 문부를 가리지 않고, 궁정의 모든 최고관료직을 자파르와 그의 형제들이 차지했습니다.
 3.거의 모든 왕족들이 정계에서 쫓겨났고, 군사령관·서기·집사 등 중요관직은 바르마크 가문 사람만이 맡을 수 있었습니다.
 4.성직자와 무함마드의 친척들에게 선물과 특혜를 주어 호감을 샀습니다.
 5.가난한 명문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포로를 해방하여 민심을 얻었습니다.
 6.찾아온 사람들마다 특권과 선물을 주었고, 많은 식객을 거느렸습니다.
 7.중앙권력 뿐만 아니라 제국 각 지방의 주요도시와 촌락의 권력까지도 장악했습니다.


 중앙권력은 물론이오 지방권력까지 장악했으니, 이쯤되면 안동김씨는 장난이고 중국으로 치면 역성혁명 직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르마크 가문 입장에서 크나큰 불행이 있었으니...
 바르마크 가문의 허수아비 신세던 당대 칼리프가 다름아닌 하룬 알 라시드였던 겁니다.


 하룬 알 라시드는 어릴 적부터 바르마크 가문의 손아귀에서 자라났지만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상황을 보면 왠만한 군주도 좌절할 만한데, 하룬 알 라시드는 말그대로 하루아침에 자파르를 잡아다 처형하고 바르마크 가문을 멸족시켜 버렸습니다. 그 때 자파르의 나이는 36세 또는 37세였습니다.
 조금 신뢰도가 떨어지는 자료에 따르면 이때 처형당한 바르마크 일족만 1200명이었고, 자파르는 십자가형을 당하고 길거리에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자파르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까지도 적발되면 같이 십자가형에 처해서, 사람들이 모두 입을 조심했다고 하지요.


 이 역사적 사실은 천일야화에도 반영되었습니다. 천일야화에서는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재상 자파르가 나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천일야화의 하룬 알 라시드는 인성도 능력도 부족한 캐릭터라, 걸핏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너랑 너의 일가친척을 모두 처형할 것이다!'라며 자파르를 협박합니다. 결국 천일야화 속에서도 자파르와 바르마크 가문은 멸족당하고 맙니다. 저는 알라딘의 '자파'가 천일야화의 '자파르'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성은 영 딴판이지만요.


 한편 자파르와 바르마크 가문의 몰락이 원체 갑작스러워서 여러 풍문이 나돌았는데, 그중에는 상당히 자극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룬 알 라시드에게는 여동생 '알 압바사'가 있었고, 하룬은 자파르와 여동생을 옆에 끼고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여동생을 지나치게 아껴서인지 뭔지, 여동생이 다른 사람과 맺어지는 건 원치 않았습니다. 하룬 알 라시드는 자신이 신뢰하는 자파르와 여동생을 혼인시키되, 동침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여동생은 자파르에게 반해버리고 맙니다. 자파르는 칼리프의 명을 지키려고 했지만, 여동생은 자파르에게 술을 거하게 먹이고... 강간인지 화간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대로 임신해버립니다.

 이걸 알게된 하룬 알 라시드가 길길이 날뛰면서 자파르와 그 일족을 도륙내버렸다.. 는 이야기입니다.
 역사가 이븐 할둔은 이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짓는데, 명문가 아가씨가 그런 일을 할리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뭐 여동생의 순결을 지키려고 결혼시킨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이야기이니 진실일 가능성은 낮겠지요.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334 역사역사학 강연에서 의용대를 자처하는 이들을 만난 이야기 8 Chere 20/02/29 4436 33
    10324 역사1271년 5월, 삼별초 토벌 직전에 벌어졌던 촌극 11 메존일각 20/02/26 4400 8
    10302 역사고조선 멸망 주역들의 후일담 11 치리아 20/02/17 6138 8
    10232 역사오등작제(五等爵制) 논쟁 -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정확하게 모른다 3 Chere 20/01/28 5145 16
    10215 역사궁궐 건축물 위에 <서유기> 등장인물이? 15 메존일각 20/01/23 6565 11
    10162 역사고려장은 일제의 조작일까?(2) 1 하트필드 20/01/07 4845 2
    10153 역사고려장은 일제의 조작일까? 14 하트필드 20/01/07 5855 3
    10150 역사일본군 위안소 지도 다군 20/01/05 5305 12
    10103 역사역사적 유물론과 행위자 연결망 이론(1) - 아 그게 뭐요? 11 호라타래 19/12/22 5101 12
    10028 역사역사 교과서 속 신문들, 어디로 갔을까? 2 치리아 19/11/25 5472 6
    9917 역사시몬 볼리바르의 절망 6 치리아 19/10/29 4556 12
    9846 역사조선시대 향교의 교육적 위상이 서원보다 낮았던 이유? 26 메존일각 19/10/16 5052 18
    9762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하- 8 메존일각 19/10/03 5058 17
    9761 역사국내 최초의 이민자, '하와이 한인'들에 대해 -상- 메존일각 19/10/03 4892 17
    9689 역사실록에서 검색한 추석 관련 세 가지 이야기 5 호타루 19/09/22 3872 5
    9677 역사신안선에서 거북선, 그리고 원균까지. 8 메존일각 19/09/18 4655 15
    9676 역사거북선 기록 간략 정리 21 메존일각 19/09/17 4801 14
    9610 역사외전: 고려 무신정권기 동수국사(史?/事?) 최세보 이야기 메존일각 19/09/01 4065 5
    9605 역사"향복문(嚮福門) 이름을 바꿔라!" 고려 무신정권기의 웃픈 에피소드 메존일각 19/09/01 4443 11
    9575 역사안중근 의사의 동지 우덕순은 밀정확정? 안티파시즘 19/08/23 4533 11
    9574 역사관동대지진 대학살은 일본민간인이 주도했을까? 2 안티파시즘 19/08/23 4643 1
    9488 역사일반인이 이해하는 이순신의 거북선 형태 2 메존일각 19/07/30 5385 9
    9469 역사고려청자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17 메존일각 19/07/24 5869 27
    9313 역사불운한 재상 자파르 5 치리아 19/06/13 5635 7
    9301 역사조병옥 일화로 보는 6.25 사변 초기 혼란상 2 치리아 19/06/11 6379 1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