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6/12 21:12:40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한 달 전 TV 코드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철들고 나서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TV와의 인연은 한 달 전쯤 갑작스럽게 끝을 맞이했습니다. 5월 어느 토요일. 평소와는 달리 TV가 있는 거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윗집에서 전기맷돌을 쓰나 싶어서 잠시 참아보았지만 그 소리는 몇시간이 지나도 끝나질 않았습니다.

결국 도저히 거실에서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저는 TV를 침실로 옮겼습니다. TV 모니터와 거기에 달린 크롬캐스트는 옮길 수 있었지만, 캐이블 코드를 침실까지 연장하는 것은 꽤나 귀찮은 일이어서 그냥 코드를 뽑은 채로 그대로 두었는데, 그게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아무튼 그날부터 몇주간을 죽 공부가 끝나면 침실에서 TV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TV에 달린 USB로 영상파일을 재생하거나 크롬캐스트로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영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더 이상 거실에서는 예의 소음이 들리지 않아 TV를 다시 원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복잡하게 얽힌 선을 풀어서 TV 케이블을 재조립하는게 귀찮았던 저는 그냥 TV코드를 뽑은 채로 두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한 달이 넘게 한 번도 케이블 TV를 보지 않았지만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끔 유튜브로 TV의 실시간 방송을 본 적은 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가끔이었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TV를 보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TV만큼은 훈련소를 제외하면 개인정비 시간에 실컷 봤었는데.

그렇게 생전 처음으로 TV와 이별을 하고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1. 수면시간이 규칙적으로 변했다

좀 의외의 이야기인데, TV를 보지 않으면서 일찍 자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보고싶은 프로그램이 늦은 시간에 할 경우 잠을 참아가면서 보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TV를 보지 않으니 그냥 정해진 수면시간까지 유튜브 영상 등을 보다가 시간이 되면 끄고 들어가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전에 비해 수면시간이 1~2시간 정도 늘어나 훨씬 몸이 건강해진 것을 느낍니다.


2. 의외로 TV를 보지 않아도 컨텐츠를 소비하는데 지장이 없다

몇년 전 처음으로 미국에서 넷플릭스가 유행했을 때 Cord Cutting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아예 TV를 안보고 하루종일 넷플릭스만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좀 과장이고, 실제로 그렇게까지야 하겠느냐고 생각했지만 그 몇년이 지난 지금 제 스스로가 TV 코드를 뽑고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데 놀랐습니다.

기본적으로 TV는 정해진 시간에 TV 방송국이 정한 프로그램을 틀어줍니다. 보는 사람은 채널을 선택할 권리는 있지만, 자기가 원하는 방송을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보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크롬캐스트나 USB를 장착해서 영상을 볼 경우에는 무엇을 언제 볼지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 됩니다.

저처럼 보고 싶은 컨텐츠가 명확히 정해져 있는 사람(예: 심야 애니메이션, 심영물, 강아지 동영상을 보고싶다)의 경우에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TV는 틀었지만 보고싶은 프로는 하나도 없는 상황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 컨텐츠 소비의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사실 이 부분은 TV를 안 보기 전부터 느끼던 부분이긴 한데,

어떤 미디어 컨텐츠를 볼 때, 그속에는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재미없는 부분도 있으며, 때로는 그 자체가 처음 기대와는 달리 별로일 수도 있습니다. TV 방송의 경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것을 끝까지 틀어놓지 않으면 다른 방송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채널을 돌릴순 있겠지만)

그렇지만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시대가 된 이상에는 자기가 원하는 영상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재미가 없으면 바로 끄고,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거기다가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컨텐츠 소비속도를 조절도 가능합니다. 그 결과는 의외로 컨텐츠의 소비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유튜브를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의 영상이 제가 예전에 본 것들입니다. 알고리즘이 새로운 영상을 추천하는 속도가 제가 컨텐츠를 소비하는 속도를 쫓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여서 최근 1~2년간은 과거에 너무나도 많은 작품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괜찮은 작품을 찾아내는 것이 하나의 고민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TV 방영 일본 애니메이션은 1주일에 24분짜리 한 편을 3개월을 1시즌으로 하여 방송합니다. 그렇지만 저처럼 하루에도 몇 편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페이스로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컨텐츠 양은 너무나도 적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저처럼 밥먹고, 공부(일)하는 시간 빼고 유튜브와 애니메이션에 모든 시간을 때려붓는 막장생활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디어의 유통방식이 컨텐츠 소비의 페이스를 바꾸었다는 사실은 분명해보입니다.


4. "이건 어때요?"라는 제안하는 역할을 누가 맡을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서 보는 데 만족하지만, 그럼에도 저에게 있어 한가지 큰 과제는 이전에는 몰랐던 컨텐츠를 저에게 '제안'해주는 기능입니다. 과거 TV는 기본적으로 제안의 매체였습니다. 방송국에서 독단적으로 컨텐츠를 편성하여 소비자들에게 "이건 어때요?" "저건 어때요?"라고 들어미는 구조였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이 컨텐츠를 선택하게 된 이상, 완전히 구도가 바뀌었습니다. 특히 알고리즘을 통해 이전 사용기록을 바탕으로 컨텐츠를 추천하는 유튜브는 사용자로 하여금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것들을 계속 보도록 하는 일종의 버블현상을 일으킵니다.

수학강사 양예지 씨의 사례와 같이 유튜브 알고리즘이 전혀 의외의 추천을 해서 깜짝 스타를 만드는 경우가 있지만, 결국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기존 취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AI의 발전속도는 빠르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알고리즘의 추천만으로도 이전에는 자신이 보지 않았지만, 지금 보면 흥미를 느낄 만한 새로운 컨텐츠를 접할 수 있게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알고리즘이 잘 훈련된 인간 편집자의 컨텐츠 제안기능을 완전히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 알고리즘을 이길 정도로 잘 훈련된 편집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서라도...)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도 최후의 순간까지 종이신문을 절독하는데 주저했던 것이고, TV를 보지 않는 지금도 무언가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만 지나치게 매몰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걱정입니다. 편협해지지 않으려고 저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기웃거려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구글 검색을 해보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습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매체는 강하다

그렇지만 TV로부터 달아났다고 해서 제가 TV 방송국으로부터 이탈한 것은 아닙니다. 가끔 인터넷 오리지널 컨텐츠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제가 TV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영상물을 시청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컨텐츠들은 대부분 TV방송국을 비롯한 컨텐츠 생산자들이 생산한 것들이거나(예: 일본 애니메이션/TV방송국의 유튜브판 숏버전), 그것을 가공한 2차 창작물(예: 심영물)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인방을 즐겨보는 타입이 아니라 그런지 아직까지 인터넷방송 고유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유튜버나 BJ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TV코드는 빼도 소비하는 컨텐츠의 대부분은 기존 생산업자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저에게는 아직까지는 기존 생산자들의 컨텐츠와 인터넷 오리지널 컨텐츠 간에는 퀄리티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속도는 아주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예전에 일본 방송에서 방송국 PD가 넷플릭스, 아마존프라임의 등장에도 별로 긴장하지 않는 이유는 어차피 생산하는 프로그램은 다 비슷한데 납품하는 거래처가 달라질 뿐이라고 큰소리를 치던 것이 기억이 나는데, 아직까지는 그 말이 크게 허풍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6. 결론: 다시는 TV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저는 다시는 TV를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졸업하고 무사히 취직을 한다면 케이블TV 3년약정부터 제일 먼저 취소할 것 같습니다. TV를 보지 않음으로써 방송국 제작의 컨텐츠 일부를 소비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쉽지만, 그것이 TV를 완전히 안 봄으로써 얻는 이득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컨텐츠 제작/편집/유통환경이 과연 탈 TV 시대에 걸맞는 형태인가? 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물음표를 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의 대다수가 저처럼 TV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는 컨텐츠 산업의 형태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 관심이 많은 부분이라 적고 싶은 말이 더 많지만, 다음 기회에 더 적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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