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05/26 20:05:37수정됨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임금피크제 관련 대법원 판례 설명
오늘 사무실에서 온종일 놀다 올 생각이었는데 대법원과 헌재가 죽어라고 일감을 던져줘서 짜증나는 하루였네요.  자문사에서 문의전화는 계속 오고, 제 차례도 아닌데 쓸데없이 판결 분석 역할 맡고....

오전에 판례 나오고 나서 이래저래 기사가 뜨는데, 노동법 쪽 기사들은 각 언론의 정파성에 따라서 내용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별다른 의미 없는 판결인데 과대포장되는 경우도 있고, 꽤 중요한 판결이 조용히 묻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죠.  뭐 이번 판결은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아니라면 아니긴 한데, 왜 그런지 간략히 설명해보겠습니다.


1. 이번 판결이 의미를 가지는 지점

-. 오늘 대법원 판결이 의미있는 지점은, 특정한 기업에서 운영하는 임금피크제가 무효인지, 효력이 인정될 수 있는지 여부를 구분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처음 제시했다는 겁니다.  

-. 원래 고령자고용촉진법은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고, 이 조문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기간제법, 파견근로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파견법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나이를 이유로 차등대우하는 '차별'은 금지되지만, 그 차등대우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법 위반이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정규직 신입직원에게는 연봉 5천을 주고, 별다른 이유 없이 기간제 직원에게 연봉 4천을 준다면 기간제법상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규직 직원은 담당업무와 관계된 산업기사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기간제 직원은 그렇지 않다면, 이건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차등대우이니 부당한 '차별'이 아니게 되는 거죠.

-. 이번에 대법원은 ①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이 타당한지, ② 임금피크제 적용대상자가 입는 불이익이 어느 정도인지, ③ 임금삭감에 대한 반대급부가 주어졌는지, ④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원래 목적대로 사용되었는지를 고려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2. 이번 사건에서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판단된 이유

-. 이번에 문제된 사업장에서는 위 판단기준들이 거의 다 사용자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 애초에 일을 졸속으로 처리한 것인지 대리인이 일을 대충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튼 간에 판결문만 본다면, 회사는 ▲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이유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고, ▲ 개별 직원들이 감수해야 하는 임금하락폭은 최소 월 90만원에서 최대 250만원 수준까지 상당한데, ▲ 이런 임금손실을 보전해줄 수 있는 대책은 제시된 게 없고, ▲ 정작 업무내용이 바뀌거나 업무량이 줄거나 업무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니라서,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에 하나도 맞는 게 없습니다.

-. 거기다가 임금피크제 도입 과정에서 정년이 연장된 것도 아니고, 임금피크제 대상자인 55세 이상 직원들의 실적이 딱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합리성을 인정받기는 어려웠습니다.


3. 우리 회사의 임금피크제도 무효일까

-. 박근혜정부 당시 누가 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간에 임금피크제 시행을 빡세게 밀어부쳤습니다.  그 결과 2013. 5. 22. 개정된 고령자고용촉진법에는 임금피크제가 도입될 경우에는 고용노동부가 금전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그 반대급부로 법정 정년을 60세로 못 박았죠.  개정 이전에는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할 것을 권장하고 있었지만 강제는 아니었거든요.

-. 이번 판결의 대상이 된 회사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건 법 개정 한참 이전인 2009년입니다.  제도를 새로 도입하면서 정년이 60세로 변경된 상황도 아니죠.  판결문만 보았을 때엔 그냥 인건비 절감 이외에는 별다른 도입목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때문에 지금 다니는 회사가 2013년 이후로 정년을 60세로 변경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상황이라면 법적 효력이 고대로 인정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다만 회사들 중에는 매년 전년도 대비 30%씩 임금을 퍽퍽 깎아버리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경우들도 꽤 있었는데, 불이익 수준이 너무 크다면 달리 판단될 여지는 있습니다.  구체적인 판단은 유사한 판례가 더 쌓여봐야 알겠지만요.



17
  • 상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 알기쉽게 설명해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3022 사회<20대 남성 53% "키스는 성관계 동의한 것">이라는 기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 보고서 원문 자료를 바탕으로 43 소요 22/07/25 4058 35
13019 사회“당구 재미없어 억지로 배워…성공해 고국 아이들 도우려 독하게 친다” 10 구밀복검 22/07/24 5710 7
12998 사회장애학 시리즈 (1) - 자폐를 지닌 사람은 자폐를 어떻게 이해하나? 16 소요 22/07/14 4358 24
12958 사회너말고 니오빠 - 누구랑 바람피는 것이 더 화나는가? 21 소요 22/06/28 4089 22
12900 사회오묘한 상황 1 엄마손파이 22/06/08 2514 0
12863 사회연장근로 거부에 대한 업무방해죄 건 헌법재판소 결정 설명 4 당근매니아 22/05/26 3251 14
12861 사회임금피크제 관련 대법원 판례 설명 4 당근매니아 22/05/26 3079 17
12851 사회회식때 루나 코인 사건 얘기하다가... 15 Picard 22/05/24 4235 1
12841 사회근로시간 유연성 토론회 자료 34 dolmusa 22/05/20 3893 1
12828 사회소확횡에 만족합시다. 9 moqq 22/05/17 3594 1
12801 사회미국 의회는 낙태보호법을 만들 수 있을까? 2 코리몬테아스 22/05/10 2557 10
12790 사회윤석열을 맞이하며: 진보 담론의 시대는 끝났다 76 카르스 22/05/08 5939 47
12789 사회신분당선 추가 구간 요금 확정 및 기존 구간 요금 변경 7 Leeka 22/05/07 4811 3
12764 사회영국의 이슬람 트로이 목마 사건, 그리고 이에 대한 재조명 1 열한시육분 22/04/30 3436 12
12757 사회왜 요즘 페미니즘은 성적으로 덜 개방적인가 52 카르스 22/04/28 5584 14
12756 사회OECD 지역웰빙 지수로 본 한국의 지역격차 14 카르스 22/04/27 3568 10
12743 사회군대 월급 200만원에 찬성하는 이유 29 매뉴물있뉴 22/04/20 4277 3
12742 사회현대 청년들에게 연애와 섹스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결정적인 이유 56 카르스 22/04/19 6055 16
12704 사회[뇌내망상]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될 것이다 4 주식못하는옴닉 22/04/08 4236 7
12669 사회국회미래연구원 - 2022 이머징 이슈 15 소요 22/03/24 4318 28
12638 사회요식업과 최저임금 7 파로돈탁스 22/03/17 4055 0
12622 사회홍차넷의 정치적 분열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 - 뉴스게시판 정치글 '좋아요'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67 소요 22/03/13 6487 67
12564 사회좋은 상품이 있어 알려드리려 합니다 13 치킨마요 22/03/02 3599 11
12547 사회러시아와 우크라이나, 3개월의 기록들 3 조기 22/02/25 3026 11
12540 사회조재연 대법관 기자회견과 사람의 기억왜곡 18 집에 가는 제로스 22/02/23 4128 1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