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6/01 19:13:54
Name   뤼야
Subject   [스포 포함]라푼쩰의 진실- 실패한 북유럽의 아마조네스
이 글은 제가 피지알에 가입하고 두 달을 기다리는 동안 한 게시물을 읽고 제 블로그에 남긴 글입니다.
어느 분이 쓰신 것인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일기장처럼 끄적이는 글이라 당연히 반말입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라푼쩰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크크
비판의 글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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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풀이 삼아 가는 게시판에서 글을 하나 읽었다. 어린 자녀덕(?)에 애니메이션 [라푼쩰]을 무려 30번이나 보게 되었다는 한 아비의 글이었다. 라푼쩰이 갖힌 성과 땅에 닿을 긴머리의 버지니티에 대한 썰을 풀었는데 별로 새로울 것은 없는 내용이긴 해도 내가 어린 시절 읽으며 괴기스럽다 느낀 라푼쩰을 떠올려보니, 갑자기 나도 라푼쩰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가 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환상적이라면, 내가 읽은 동화는 설화적이라는 것이 다르다면 다르다. 모든 설화가 그러하듯, 흥미진진하면서도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는데, 너무 화려하게 치장된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재미(또는 공포?)를 한참이나 반감시켰다는 사실.

라푼쩰의 생모는 입덧 때문에 남의 밭에 있는 채소를 탐낸다. 정작 채소를 훔친 것은 생부인데, 생부는 이 모험의 댓가로 라푼쩰이 태어나자마자 밭의 주인인 마녀에게 갓난 아기를 빼앗기게 된다. 원작에서 라푼쩰의 생모와 생부는 금슬이 좋은 부부로 등장하는데, 이 배경은 일부일처제 사회를 은유하는 것이 아닐까? 그에 비해 마녀(그녀는 마녀이므로 당연히 짝이 없다)는 자력갱생(그녀의 채소밭!)의 아마조네스이다. 그녀가 라푼쩰을 원했던 것은 아무리 자력갱생하는 마녀라도 혼자서는 대를 이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마녀는 라푼쩰을 입구도 계단도 없는 성에 가둔다. '입구도 계단도 없는' 성이란 대단히 신비로운 공간인데, 어떤 논리로도 그 성에 오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마녀는 라푼쩰에게 '머리를 늘어뜨려라'라는 노래를 불러 라푼쩰의 긴 머리카락을 타고 성에 오르고, 이 방법을 벤치마킹한 왕자도 같은 방법으로 라푼쩰을 정복(!) 하기에 이른다.

라푼쩰은 딱히 마녀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라푼쩰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지 않으면 마녀도 그녀에게 닿을 도리가 없다. 하여 그녀는 성에 갖혔으나 열린 존재다. 나쁘게 말해 아무 생각이 없다. 관건은 피학적인(자신을 정복하라고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라푼쩰의 머리카락은 성에 갖힌 처녀 라푼쩰의 관능이거니와, 이 관능은 마녀 2세의 운명으로부터 라푼쩰을 구원(또는 타락)한다. 마녀의 성과 라푼쩰의 머리카락은 돌처럼 굳어진 버지니티와 유연한 관능의 대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왕자가 이끌린 것은 그녀, 라푼쩰인가? 아니면 그녀의 머리카락(관능)인가? 이것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성에 왕자가 다녀간 것을 알게된 마녀는 라푼쩰의 머리카락을 잘라 라푼쩰의 행세를 하고 왕자는 여기에 걸려든다. 슬프게도 왕자의 사랑이란 별 것 아니다. 이 '별 것 아닌' 사랑의 진실을 아는 마녀는 왕자를 성에서 가시덤불숲으로 떨어뜨려 눈을 멀게 만든다. "이제 관능에 눈멀어 처녀를 낚는 짓은 못할테지..." 아마 마녀는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관능에 눈 멀어 진짜 눈먼 왕자'는 라푼쩰의 눈물로 구원받는다는 마지막은 'happily ever after'로 끝나기 마련인 옛날옛적 남녀의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다. 그러나 라푼쩰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처럼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구원받는 이야기는 아니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가 짐짓 내숭떠는 성숙한 여자의 환상같은 것이라면, 라푼쩰은 더 설화적인 구조이다. '여자의 관능에 이끌려 여자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남자▶착각일 뿐인 남자의 사랑을 믿고 진짜 사랑에 빠지는 여자▶여자에게 다시 구원받는 (눈먼)남자'의 이야기 구조는 정말 오랫동안 써먹고 써먹은 남녀간 사랑의 구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도 무지막지하게 반복되는 세속적인 구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버지니티를 벗어던진 관능의 라푼쩰은 자기 자신과 왕자 둘을 모두 구원한 셈일지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는 다소 무책임한 결말은 아이들을 위해 남겨두자. 그 뒤에 지지고 볶고 서로를 원수로 삼았던, 서로를 죽이고야 말았던, 결국 딸년들이란 나이 차면 어느새 눈맞아 몹쓸 놈을 끌어들이기 마련이고, 엉성한 아들놈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덤비다가 가시덤불에 떨어져 인생을 종치게 된다.  딸 가진 부모는 딸의 버지니티를 걱정하고, 아들 가진 부모는 관능의 덫에 걸려 잘난 아들이 기도 못펴고 옴쭉달싹 못하게 될까 걱정한다. 그러한 부모의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지만, 아무리 노심초사 해봤자 세상은 그렇게 또 굴러가기 마련이니까.

그나저나, 마녀가 어찌 되었는가는 누구도 궁금해 않는 모양. 하긴 나이든 여자야 원래 이야기 바깥의 존재니까. 불쌍한 북유럽의 아마조네스. 이렇게 될 줄 모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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