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3/17 17:21:47수정됨
Name   celestine
File #1   cimg_movie_0110.jpg (39.9 KB), Download : 26
Subject   유원경몽 遊園驚夢 (화원을 거닐고, 꿈에서 깨다) 上


치엔錢 부인이 타이베이 근교 티엔무天母 의 또우竇 저택에 도착했을 때 저택 진입로 양쪽 모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대부분 검은색 승용차였다. 치엔 부인이 탄 택시가 대문 가까이에 이르자 부인은 내리겠다며 차를 세우라고 기사에게 말했다. 거대한 철문이 양 옆으로 열렸다. 문 위쪽 등이 환하게 빛나는 가운데  입구 양쪽에 각각 위병이 서 있었다. 수행원 차림의 사내가 나와서 운전기사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치엔 부인이 차에서 내리자 그가 서둘러 다가와 맞이했다. 베이지색 중산복 차림에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했다. 치엔 부인이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수행원은 명함을 받아 들더니 곧바로 만면 가득 웃음을 짓고 부인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쑤베이蘇北 억양으로 인사했다.

"치엔 부인, 저 류劉 부관副官 입니다. 기억하시는 지요?"

"류 부관?" 치엔 부인이 그를 다시 한번 살펴보곤 살짝 놀라서 말했다. "그래요, 난징 페이깡悲巷 저택에서 뵌 적 있었죠. 오랜만이에요, 류 부관. 별일 없으셨죠?"

"예, 덕분에 전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류 부관이 또다시 깊숙이 허리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 손전등으로 앞길을 비추며 부인을 인도했다. 자동차 도로가 화원을 빙 둘러 저택 본관까지 이어져 있었다.

"부인께서는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앞장서 걸어가던 류 부관이 고개 돌려 치엔 부인에게 미소를 띄며 말을 걸었다.

"네, 저도 잘 지내요. 고마워요" 치엔 부인이 말했다. "장관 부부께서는 평안하신지요? 오랫동안 뵙지 못했네요."

"부인은 잘 계십니다. 장관께서는 요즘 공무로 바쁘시고요" 류 부관이 대답했다.

또우 저택의 화원은 굉장히 넓고도 깊었다. 화원에 가득 일렁이는 그림자로 미루어 보건대 온갖 나무와 꽃이 촘촘히 심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담벼락을 따라서는 야자수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높다란 야자수 위로 가을밤 푸른 달이 둥실 떴다. 치엔 부인이 류 부관을 따라 종려나무 몇 그루를 돌아 걸어 나오는 순간, 또우 가의 2층 저택이 눈 앞에 펼쳐졌다. 건물 전체가 조명으로 환하게 빛났다. 본관 앞 반달모양 석조 노대露台 를 따라 질서 정연히 심어진 계수나무 열 몇 그루가 탐스럽게 꽃을  피웠다. 치엔 부인이 노대에 발을 딛는 순간 짙은 계화 향기가 훅 풍겨왔다. 본관 정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갖춰 입은 집안 고용인 몇몇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류 부관은 입구에 멈춰 서서 허리를 굽히고 손짓과 더불어 깍듯하게 환영 인사를 올렸다.

"부인, 안으로 드시지요"

치엔 부인이 현관 안쪽 대기실로 들어서자 류 부관이 여자 고용인에게 말했다. "어서 가서 치엔 장군 부인이 오셨다고 마님께 전하시게"

대기실에는 정교한 솜씨의 홍목 의자와 탁자 몇 개 만이 놓여있었다. 탁자 위 경태람 (景泰藍 : 명나라 경태 연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칠보공예양식. 청 황실에서도 대대로 애용) 화분들 가운데 관음보살이 그려진 화분엔 만년청萬年青 몇 그루가 비스듬히 심어져 있었다. 대기실 오른쪽 벽에는 거위 알 모양 전신 거울이 걸려 있었다. 치엔 부인이 거울 앞으로 다가가 검정색 가을 외투를 벗자 여자 고용인이 얼른 옷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 치엔 부인은 거울을 쓱 훑어보고 재빨리 손으로 머리 오른쪽으로 빠져나온 잔머리를 매만졌다. 오후 여섯 시에 시먼딩西門叮 홍장미 미용실에서 한 머리인데 방금 잠깐 화원 거닐며 바람 쐬었다고 엉망이 되다니. 치엔 부인은 거울로 한걸음 더 다가갔다. 몸에 걸친 암녹색 항저우 비단 치파오의 색감이 거슬렸다. 이 비단은 조명을 받으면 청아한 비취색으로 빛났는데, 방 불빛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촌스러운 밋밋한 색을 띄었다. 혹시 옷이 오래 돼서 색이 바래진 걸까?  난징에서 가져와 입지 않고 궤짝에 보관해둔 귀한 항저우 비단옷이었다. 몇 년 동안이나 아껴 두었다 오늘 오랜만에 꺼내 입고 왔는데. 이러면 백조 부티크에서 새 옷 사서 입고 온 것만 못하잖아. 하지만 그녀는 늘 대만산 옷은 색감이 조잡한데다 광택은 싸구려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비단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대륙산에 비길 바가 아니지.

"다섯째 동생 왔는가"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또우 부인이 들어와 치엔 부인의 양손을 맞잡고 활짝 웃었다.

"셋째 언니" 치엔 부인도 같이 웃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다들 오래 기다리셨죠?"

"무슨 말을, 딱 맞춰 왔는 걸. 다들 이제 자리에 든 참이야"

또우 부인이 치엔 부인 팔짱을 끼고 대기실을 걸어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며 치엔 부인은 또우 부인을 곁눈질로 훑곤 마음이 두근거렸다. 역시나, 계지향桂枝香은 여태 나이 들지 않았다. 난징을 떠나던 그 해, 매원신촌梅園新村 저택에서 열었던 계지향의 30세 생일 축하 주연 정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월대(月台 : 저택의 테라스 혹은 극장의 무대) 의 자매들 거의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 계지향의 친동생이자 훗날 런任 주석主席, 런쯔츄任子久 에게 소실로 시집간 열 셋째 천랄초天辣椒, 그리고 그녀 자신의 친동생인 열 일곱째 월월홍月月紅 까지 - 몇몇이 서양 풍습에 맞춰 30촌 (약 90cm) 높이 쯤으로 보이는 2단 축하 케이크를 마련해왔다. 꼭대기에 붉은 초가 삼십 개쯤 꽂혀 있었지. 그럼 지금 언니 나이는 사십이 넘었겠네? 치엔 부인이 또다시 또우 부인을 쓱 쳐다보았다. 또우 부인은 주사硃砂가 점점이 흩뿌려진 은회색 시폰 치파오를 입고 옷에 맞춰 반짝이는 은회색 하이힐을 신었다. 오른손 무명지에는 연씨 만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끼고 왼쪽 팔목엔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둘러진 백금 팔찌를 찼다. 머리에 꽂은 초승달모양 산호 비녀와 양 귓가에서 일직선으로 곧게 떨어진 자줏빛 귀걸이 한 쌍이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 고결하고 우아한 풍모를 더했다. 난징 시절 계지향은 이처럼 기품 넘치진 않았다. 그때 계지향은 아직 소실이었고 또우뤼셩竇瑞生은 차장에 불과했으니까. 이제 또우뤼셩은 장관이고 계지향도 정부인이 되었다. 과연 고진감래라, 언니 얼굴이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남편은 회의가 있어 남쪽에 갔어. 오늘밤 다섯째가 온다고 말하니 특별히 안부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또우 부인이 고개 돌려 웃으며 말했다.

"아, 형부 마음씀씀이는 여전히 세심하세요" 치엔 부인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응접실이 가까워지자 안에서 사람들이 환담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우 부인은 응접실 문 앞에 멈춰 서서 다시금 치엔 부인 양손을 맞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다섯째, 어서 타이베이로 이사오지 그러니. 동생 혼자 남쪽에서 얼마나 쓸쓸할까, 늘 맘이 편치 않았는데.  오늘 모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데려오려 했단다 - 열 셋째가 왔어"

"그 애도 여기 있어요?" 치엔 부인이 물었다.

"너도 알잖니. 그 애, 런쯔츄가 세상 떠나자마자 그 댁에서 나왔어" 또우 부인이 치엔 부인 귓가에 소곤소곤 말했다. "런쯔츄네 가산이 꽤 되잖아, 열 셋째도 덕분에 부족함 없이 살았고. 오늘 밤은 그 애 덕에 활기가 돌 거 같네. 대만에 온 이후로 처음인 걸. 그 애, 상심락사 (賞心樂事 : 소설 속 전통가극 동호회 이름, 즐거운 마음과 좋은 일을 뜻함. 양신良辰, 미경美景 과 함께 네 가지 아름다움四美 으로 꼽히며 모두를 동시에 가질 순 없다는 성어 사자난병四者難幷이 곤극 모란정에서 유래) 친구 몇 명 데리고 왔는데 징, 북, 생황, 퉁소 연주자 전부 있지 뭐야. 다들 동생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단다"

"아냐, 괜찮아요, 언니.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자리에 나서겠어요! " 치엔 부인이 겸연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너무 겸손하지 않아도 되, 다섯째. 남전옥藍田玉 네가 못하면 누가 감히 먼저 노래하겠니?"  또우 부인이 미소 지으며 치엔 부인이 미처 망설일 새도 없이 응접실로 이끌고 들어왔다.

응접실 안 동쪽과 서쪽에 각각 아리따운 색색가지 비단 치파오를 차려 입은 손님들이 앉아있었다. 응접실은 드넓은 凸자 형태로 중국식과 서양식이 한데 어우러진 모양새였다. 좌측에는 쿠션이 놓인 소파가, 우측에는 자단경목紫檀硬木  탁자와 의자 그리고 중간에 여의주를 문 용 두 마리가 수놓아진 양탄자가 깔렸다. 좌측은 기다란 소파 두 채와 일 인용 소파 네 채가 마주 보는 형태로 둥그렇게 배치되어 있었다. 소파는 검정색 바탕에 새빨간 해당화가 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한가운데 얕은 탁자 위에 놓인 두 척 (약 60cm) 높이의 푸른색 가느다란 화병 안에는 노란 꽃잎과 붉은 꽃술이 길게 뻗어 나온 용수국龍鬚菊 다발이 꽂혀 있었다. 우측 자단 의자 여덟 채가 빙 둘러싼 대리석 팔선탁八仙桌  위에는 각종 다과함과 다기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凸자 위쪽 공간에는 높은 등받이 홍목 의자 여섯 채가 셋 씩 각각 반원 모양으로 배치되었고 가운데에는 운모편雲母片 이 상감된 유운편복 (流雲蝙蝠 : 구름 사이로 박쥐가 날아다니는 문양. 박쥐의 蝠 는 福 과 같은 발음. 장수, 길운 상징) 문양 오동나무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의자 위에 놓인 징과 호금이 치엔 부인 눈에 띄었다. 그 앞의 나무 탁자 두개에는 각각 소고小鼓, 그리고 생황笙 과 퉁소蕭 가 놓여있었다. 응접실 좌우 바닥에 설치된 조명에서 비스듬하게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징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또우 부인은 치엔 부인을 응접실 오른쪽 소파로 데려가 진주빛 치파오를 입고 옥 장신구로 치장한 50대 여자 손님에게 인사 시켰다.

"라이賴 부인, 이쪽은 치엔 부인이에요. 두 분 전에 뵌 적 있으시죠?"

치엔 부인은 라이샹윈賴祥雲의 부인을 알아보았다. 예전 난징 시절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마주한 적 있었다. 그 시절 라이샹윈의 직위는 아마 사령관 쯤이었는데,  대만에 오고나서부턴  신문에 부쩍 자주 이름이 오르내렸지.

"치엔錢 공公 부인이시죠? " 라이 부인이 옆자리 남자 손님과 이야기 하다 말고 몸을 돌려 치엔 부인을 위아래로 살짝 훑어보더니 점잖게 일어났다. 치엔 부인과 한 손으론 악수하며 다른 손은 이마에 갖다 대고 말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그리곤 옆자리 남자 손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남자는 대춧빛 얼굴에 벗겨진 머리, 장대한 체격에 짙은 남색 두루마기를 걸쳤다. 라이 부인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위余 참모장參軍長 이랑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 매란방梅蘭芳이 세번째로 상하이에 내려 왔을 때, 단계丹桂 극장에서 처음 올린 무대가 뭐였죠? 좀체 가물가물하니 떠오르지 않네. 기억력이 너무 떨어졌어!"

아까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위 참모장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이 출연하셨던 난징 여지사(勵志社: 국민당 군부 내 조직.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 모임으로 시작) 특별 공연을 관람했었답니다. 부인께서 <유원경몽 遊園驚夢> 을 부르신 걸 기억합니다"

"맞아요" 라이 부인이 맞장구 쳤다. " 부인 명성은 전부터 들었다우, 오늘밤 치엔 부인 노래에 우리 모두 귀 호강 하겠구려"  

치엔 부인은 재빨리 위 참모장에게 몇 마디 겸양의 뜻을 표했다. 난징 시절 위 총장은 그녀 저택을 한번 방문한 적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 뒤로 무슨 사건엔가 연루되어 강제 퇴직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  또우 부인이 또다시 치엔 부인을 이끌고 가 한 바퀴 돌며 손님들에게 인사 시켰다. 치엔 부인으로선 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다들 젊은 부인네들이고 하니 아마 대만에 온 후에 출세한 이들이겠지.

"우리 저쪽으로 가자. 열 셋째랑  상심락사 회원들이 계시네"

또우 부인이 이렇게 말하면서 치엔 부인을 이끌고 응접실 오른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붉은색 치파오를 입은 여자 손님이 종종걸음으로 와서 치엔 부인 팔짱을 덥썩 가로채더니 몸을 흔들어대며 깔깔거렸다.

"다섯째 언니, 방금 셋째 언니한테 다섯째 언니 온다는 거 듣고 모두한테 알렸어. 오늘 진짜 주연배우가 납신다고 다들 기대 만발이야"

치엔 부인은 또우 부인에게서 천랄초天辣椒 쟝삐위에蔣碧月 가 이 자리에 있단 걸 좀 전에서야 들었기에 동요한 기색을 감추느라 속으로 애를 먹었다. 오래  전 시집간 몸이건만 천랄초의 언행은 전혀 어른다운데가 없었다. 자매들이 난징 공자묘(夫子廟: 공자 사당과 더불어 각종 상업, 문화 시설 몰린 지역. 난징의 명동)  무대에서 노래하던 시절, 천랄초는 늘 스승에게 고집을 피워 좋은 배역을 선점하곤 했다. 무대에 올라서도 그녀는 규범을 무시하고 눈꼬리를 치켜 뜨고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편 친자매 간에 성격도 천양지차였다. 성숙함이나 책임감에서 그녀의 언니 계지향을 따를 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언니 덕분에 천랄초가 받아 챙긴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런쯔츄가 언니에게 이미 약혼 예물까지 보냈음에도 천랄초는 중간에서 혼사를 파토내는 재주를 보였다. 원체 무던한 성품인 계지향이 몇 년을 더 참고 기다린 끝에 간신히 또우뤼셩의 소실로 시집갔다. "친동생이 언니 발목을 잡다니!" 라며 계지향은 한숨을 푹 내쉬곤 했다. 치엔 부인은 재차 천랄초 장삐위에를 눈여겨보았다. 쟝삐위에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 공단 치파오를 입고 양 팔에 금사슬 팔찌 여덟 개를 치렁치렁 걸쳤다. 얼굴 화장 역시 유행에 따라 눈썹과 아이라인을 짙게 강조했다.  머리는 섬세하게 틀어올리고 양 귓가엔 맵시 있는 초승달 머리핀을 꽂았다. 런쯔츄가 죽은 후 천랄초는 예전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거침없어졌다. 동란의 세월도 이 여인의 자태에는 약간의 상흔조차 남기지 못했다.

"자, 여러분 보세요, 여기 치엔부인이 진짜 여자 매란방梅蘭芳 이라니까요!"

장삐위에가 남녀손님들에게 야단스럽게 치엔 부인을 소개했다. 남자 손님 몇이 황망히 일어나 치엔 부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삐위에, 그런 말 하지 말어. 다들 속으로 뭐라 생각하시겠니"

치엔 부인이 예를 차리면서 가볍게  삐위에를 나무랐다.  

"삐위에 말이 맞지" 또우 부인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네 곤곡昆曲 이야말로 매파(梅派: 매란방의 유파)  를 제대로 이어받았잖니 "

"셋째언니-"

치엔부인이 주저주저하며 몇 마디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곤곡에 관해서라면 치엔펑즈錢鵬志 도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섯째,  남방, 북방 통털어 명가수들 노래  다 들어봤지만 당신 곤강 (昆腔 : 곤극 노래의 하이라이트, 오페라의 아리아에 해당) 이 최고요"

치엔펑즈가 말하길, 난징에서 들은 그녀의  유원경몽 遊園驚夢 이 상하이에 돌아와서도 귓가에 메아리치더란다. 낮이고 밤이고 도무지 머리에서 지울 수 없어  난징으로 되돌아와 청혼한 거라고. 그는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를 곁에 두고 곤강 듣는 걸 도락삼을 수 있다면 남은 생에 더 바랄 바가 없으리라고. 그때 그녀는 막 뜨기 시작한 유망주였다. 그녀가 곤강 한 곡조 뽑았다하면 무대 아래선 폭풍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극단 스승님도 말씀하셨다. 공자묘의 모든 가수들 가운데  남전옥이야말로 정통중의 정통이라고.

"말했잖아, 다섯째언니. 봐봐, 여기 쉬徐 경리經理 부인도 곤극 고수라니까"

쟝삐위에는 검은색 치파오를 입고 산뜻하게 화장한 젊은 부인 앞으로 치엔 부인을 데려갔다. 그리고 또다시 웃으며 또우 부인에게 말했다. "셋째언니, 쉬 경리 부인 먼저 유원遊園 을 노래하고 다섯째 언니가 경몽驚夢 을 이어부르면 되겠네.  누가 최고인지 겨루는 김에 우리 귀호강도 하자구" 쉬 부인이 서둘러 일어나 어찌 감히, 라며 사양했다. 치엔 부인 역시 겸손한 말  몇 마디를 덧붙이며 어찌 저리 말을 함부로 할까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 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다들 조예가 깊을 터이다. 쉬 부인 다음 무대에 올라선 그녀만큼 훌륭히 해내지 못하면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겠어. 여기 사람들은 음정, 박자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을 텐데. 남쪽에서 사는 동안 제대로 소리 연습 해볼 시간 따위 전혀 없었다고. 그리고보니 재봉사 말도 맞아. 타이베이에선 긴 치파오는 유행에서 한참 지났다더니 과연, 이곳 사람들 모두 - 심지어 나이 들어 주름이 쪼글쪼글한 라이 부인까지 - 무릎까지만 오는 치파오를 입고 종아리를 드러냈잖아.  난징 시절 부인네들은 끝자락이 발꿈치에 닿을락 말락한 치파오가 아니면 감히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건만. 이런 옷차림으로 여기 사람들 앞에 서는 게 괜찮을지도 모르겠고, 새삼 재봉사 말을 듣지 않은게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무대에 올라 자세를 취하는 아주 짧은 순간, 모두의 시선을 휘어잡아야 한다. 난징 매원신촌 시절엔 손님들 요청으로 무대에 오를 때마다 소리를 뽑기도 전에 다들 환호성을 질렀지.

"청程 참모參謀, 이 쪽은 치엔 부인이예요. 나 대신 잘 모셔줘요, 소홀히 했다간 내일 한턱 내야 할걸"

또우 부인은 서른 몇살쯤으로 보이는 장교 앞으로 치엔 부인을 데려와 웃으며 당부하고  몸을 돌려 치엔 부인에게 속삭였다. "다섯째, 여기서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있어. 청 참모는 가극에 대해선 모르는게 없어 . 난 앞쪽 자리 손님들께 인사 좀 드리고 올게"

"치엔 부인,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청 참모가 똑바로 일어서서 치엔 부인을 향해 민첩하게 군대식 경례를 올렸다. 그는 속에 황토색 여름용 군인 예복을 받쳐 입고 금색 매화 두 송이 휘장이 달린 외투를 걸쳤다. 발목까지 오는 가죽 부츠는 반짝반짝 광이 났다. 치엔 부인에게 웃어보이며 자연스레 새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냈다. 갸름한 얼굴에 깨끗이 면도한 턱, 가느다란 눈과 눈썹은 시원스레 위로 향했다. 콧날은 날렵했으며 끝 부분은 아래로 살짝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고 칠흑 같은 머리칼은 깔끔하게 빗어 넘겼다. 큰 키에 군복을 입은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늠름하고 씩씩했지만 치엔 부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목소리에는 무인의 투박함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부인, 이쪽으로" 청 참모가 자신의 의자를 빼서 방석을 가지런히 한 다음 부인에게 권했다. 그리곤 팔선탁 위 자스민 차와 사색다과함을 집었다. 치엔 부인이 석류빛 찻잔을 건네받기 직전, 청 참모가 잔잔한 목소리로 목소리로 말했다. "잔이 뜨겁습니다, 조심하세요"

그리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양이 그려진 다과함 뚜껑을 열어 두 손에 받쳐 들고 치엔 부인 앞에 공손하게 내밀었다. 치엔 부인이 잣 몇 알을 집자 청 참모가 재빨리 말했다.

"부인, 잣은 목을 상하게 할 수 도 있습니다. 대신 과밀조(顆蜜棗 : 꿀에 절인 대추) 가 어떨까요. 성대를 매끄럽게 해주는 걸로 압니다 "

청 참모가 이쑤시개에 대추 하나를 끼워 부인에게 건넸다. 치엔 부인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대추를 받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농후한 단맛이 입안에서 사르르 퍼졌다.

"부인께선 요즘 어떤 연극을 관람하셨는지요? " 청 참모가 자리에 앉아 웃으며 말을 걸었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여 상대방 말을 경청하는 자세였다. 치엔 부인 눈에 다시금 불빛 아래서 반짝이는 그의 하얀 이가 눈에 들어왔다 . " 요즘엔 통 보지 못했네요" 치엔부인이 자스민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 남쪽엔 별 볼만한 공연이 없어서요"

"장아이윈張愛雲 이 요즘 국광극장  <낙신洛神> 에 나온답니다, 부인"

"그래요?" 치엔부인이 고개를 숙인 채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망설이는 투로 대답했다. " 전 상하이에서 그 공연을 봤어요 - 아주 오래 전이었죠"

"쟝아이윈은 여전히 현역입니다. 청의제주(青衣祭酒: 곤극 여주인공 의상이 푸른색인데서 연유한 찬사, 프리마돈나.) 칭호가 아깝지 않죠. 복비(宓妃: 강의 여신) 와 조자건 (曹子建: 조조의 셋째아들 조식)사랑 노래를 어찌나 근사하게 섬세히  풀어내던지"

치엔 부인이 고개를 들자 청 참모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청 참모의 가늘고 긴 시선에 감겨버릴 것만 같았다.

"누구 노래가 근사하다고? " 천랄초 장삐위에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청 참모는 즉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쟝삐위에는 해바라기 씨를 집어들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오도독 깨물어 껍질을 깠다. "청 참모, 다들 청 참모 내공이 보통 아니라 하던데, 치엔 부인이야말로 가극계의 통천교주通天教主 아니겠어요. 섣불리 아는척 하다간 밑천 드러날지도 몰라"

"쟝아이윈의 <낙신> 공연  이야기 하면서 치엔 부인께 한 수 배우는 참이었습니다" 청 참모는 쟝삐위에에게 말하면서도 눈으로는 치엔 부인을 쫓았다.  

"아, 쟝아이윈 말이군요? " 쟝삐위에가 피식 웃었다. "장아이윈 걔는 대만에 와서 후배들이나 가르칠 것이지, 툭하면 나와서 <낙신> 을 부르네. 복비 역에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야! 저번주 토요일에 국광 극장에 가서 겨우 뒷 자리 표 구해서  봤는데 벙긋벙긋 입만 움직이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던걸. 노래 반절도 다 못 불렀는데 목이 가버리더라니까 - 아, 셋째 언니 이쪽에 앉아요"


--------------------------------------------------------------------------------------------------------------------------------------------------------------------------

바이셴융 (白先勇, 1937~) 작가 <타이베이 사람들> 수록 단편 두 번째 소개입니다. 저번 <일파청> 은 작가가 상, 하편으로 구분한 걸 따랐지만 이건 제가 임의로 나눴습니다. 일파청 상, 하편 합친 거에 1.5배 쯤 분량이라 자르지 않을 수 없네요.

1966년 발표작입니다. 60년대면 뭐다? 대륙에선 홍위병 수백만 천안문 광장 집결, 반동우파 싸그리 몰아내자 외치고 (+ 전통, 옛날 붙은 건 소설이고 노래고 연극이고 죄다 적폐 ㅋ)대륙에 붙은 홍콩도 홍콩대 학생들 시위 정신없었다고 하죠. 대만이라고 사람들 언제 들고 일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 마침 이때부터 장제스 건강에 이상신호가 -_-; - 어쨌든 결과적으론 정권 수호 / 2세 세습 성공합니다. 그 와중에 장징궈 후계 구도에 잠재 위협 요소인 대륙시절 군벌들/ 2,3인자들은  월북 중공에 투항하거나(리쫑런), 가택연금 당하거나 (쑨리런), 감옥에 들어가거나 (라이쩐), 미국으로 튀거나 (우궈쩐), 스트레스 받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 떠나거나 (천청, 사인 간암)  등등 하나씩 갈려나가고  작가 아버지인 바이충시 장군도 1966년 사망합니다. 작가는 이때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지만 나중에 고백하길,  본인 삶에서 한창 예민하고 힘들 때였다고. 

인간, 현생 힘들수록 허구와 환상에 더욱 몰입하는 성향을 많고 적음 차이 있을지언정 다들 조금씩 갖고 있죠.   특히 예민하고 젊은 나이일수록, 그리고 경제적으로 최소한 내일 당장 굶어 죽을 걱정이 없음 더더욱요 -_-;;  작가는 중국 전통 가극 (경극/곤극) 애호가이자 <홍루몽> 매니아이고 이 소설은 그러한 덕후질의 결정체인 것입니다.제목이자 극중극으로도 소개되는  <유원경몽>은 <모란정> 이라는, 명나라때 창작된 곤극의 한 단락이고,  <유원> 과  <경몽>  은 각각 극의 대표 넘버입니다.  한편 이야기 첫 머리에서부터  줄줄이 소개되는 온갖 사치스런 가구, 비단옷, 장신구, 간식, 요리 등등, 소품 하나에도 <홍루몽> 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지 않은 게 없습니다.  하다못해 치엔 부인이 집었다가 청 참모 만류로 먹지 않은 잣 松瓤 조차 <홍루몽> 에서 따온 흔적이 보입니다. <홍루몽> 월드의 특산 과자 <奶油松瓤卷酥  잣 페스츄리> 에서요.  같은 잣이라도 일반인 간식이믄 松仁 이지만서도,  홍루몽 공주님들이 맛보시는 과자에 들어가는 귀한 특등 재료라면  松瓤 라고 높여 불러야 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물론 이들 고전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사치품 묘사만 빌려온 건 당연 아닙니다. 그랬다면 단순 팬픽 수준이고  오늘날 또 다른 고전으로 대우받진 못하겠죠. 
인물들의 상징색 (치파오와 장신구 색을 보세요), 상징 식물 (꽃), 이름 (옛날 가수 시절 예명이랑  현재 호칭이 좀 정신없으니 정리합니다 : 3번 계지향 - 또우 부인, 5번 남전옥 - 치엔 부인, 13번 천랄초 - 쟝삐위에, 17번 월월홍 - 현재시점 미등장 그리고 청일점 청 참모) 등등에  깔린  <홍루몽>  그리고  <모란정> 을 위시한 전통 가극의 각종 레퍼런스들이 과거 - 현재, 연극 - 현실의 대비와 전복 구도를 한시처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맨 처음 나오는 소품 <거울> 의 중요성, 상징성은 말할 필요가 없겠죠. 

본편 다 올리기도 전에 해설 넘 늘어지는 건 본말전도라 ㅋㅋ 다음 편에 설명 덧붙이겠습니다. 
아, 이미지는 왕조현,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2001년작 영화 <유원경몽> 입니다. 소설과 직접 연관성은 없으나 <유원경몽> 에서 주요 모티브 따왔다는 점, 3,40년대 남중국 배경 예인 / 귀부인들이 주인공이란 점은 비슷합니다. 무엇보다 예뻐요, 예뻐.... 

+ 완전 사족이지만 ㅋㅋ 5,60년대 대만 가극계의 <청의제주> 는 구쩡츄 顧正秋 란 배우였습니다. 대륙시절 매란방에게 사사받았고, 대만 와서도 주연으로 활약했는데  지금 와선 당시 장제스 후계자이자 군부/경찰/정보조직 수장 장징궈랑 재무부장관 린센췬 사이의 삼각관계 (...) 로 더 유명합니다. 린셴췬은 당시 정부복권 (애국복권)/영수증복권 발행 사업으로 세수 늘려 정부 재정 탄탄하게 만든 공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장징궈가 치사하게 감옥 보내버림 -_-; 역시 이 인간은 알콜중독이랑 분노조절장애에다 경제감각 無까지, 일반인으로 태어났담 본인 앞가림 못하고 백날 사고 치다 인생 험하게 마무리했을거 같아요 -_-;;;  



1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0643 6
    14625 의료/건강SOOD 양치법 + 큐라덴 리뷰 4 + 오레오 24/04/26 258 0
    14624 일상/생각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4 kaestro 24/04/26 337 1
    14623 방송/연예요즘 우리나라 조용한 날이 없네요 6 니코니꺼니 24/04/26 649 0
    14622 IT/컴퓨터5년후 2029년의 애플과 구글 1 아침커피 24/04/25 367 0
    14621 기타[불판] 민희진 기자회견 63 치킨마요 24/04/25 1700 0
    14620 음악[팝송] 테일러 스위프트 새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김치찌개 24/04/24 137 1
    14619 일상/생각나는 다마고치를 가지고 욕조로 들어갔다. 8 자몽에이슬 24/04/24 597 17
    14618 일상/생각저는 외로워서 퇴사를 했고, 이젠 아닙니다 18 kaestro 24/04/24 1130 17
    14617 정치이화영의 '술판 회유' 법정 진술, 언론은 왜 침묵했나 10 과학상자 24/04/23 816 9
    14616 꿀팁/강좌[해석] 인스타 릴스 '사진찍는 꿀팁' 해석 20 *alchemist* 24/04/23 680 14
    14615 경제어도어는 하이브꺼지만 22 절름발이이리 24/04/23 1414 8
    14614 IT/컴퓨터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1) 2 kaestro 24/04/22 349 1
    14613 음악[팝송] 밴슨 분 새 앨범 "Fireworks & Rollerblades" 김치찌개 24/04/22 115 0
    14612 게임전투로 극복한 rpg의 한계 - 유니콘 오버로드 리뷰(2) 4 kaestro 24/04/21 335 0
    14611 사회잡담)중국집 앞의 오토바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22 joel 24/04/20 1241 30
    14610 기타6070 기성세대들이 집 사기 쉬웠던 이유 33 홍당무 24/04/20 1570 0
    14609 문화/예술반항이 소멸하는 세상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소녀들 5 kaestro 24/04/20 689 6
    14608 음악[팝송] 조니 올랜도 새 앨범 "The Ride" 김치찌개 24/04/20 131 1
    14607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2편 15 kogang2001 24/04/19 394 8
    14606 요리/음식드디어 쓰는 쌀국수 투어 모음집 1편 4 kogang2001 24/04/19 368 10
    14605 게임오픈월드를 통한 srpg의 한계 극복 14 kaestro 24/04/19 554 2
    14604 일상/생각개인위키 제작기 6 와짱 24/04/17 825 12
    14603 정치정치는 다들 비슷해서 재미있지만, 그게 내이야기가 되면... 9 닭장군 24/04/16 1269 6
    14602 오프모임5월 1일 난지도벙 재공지 8 치킨마요 24/04/14 791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